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서 왕세자의 보양 문제와 인재의 등용과 유일 천기에 대해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이자(李耔)가 아뢰기를,
"무릇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임금의 처사를 보고 다음에 조정 대신의 처사를 보아, 반드시 ‘이 사람은 위협하면 될 수 있고 이욕(利慾)으로 유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다음에 그 경중을 헤아려 일을 꾸밉니다. 한(漢)나라의 급암(汲黯)이 정사를 보는 재능에 있어서는 그 당시 대신들의 하는 일에 미치지 못함이 있었으나 굴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기 때문에,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반심(反心)을 품었을 때, 당시의 다른 대신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급암에게만은 두려움을 품었습니다. 조정에 굴하지 않는 신하가 있으면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어린 자식을 맡길 만하다.’ 한 말은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조와 절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고, 참찬관 조광조는 아뢰기를,
"급암은 조정에 있는 신하이거니와, 비록 초야에 있는 미천한 선비라 해도 지조가 있으면 한 시대에 중시되어 의지할 수 있습니다. 동한(東漢) 말엽에 공융(孔融)이 초야에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거사하지 못하다가, 그를 죽인 뒤에야 반역을 모의하였습니다. 하물며 조정의 반열에 있고 또 대신의 지위에 있는 자이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최숙생(崔淑生)은 아뢰기를,
"태자가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참언(讒言)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진(晉)의 태자 신생(申生)이 멀리 곡옥(曲沃)에 있었기 때문에 소인들이 안에 있으면서 근거없는 말로 선동하였는데, 헌공(獻公)은 그 진실을 확실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참소가 쉽게 들어갔으며, 진 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 역시 태자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참언이 승세하여 골육(骨肉)이 보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하기를 문왕(文王)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왕계(王季)에게 하루 세 번씩 조회하듯 하면, 부자간의 정의에 간격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정언 최산두는 아뢰기를,
"예부터 제왕이 어찌 처음부터 국본(國本)037) 의 마음을 흔들고자 하였겠습니까? 주(周)의 유왕(幽王)·혜왕(惠王)과 진(晉)의 헌공(獻公)이 포사(褒姒)·혜후(惠后)·여희(驪姬)를 얻어 정의가 고혹(蠱惑)되므로 부자의 사이가 자연 멀어졌고, 시기하고 혐의하는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자라났습니다. 그 사이 아첨하고 참소하는 무리가 어느 대인들 없었겠습니까? 제왕의 마음을 엿보고 안팎으로 결탁하여 국본을 흔드는데, 그 국정(國政)을 맡은 대신은 또 불굴의 지조가 없이 중간에 서서 구국하지 아니하여 끝내 그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이와 같은 점을 살펴야 합니다."
하고, 광조(光祖)가 아뢰기를,
"최숙생의 말이 극히 절실합니다. 우리 나라 일로 말하면 원자(元子)와 제왕자(諸王子)가 탄생하면 반드시 여염집에서 양육합니다. 지금 세상에 어찌 참소하며 넘겨다보는 일이 있겠습니까만, 그렇다고 어찌 꼭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부자의 정의가 혹 이 때문에 쇠약해질까 두렵습니다. 무릇 참소가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정의가 가깝지 못한 데서 연유되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또 속담에, 조부모(祖父母)의 애정(愛情) 밑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의 애정(愛情) 밑에서 자란 아이와는 부모에 대한 정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사가(私家)와 나라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모름지기 아침저녁으로 사랑하고 어루만져 더욱 천륜(天倫)을 두터이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좌우에서 말한바 절의(節義)는 과연 나라의 큰 규범이니, 항상 강론하여 밝히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전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인쇄하여 반포하였는데 그를 강독하여 체념(體念)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만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기절(氣節)이 있는 자를 뽑아 권장하고 등용해야 한 시대의 흐름을 고칠 것이니, 이는 전조(銓曹)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숙생(淑生)이 윤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광조가 아뢰기를,
"시종(侍從)은 신중히 뽑아야 합니다. 삼시 경연(三時經筵)에 임금과 도의(道義)를 강론하게 되니, 부득이 학문이 풍부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자로 할 것이요, 문장이 볼만하거나 문벌이 높은 자로만 할 수 없으며, 또 너무 미천한 초야의 인사도 할 수 없습니다. 출신한 자는 벌써 모두 고위(高位)에 있고, 아래는 그를 계승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지금이 사람을 뽑아 써야 될 때라고 봅니다."
하고, 영사 신용개는 아뢰기를,
"사장(詞章)으로 사람을 뽑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사대(事大)할 때 사장을 많이 쓰니 사장 또한 전폐할 수는 없습니다. 유독 경학(經學)을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사장의 재주가 있는 자를 관(館)에 들어가게 하는 것도 의리(義理)의 학문을 하는 데 해될 것이 없습니다. 대저 지금은 시종·대간이 많이 비어 있으니, 이것은 문신(文臣)이 수령(守令)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어버이가 서울에 있으면서 외임(外任)을 구하는 자는 일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광조는 아뢰기를,
"사장(詞章)은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사장을 전심하여 숭상하면 부박(浮薄)한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사장이 있고 또 덕행이 있으면 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만, 지향(志向)이 정해지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선한 일을 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자(李耔)는 아뢰기를,
"조정에 인물이 부족하다는 걱정이 있으니 이것은 괴이한 일입니다. 한 시대의 인물을 신이 감히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어찌 반드시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사람을 선택하는 길이 극히 협소하기 때문에 많이 막히고 있으니, 전조(銓曹)에서 사람 쓰는 것을 책망하기도 어렵습니다. 대신과 시종으로 하여금 분명히 그 천망을 의논하여 재행(才行)이 쓸만한 사람을 얻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별시(別試)도 조종조의 일이나, 한 번 이와 같이 하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하고, 숙생은 아뢰기를,
"인물이 어찌 없다고만 하겠습니까? 국가에서는 반드시 과거로 뽑은 후에 쓰일 곳에 임용하는데, 외방에 있는 유일(遺逸)로서 어진이는 비록 여러 번 천망하여 발탁하지만 과거를 거쳐 뽑은 사람과 달리 임용하니, 그 사람은 이것을 천하게 여겨 취임하기를 좋아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거한 사람을 과거 출신(科擧出身)의 예로 임용한다면, 전조(銓曹)는 반드시 인재가 없다는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매, 광조가 아뢰기를,
"이자(李耔)가 아뢴 말은 신 등이 늘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외방의 경우는 감사(監司)·수령(守令), 경중(京中)의 경우는 홍문관(弘文館)·육경(六卿)·대간(臺諫)이 모두 재행(才行)이 있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정(大庭)에 모아 놓고 친히 대책(對策)하게 한다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조종이 하지 않았던 일이요, 한(漢)나라의 현량과(賢良科)·방정과(方正科)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덕행(德行)은 여러 사람이 천거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헛되거나 그릇되는 것이 없을 것이요, 또 대책에서 그가 하려고 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요, 두 가지가 모두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나 단지 천거할 때 혹 빠뜨릴까 염려된다."
하매, 용개(用漑)가 아뢰기를,
"비록 팔도의 수령·감사에게 천거하도록 하더라도 언어(言語)로는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들으니, 유일(遺逸)의 선비로 천거를 받아 오는 자가 곧 종전에 서울에 와서 훈도(訓導)를 구하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례로 어진이 천거하는 일을 다 불신할 수는 없으나,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광조는 아뢰기를,
"전에 훈도를 구하던 사람이 천거의 반열에 참여한다고 해서 천거의 일을 전혀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자못 옛법에 가까우니 실행해야 할 것이요, 실행하면 분경(奔競)038) 하는 폐풍이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그 사이에 천거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대체로 인재를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이와 같이 세밀히 하더라도 빠지는 자가 있을까 염려된다."
하매, 숙생이 아뢰기를,
"비록 그 사이에 혹 빠지는 자가 있더라도 이익이 크다면 어찌 다소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큰 이익을 폐하겠습니까?"
하고, 광조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아 인물이 본래 적은데다가 또 서얼(庶孽)과 사천(私賤)을 분별하여, 쓰지 않습니다. 중원에서는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오직 골고루 쓰지 못함을 걱정하거늘 하물며 작은 우리 나라이겠습니까? 향리(鄕里)가 천거하는 일은 시대가 오래되어 다시 회복할 수 없겠지만, 만약 이와 같이 하면 대현인(大賢人)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용개는 아뢰기를,
"이 일은 조종의 법을 변혁하는 것은 아니니, 경사(京師)·팔도(八道)로 하여금 많이 천거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0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역사-고사(故事)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외교-명(明)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庚戌/御朝講。 參贊官李耔曰: "夫誤國小人, 非卒生於一朝, 先見人君之處事, 次見朝廷大臣, 而必以爲此人可以威刼, 可以利誘, 揣其輕重而生事。 漢之汲黯, 如政事間才能, 必有不及於其時大臣所爲, 而有不屈之志, 故准南王 安有反心, 不畏其時大臣, 而畏汲黯。 朝廷有不屈之臣, 則足以持國。 古人所謂可以托六尺之孤者, 此人也。 是故當貴其志節也。" 參贊官趙光祖曰: "汲黯則在朝之臣矣。 雖草茅賤士, 有志節, 則一時可以倚重。 東漢之末, 孔融在草野, 而曹操嚴憚之, 不敢擧事, 必殺之而後, 發不軌之謀。 況在朝廷之列乎, 況在大臣之位者乎?" 大司憲崔淑生曰: "太子朝夕不離於人主, 然後讒說無得而入焉。 晋太子申生, 遠在曲沃, 故小人在內, 煽動浮言, 獻公不明知其實, 故其讒訴易入; 秦 始皇、漢 武帝, 亦與太子阻隔, 故讒乘之而骨肉莫保。 此亦朝夕與處, 如文王爲世子, 而朝王季日三, 則父子之間, 情義無所間斷矣。" 正言崔山斗曰: "自古帝王, 其初豈有欲搖國本之心哉? 周幽王ㆍ惠王、晋 獻公, 得褒姒、惠后、驪姬而情意蠱惑, 父子之間自然隔絶, 猜嫌之心從此而長。 其間邪謟讒譖之徒, 何代無之? 將覬覦淺深, 內外交結, 以搖國本, 當國大臣, 又無不屈之節, 中立不救, 終使危亂其國。 如此處, 當省察也。" 光祖曰: "崔淑生之言, 極爲精切。 以我國之事言之, 元子、諸王子生, 則必養於閭閻。 今之世安有讒訴、覬覦之事乎? 然豈可保其必無乎? 父子之情, 恐或以此而衰薄。 夫讒譖之興, 必由於情義之不親。 可不愼歟? 且俗言: ‘養於祖父母家之兒, 於其父母, 情愛有異云’ 此必然之理也。 若有此事, 則家與國, 何異也? 須於朝夕撫愛, 益敦天倫。" 上曰: "今左右所言節義, 果有國之大事。 常時講明, 則庶幾有益也。 頃者刊印《三綱行實》而頒布, 不知講讀, 而體之於身乎, 抑無奈爲文具乎? 又有氣節之人, 亦崇奬褒用, 然後可改一時之好尙, 此則銓曹當知而處之。" 淑生啓尹琳事, 不允。 光祖曰: "夫侍從當愼擇。 三時經筵, 與人主講論道義, 不得已以學問充足德器成就者爲之, 不可以詞章之秀麗, 亦不可以門閥之華貴, 又草茅太微賤之人, 亦不可爲也。 已出身者, 皆居高位, 下無可繼之人。 臣意以爲, 今可取人以用之。" 領事申用漑曰: "不可以詞章取人也, 審矣。 然我國事大之際, 多用詞章, 詞華亦不可專廢也。 不特經學之人爲可用也, 雖才華之人, 亦可入於館中, 不害爲義理之學也。 大抵今也, 侍從臺諫多闕。 此由文臣喜爲守令之故也。 有親在京師, 而亦求外任者。 此則當一切勿聽也。" 光祖曰: "詞章不可不取, 但專以詞章爲尙, 則恐有浮薄之弊。 有詞章而又有德行, 則固爲美矣, 志向未定之人, 則不可必信其作善也。" 李耔曰: "朝廷有人物不足之嘆, 此可怪也。 一時人物, 臣未敢知也, 豈可謂之必無乎? 國家取人之路, 極爲狹隘, 故多數礙滯, 而責銓曹用人, 亦難矣。 無乃令大臣、侍從, 分明論薦, 得才行可用之人乎? 別試, 亦祖宗朝事也, 然一番如此爲之, 甚有益也。"淑生曰: "人物豈可謂必無乎? 但國家必以科擧取之, 然後可任於爲事之地。 外方遺逸之賢, 雖屢薦拔, 與科擧所取之人異用, 則恐其人以爲賤而不肯就焉。" 上曰: "薦擧之人, 以科擧出身例用之, 則銓曹必無乏人之嘆矣。" 光祖曰: "李耔所啓之言, 臣等每欲爲之。 外方則監司、守令, 京中則弘文館、六卿、臺諫, 咸薦才行可用之人, 聚于大庭而親策之, 則人物可以多得矣。 此祖宗所不爲之事, 此漢之賢良、方正科遺意也。 德行, 衆所薦也, 必不虛謬。 又於策, 見其施設之方, 則兩無虧欠矣。" 上曰: "此甚好事, 但恐薦擧之際, 有所遺失也。" 用漑曰: "雖令八道守令、監司薦擧, 不可以言語知人也。 臣嘗聞之, 以遺逸之士, 被薦而來者, 乃從前每來京師, 求爲訓導者也。 不可以此一人之事, 盡不信薦賢之事, 然知人之難, 以此亦可知也。" 光祖曰: "以曾求訓導之人, 冒參於薦列之故, 盡廢薦擧之事, 可乎? 此事頗近於古, 在所當爲。 奔競之風, 庶可息矣。 雖間有失薦之人, 大槪不失人才矣。" 上曰: "雖如此詳密爲之, 恐有遺者。" 淑生曰: "雖間有遺者, 所益大, 則豈可慮小遺, 而廢大益乎?" 光祖曰: "我國壤地褊小, 人物本少, 而又分庶孽、私賤而不用, 中原則不計貴賤, 而猶慮其不周。 況小邦乎? 鄕擧、里選之事, 遠不可復矣, 若如此, 則至於大賢之人, 亦庶幾可得矣。" 用漑曰: "此事非變祖宗之法也。 令京師八道多薦, 可也。"
- 【태백산사고본】 16책 32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0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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