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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30권, 중종 12년 11월 23일 을미 1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유용근 등이 혼인의 풍속·증고사의 일에 관해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講讀)하였다. 시독관 유용근(柳庸謹)이 임문(臨文)하여 아뢰기를,

"여기에 말하기를, 부부가 만남은 생민(生民)의 시초이고 만복(萬福)의 근원이라 하였습니다. 혼인의 예(禮)가 바르고서야 품물(品物)이 수성(遂成)하고 천명(天命)이 완전해집니다. 부부 사이는 지나치게 천근하기 쉬우므로 오륜(五倫)을 서술할 때에 별자(別字)로 칭하였는데, 문왕(文王)의 배필의 도(道)가 지극하니 이것을 체념(體念)하셔야 합니다."

하고, 대사간 이성동(李成童)이 아뢰기를,

"관저(關雎)919) 의 시는 만고에 제왕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역대의 임금으로서 방탕한 자가 다 여기에서 말미암고, 반목(反目)하는 자가 다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이것이 집을 다스리는 요체이기 때문이며, 예전부터 집이 다스려지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일이 없는 까닭은 인정(人情)이 더욱 쉽게 잃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혼인의 예가 바르고서야 품물이 수성하고 천명이 완전해지는데, 우리 나라는 혼인의 예를 바르게 행하지 않은 지 오래다. 접때 위에서 먼저 정례(正禮)를 행하매 사대부도 조금씩 행하여 가나,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폐단이 고쳐지지 않으면 보탬이 없을 것이다."

하매, 유용근이 아뢰기를,

"위에서 먼저 정례를 행하여 성전(盛典)을 예전대로 회복하였으므로 여염에서 즐겨 따라 행하는 자가 있고 애써 행하는 자도 있으나,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풍속은 버릇이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고쳐질 것입니다."

하였다. 대간이 또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근자에 대사헌·대사간·승지 같은 자리가 비면 외관(外官)을 주의(注擬)합니다. 감사(監司)는 1기(期) 안에 겨우 그 도의 일을 알고 죄다 알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더구나 반년 안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사람의 생각에도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 하여 혹 근면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뒷폐단이 있으니 상례(常例)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임(外任)으로서 들어와 대간에 제수되는 것은 자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접때는 마침 인물이 부족하므로 부득이 제수한 것이니, 이것이 뒤에 관례가 될 것은 없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자(李耔)가 아뢰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고생합니다. 일에 관계가 있다면 폐단을 헤아릴 수 없겠으나, 지금 증고사(證考使) 【태(胎)를 묻을 곳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가 내려갈 때에 종사관(從事官)도 많고 따라가는 상지관(相地官)920) 도 한둘씩 되는데 만약에 백성의 집이나 전지(田地)의 집 근처를 지목하면 이를 피하려고 백성이 다들 재산을 기울여서 뇌물을 쓸 것인데, 이것은 올해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니니 보내서는 안 됩니다. 대저 풍수(風水)의 설(說)이란 황당한 것이며, 또 가까운 곳에 어찌 가릴 만한 데가 없기에 반드시 먼곳에서 가려 백성에게 폐해를 끼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것이 지당하다. 증고사는 역시 옛관례를 그대로 좇아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과연 보탬이 없는 일이다. 또 하삼도(下三道)921) 에 왕래하는 것은 더욱 폐단이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가리는 것이 역시 옳으리라."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원자(元子)의 태봉(胎封)922) 은 가리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 때문에 그 폐단이 그대로 계속되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또 반드시 집도 없고 전지도 없는 곳에 터를 잡는다면 백성에게도 억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경기(京畿)에서 가릴 만한 곳이 없으면 하삼도에 지리관(地理官)을 보내어 감사와 함께 돌면서 가리게 하는 것도 경솔히 하는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하고, 장령(掌令) 권벌(權橃)이 아뢰기를,

"지난해 경산(慶山) 땅에 안태(安胎)할 때에 신이 차사원(差使員)으로서 친히 보았습니다. 안태하는 근처는 다 묵히게 하였으므로 그 곁에 집이나 전지를 가진 백성이 모두 울부짖었는데, 안태하고 나서는 다 백성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미리 한계를 정했더라면 백성도 미리 알아서 심하게 소동하지 않았을 것인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피차를 분간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먼저 소요하니, 이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풍수의 설은 본디 믿을 수 없는 것이라 안태하는 일 역시 관계될 것이 없는 일인데 백성만 소요하게 하니, 먼저 한계를 정하도록 하라."

하매, 유용근이 아뢰기를,

"화를 당하고 복을 받으며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데에는 반드시 하늘이 정한 바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다 보탬이 없는 일입니다. 원자라면 오히려 땅을 가려야 하겠으나, 번번이 그렇게 한다면 땅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고, 벌(橃)이 아뢰기를,

"화복(禍福)의 설이 무슨 관계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상시 사대부의 집에서는 아들을 낳거나 딸을 낳거나 태는 죄다 불에 태우니, 이것은 화복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예전 관례를 따라 예사로 하는 일인데 과연 보탬이 없으니, 유사(有司)에 물어서 다시 처치할 방법을 생각하도록 해야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30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6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풍속-풍속(風俗)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구휼(救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예속(禮俗)

  • [註 919]
    관저(關雎)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 [註 920]
    상지관(相地官) : 대궐·능(陵) 등의 터를 잡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
  • [註 921]
    하삼도(下三道) : 충청도·전라도·경상도.
  • [註 922]
    태봉(胎封) : 왕자·왕녀 등의 태를 묻는 일. 뒤에 나오는 ‘안태(安胎)’ ‘봉태(封胎)’도 같은 뜻. 다만 ‘태봉’은 ‘태를 묻는 곳’의 뜻으로도 쓰인다.

○乙未/御朝講, 講《大學衍義》。 侍讀官柳庸謹臨文曰: "此言: ‘配匹之際, 生民之始, 萬福之源也。’ 婚姻之禮正, 然後品物遂而天命全。 夫婦之間, 易於狎昵, 故其敍五倫也, 以別字稱。 文王配匹之道, 至矣。 此當體念。" 大司諫李成童曰: "《關雎》之詩, 萬古帝王所當取法者也。 歷代人君流蕩者, 皆由於此, 反目者皆由於此。 必言之如此者, 此齊家之要也。 自古未有家不齊而國治者, 人情尤易失故也。" 上曰: "婚姻之禮正, 然後品物遂而天命全。 我國婚姻之禮, 不以正行之, 久矣。 頃者自上先行正禮, 士大夫亦稍稍行之, 但男歸女家之弊不革, 則無益矣。" 庸謹曰: "自上先行正禮, 復古盛典, 故閭閻之間, 有樂從而行之者, 亦有勉强而行之者。 但男歸女家之風, 習俗已久, 難卒變也, 然自然當革矣。" 臺諫又以前事啓之, 皆不允。 領事鄭光弼曰: "近者如大司憲、大司諫、承旨有闕, 則以外官注擬。 監司一期之內, 僅知其道之事, 亦有未盡知者。 況半年之內, 又何知之? 其人之意, 亦必以爲不久, 而或有不勉者。 此有後弊, 不可以爲例也?" 上曰: "以外任入拜臺諫, 此不可屢爲之也。 曩日適乏人, 故不得已除之耳, 此不必爲後例也。" 參贊官李耔曰: "年年凶歉, 百姓困苦。 若事有關係, 則弊不可計也。 今證考使 【擇安胎地也。】 下去, 從事官亦多, 相地官從之者, 又(比)〔非〕 一二, 而如指民之家舍, 田地近處, 則民皆傾財而施賂。 此今年不必爲之事, 不可遣也。 大抵風水之說, 荒唐之事也。 且於近地, 豈無可擇者而必於遠方, 以貽民弊乎?" 上曰: "所言至當。 證考使, 亦不免因循古例也, 此果無益之事也。 且於下三道, 往來尤有弊, 於近地擇之, 亦可也。" 光弼曰: "如元子胎封, 不可不擇, 以此其弊因循, 已久矣。 且必於無家舍、無田地處占之, 則民亦無冤。 且於京畿, 無可擇之地, 然後遣地理官於下三道, 與監司同巡擇之, 亦非所以輕之也。" 掌令權橃曰: "去年於慶山地安胎時, 臣以差使員親見之, 安胎近處, 皆使陳荒, 故民之有家舍、田地于其傍者, 咸呼號哭泣, 及其旣安, 皆還于民。 若預定其界限, 則民亦預知而不甚騷動。 今則不然, 不分彼此, 故民先騷擾。 此甚不當。" 上曰: "風水之說, 固不可信, 其事亦不關係, 而使百姓騷動, 先定其界限, 可也。" 庸謹曰: "禍福壽夭, 必有天定, 此皆無益。 若於元子, 則猶可擇地, 若每如此, 則地亦不足矣。" 曰: "禍福之說, 有何所關? 常時士大夫之家, 其於生男、生女, 胎則盡焚之於火。 此非有係於禍福也。" 上曰: "此因循例事而爲之, 果無益也。 當問于有司, 思所以更處之, 可也。"


  • 【태백산사고본】 15책 30권 5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6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궁관(宮官) / 풍속-풍속(風俗)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구휼(救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