지평 정응이 조강에서 외척과 환관의 폐해에 대해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지평(持平) 정응(鄭譍)이 아뢰기를,
"한(漢)·당(唐) 이후로 국세(國勢)가 위태로와진 것은 모두 외척의 권성(權盛) 때문이었습니다. 대개 권세에 연줄을 대고 환관들과 공모하며 굳게 한 통속이 되어서 간악한 일을 서로 도와 일으키니, 화란이 어찌 쉽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양기(梁冀) 같은 사람이 환관을 통해 그 간특함을 자행하여 권세가 높아지니, 동시대(同時代) 사람으로 중용(中庸)을 행한다고 일컫는 호광(胡廣) 같은 자도 그 위세에 눌려 항의를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추숭하였으며, 또 양웅(揚雄) 같은 자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으되, 왕망(王莽)의 시대를 당하여 구제하고 바루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도리어 글을 지어 왕망을 찬미함으로써 찬탈(簒奪)을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선비의 지조가 바르지 못하면 권세에 말려들지 않을 자가 적습니다.
지금 궁중의 문안(問安) 같은 일에 외인이 그로 인해 쉽게 통할 수 있으니, 지금 지조를 잃은 사람이 필시 밤낮으로 엿보아 내족(內族)에 붙어서 성심(聖心)을 고혹하고자 그 틈을 노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그 술책을 부리게 되면 화 또한 클 것입니다. 영명(英明)한 임금이라면 지기(志氣)가 강하고 본원(本源)이 이미 굳으므로 이와 같은 무리가 쉽사리 고혹시킬 수 없겠으나, 만약 어리고 나약한 임금이라면 곧 그 간교한 술책을 시험하며 모함하기를 획책하리니, 인주(人主)는 마땅히 원대하게 그 모책을 세워서 후사로 하여금 혹시라도 그 술책에 빠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척과 환관은 역대를 통하여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외척은 비록 난을 야기할 때가 있어도 그를 제재할 방법을 알면 예방할 수 있지만, 환관은 평시에도 교통(交通)할 수 있어 난을 일으킬 수 있는 자이다. 지난 반정(反正) 초기에 성윤(成胤)이 기세를 펴므로 민번(閔蕃) 같은 자가 추종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지금에 와서도 이와 같은 일이 꼭 없으리라고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정응은 아뢰기를,
"소인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한갓 눈앞의 이익만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간사한 자를 등용하고 선류(善類)를 모함하며 온갖 방법으로 중상합니다. 그렇게 되면 군자는 뜻하지 않은 화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갑니다. 예부터 소인이 일을 맡아 하면 군자는 참혹한 화를 입었고, 군자를 등용하면 소인은 다만 쫓겨갈 뿐이었으니, 군자는 소인을 원만히 대하고 소인은 군자를 너무 심하게 시기하기 때문입니다. 근일에 실직한 사람이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 쌓인 원한의 독이 만일 후일에 터지게 되면 군자가 조정에 쓰이지 못할 뿐 아니라 화란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신이 된 이가 호오(好惡)에 밝아 공평하게 무마하면 공론이 이로부터 행해지고 화패(禍敗)가 끝내 생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진념하소서."
하고, 정언(正言) 이희민(李希閔)은 아뢰기를,
"경연에서 늘 말씀하시기를 ‘환관은 가까이 말고 복례(僕隷)로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셨습니다만, 성상께서도 한갓 고사만 끌어다 댈 뿐입니다. 지금 들으니, 왕자(王子)를 접대할 때 환관을 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투호(投壺)하게 하고 상(賞)도 똑같이 내린다고 합니다. 무릇 환관을 대할 때 처음에는 비록 친압하지 않아도 한때 기희(技戲)가 좀 낫다 하여 임금이 그를 허여하면, 점차 성상의 총명을 가리게 됩니다. 예부터 환관은 기술을 가지고 임금의 비위를 맞추다가 끝내 임금을 고혹시키는 자가 많으니, 무릇 환관을 임금 앞에서 경계하고 계칙하게 하지 않고 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게 하면, 이들은 반드시 이로부터 엿보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이들과 친압하지 마셔서 틈을 엿보는 마음을 막으소서."
하고, 영사 신용개는 아뢰기를,
"신은 이 일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임금이 어찌 기희(技戲)로써 그 무리를 보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부터 어진 환관이 많지 않거니와, 비록 어질다 하더라도 그 소임이 있으니 예(禮)에 어긋나게 보아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몹시 타당하다. 내가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한 일이다. 왕자를 인접함에 허대(虛待)할 수 없었고, 투호(投壺)는 예기(禮器)라고 생각하여, 왕자로 하여금 투호하게 한 것이며,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환관에게 같이 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 정응이 아뢰기를,
"신도 미처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신료들이 만약 이를 듣는다면 모두 흩어져 떠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학문에 독실하게 뜻을 두어 항상 허물이 없기를 바라시면서 도리어 이와 같은 일이 그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시니, 외인이 만약 이를 안다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환관들은 밤낮으로 틈을 엿보고 있어 그들과 한번 접촉하면, 비록 뒤에 조금도 보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엿보는 마음은 끝내 아주 끊어지지 않게 되어 반드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가 있다.’ 할 것입니다. 이미 실수한 일은 할 수 없거니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개심(改心)하셔서 이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고, 시강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환관으로 대객(對客)을 삼는 것은 오히려 가하거니와 왕자와 짝지어 투호하게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왕자는 곧 지존(至尊)의 유체(遺體)이므로 결코 그 명분을 문란시킬 수 없습니다. 옛날에 당 현종(唐玄宗)이 오왕장(五王帳)을 설치하여 동침하게 해서 형제간에 우애하는 모습을 사관(史官)이 다 쓸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성상께서 종친(宗親)을 접대하심에 사관도 입시(入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참찬관 문근(文瑾)이 아뢰기를,
"환관의 투호를 외인은 아는데 정원은 모르고 있습니다. 조정에 관계되는 일이 이와 같이 된다면 그 피해가 필시 많을 것입니다. 총명한 임금이 하신 일을 사관·시종이 모른다면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총망중이라 미처 요량할 사이가 없었거니와, 이와 같이 살펴 규간하니 후에는 반드시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24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 풍속-풍속(風俗)
○壬辰/御朝講。 持平鄭譍曰: "漢、唐以後, 國勢孤危, 悉由外戚之權盛也。 蓋因緣攀附, 與宦寺同機共計, 擬爲一家, 結締堅固, 以相濟奸, 禍亂之出, 豈不易哉? 若梁冀之與通宦寺, 售奸恣慝, 逮夫權勢隆赫, 在一時, 雖如胡廣之號爲中庸者, 怵於威勢, 非徒不能抗議, 而又崇之。 且如(楊雄)〔揚雄〕 者, 亦盜名於儒者, 而當王莽之時, 頓無一言救正之, 至作書美之, 以成簒奪。 是故士之操守非正, 則鮮無趨入於權勢者。 若今宮閫之中, 凡如問安之事, 外人因之, 易爲交通。 今有失志之人, 必日夜窺覦, 托附內族, 欲蠱惑聖心, 以乘其隙者, 若一朝小售其術, 禍且大矣。 至如英明之主, 志氣方强, 本源已固, 此輩固不易惑也, 若幼弱之主, 則卽試奸術, 以期必陷之。 人主當遠立貽謀, 毋使後嗣, 或陷於其術可也。" 上曰: "外戚、宦官, 爲歷代通患, 然外戚則或有乘亂之時, 知其制之之道, 則可以防之, 宦者則雖平時, 亦有交通, 以成其亂者。 向者反正之初, 成胤以張氣勢, 如閔蕃者趨附之, 此亦可見。 今時亦不可謂必無此事也。" 鄭譍曰: "小人不知己分, 徒事目前之利, 登進奸回, 陷害善類, 百計中傷, 而君子橫罹禍患, 引身而退。 自古小人用事, 則君子被慘酷之禍, 君子進用, 則小人只令斥去而已者, 君子待之緩, 而小人嫉之已甚故也。 近日失職之人, 怨苦怏怏。 積憤之毒, 若潰於他日, 則君子不惟不見用於朝廷, 禍患有不可勝言者。 今之爲大臣者, 明其好惡, 公平以鎭之, 則公論自爾而行, 禍敗終不生矣。 自上尤當軫念之。" 正言李希閔曰: "今者經筵之上, 每曰如宦者, 宜不借辭色, 待以僕隷, 而在上亦援據古事而已。 今聞接待王子時, 命宦者, 與王子, 竝肩投(壼)〔壺〕 , 賞賜亦同。 凡初待宦者之時, 始雖不寵昵之, 或一時技戲之稍善者, 人主或許之, 則漸至於欺蔽聰明。 自古宦寺將技術, 以中人主之所喜, 終爲蠱惑者衆。 夫宦者於君前, 不使儆飭, 而與王子比立, 此輩必自此有窺覦之心矣。" 願殿下, 須勿復狎昵此輩, 以杜窺伺之心也。" 領事申用漑曰: "臣未聞此事矣。 人主豈以技戲而假借此輩乎? 自古宦官之賢者不多, 雖賢自有所任, 不可假以非禮也。" 上曰: "所言甚當。 予初不思而爲之, 引接王子, 不可虛待也, 故以謂投壺, 乃禮器也, 使王子投之, 然不可獨投, 故命宦者與之投也。" 鄭譍曰: "臣亦未及聞之。 臣僚若聞之, 必皆解體矣。 殿下篤志學問, 常要無愆, 而反不知此事之爲非也。 外人若知之, 將缺其望矣。 宦者日夜伺候其隙, 一與之接, 則後雖不復小借, 而其所窺望之心, 竟未永絶, 必謂殿下有所嗜好也。 旣失之, 事已矣。 願殿下必改而勿復如此也。" 侍講官金正國曰: "以宦官爲對客者, 猶可也, 至於與王子作耦投壺, 王子乃至尊之遺體, 名分不可紊亂。 昔唐 玄宗設五王帳同寢, 其華萼相友之狀, 史官得以盡書。 今上之待宗親, 史官亦可入侍也。" 參贊官文瑾曰: "宦者投壺, 外人猶知之, 政院不知。 若關於朝政之事而如此, 則所害必多。 明主擧事, 史官、侍從不知之, 豈美事哉?" 上曰: "其時怱卒之中, 未及料之矣, 如此糾正, 則後必不復爲也。"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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