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방어책·신포의 폐단 등에 관한 함경북도 평사 유옥의 상소
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 유옥(柳沃)이 상소하였다.
"본도(本道)의 소관(所管)을 보건대, 부령(富寧) 이북은 고을이 여섯이고 경성(鏡城) 이남은 고을이 셋이며, 진보(鎭堡)를 아울러 40군데인데, 군졸은 액수를 채워도 겨우 8천 여이니, 8천의 군졸로 40군데를 나누어 맡자면 워낙 매우 단약(單弱)한데다가 또 결원(缺員)이 많습니다. 무릇 갑주(甲胄)·궁전(弓箭)붙이는 적에게 대응하고 제몸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맨손인 자가 반이나 됩니다. 그 중에서 기계(器械)797) 를 날카롭게 하고 기부(騎副)798) 를 갖추어 돌을 던져 공격해서 적의 방어를 뚫어 이길 정도로 용맹이 있는 자도 열에 둘도 안 됩니다. 저축에 있어서는 부족이 더욱 심하여, 신이 듣건대 길주(吉州)의 총액은 10만 2천 곡(斛)인데 지금 있는 것이 겨우 2만여 곡이고, 경성의 총액은 7만 1천여 곡인데 지금 있는 것은 역시 겨우 2만 곡이라 합니다. 이 두 고을로 다른 고을도 미루어 알 수 있는데, 한번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하면 모두 털어서 구휼(救恤)하더라도 댈 수 없을 것이니, 급한 사변을 알리는 일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군사는 나라를 지키는 방편이 되고 곡식은 군사를 기르는 방편이 되는 것인데, 다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군사가 극도로 지치고 곡식이 다한 까닭은 소민(小民)이 궁핍하여 그것이 나오는 데가 잔약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백성을 사랑하는 뜻은 늘 있되 백성을 해치는 일이 오히려 많아서, 해는 없애지 못하고 사랑은 미치지 못하니 이 때문에 백성이 날로 잔폐해갑니다. 그 근본을 잔폐하게 하고서 그 뒤의 것을 넉넉하게 하려고 바란들 어찌 되겠습니까? 백성을 등록하여 정(丁)으로 삼고, 일을 갈라 맡겨서 제색(諸色)으로 삼고, 한 사람을 가려서 호수(戶首)로 삼고서 사람을 내어 보인(保人)799) 을 주는 것은 힘을 합쳐 서로 돕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릇 군사가 된 사람을 관장하는 진읍(鎭邑)이 죄다 일을 부리고도 부족하여 또 그 보인을 아울러 일체 빼앗아가며, 무릇 일용(日用)과 영위(營爲)에 쓰는 물건의 장만을 모두 백성에게 요구합니다. 장정을 헤아려 물고기를 가져가는 것을 정어(丁魚)라 하고, 장정을 헤아려 닭을 가져가는 것을 정계(丁雞)라 하고, 장정을 헤아려 술을 가져가는 것을 정주(丁酒)라 하고, 장정을 헤아려 일꾼을 징발하는 것을 정역(丁役)이라 하는데, 조금이라도 어기면 그 부보처자를 가두고서 매질을 하여 다 갚은 뒤에야 그만둡니다. 음식을 풍성하게 하고 거처를 아름답게 하여 오직 목전(目前)의 유쾌함에만 힘써 남을 기쁘게 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비록 간혹 식자(識者)가 있어 폐하고 시행하지 않는 일이 혹 한 고을에서 시행되더라도 그 밖의 고을에서는 금지하지 못하며, 또한 전에 폐지하였다가 뒤에 다시 하기도 하므로, 구습을 좇는 것이 오래 쌓여서 상례라 생각하고 태연하여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수령(守令)이 가혹하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게 되는 것이기는 하나, 또한 열읍(列邑)의 관속(官屬)·노비(奴婢)가 적어서 바삐 부리는 일에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수사(內需司)와 각사(各司)의 공천(公賤)을 찾아서 그 다소를 헤아려 임시로 그 소재한 본읍(本邑)에 붙여 노비로 삼아서 그 역(役)에 이바지하도록 명하시고, 특별히 교유(敎諭)를 내리어 변장(邊將)을 신칙(申勅)하고, 군졸을 침탈하는 자가 있으면 매우 죄책을 가하여 뿌리를 끊어서 만연하지 못하게 하소서. 지금의 사기를 잃고 구제하지 않으면 폐해가 날로 심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신은 생각합니다.
병(兵)을 농(農)에 붙여 번갈아 번들고 쉬게 하여, 번이 되면 방수(防戍)하고 쉬게 되면 귀농(歸農)하게 하니, 이것이 국가의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인데 조방(助防)의 폐단이 근년에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얼음이 얼 때 육진(六鎭)의 방비가 가장 급하므로 경성(鏡城) 이남 세 고을의 군졸을 뽑아서 방수하게 하였다가 얼음이 풀리면 파(罷)하였는데, 임신년800) 부터는 더 번거로와져서 본번(本番) 외에 따로 1번을 만들어 조번(助番)이라 호칭하여, 10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육진의 진보(鎭堡)를 분수(分戍)하고, 2월부터 9월까지는 경성 이남의 진보를 분수하되 두달 걸려 한 달 동안 입번(立番)하고서 교체하기 때문에 매년 번드는 것이 넉 달이지만 다른 데로 옮아 번드는 것이 본번(本番)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떠나는 사람은 싸가지고 가고 집에 있는 사람은 장만해 보내느라 한탄이 길에 가득하며 왕래할 때에 고통이 온몸에 미치는데, 다행히 죽지 않으면 발이 겨우 제집 문에 미치자 본읍(本邑)의 징독(徵督)이 또 이르므로, 한해 가운데에서 하루도 집에서 편히 있으면서 살림을 꾸려갈 날이 없어 이래저래 남는 것이 없게 되니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육진의 방비는 워낙 매우 긴급하고 겨울에 조방(助防)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며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일이므로 지금 폐지할 수 없으나, 경성 이남의 진보로 말하면 노적(虜賊)의 소굴에서 자못 멀리 떨어졌을 뿐 아니라,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남으로 준령(峻嶺)·거천(巨川)이 사이에 무수히 겹쳐 있고 여름에는 장마 때문에 인마(人馬)가 다닐 수 없으므로, 척후(斥堠)를 밝게 하고 봉수(烽燧)를 신중히 하면 적이 오는 것을 반드시 알 것이며, 알고서 방비하면 넉넉히 대적할 수 있으니 형세가 육진과는 다릅니다. 임신년에 적변이 여러 번 일어났다고는 하나, 그 까닭을 따져 보면 다 변방을 맡은 자의 잘못 때문입니다. 당초에는 노인(虜人)이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저희끼리 서로 적이 되었는데 그 원수를 감싸 주었으므로 격분시켜서 말썽을 이르키게 하였고, 나중에는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무릇 척후·탐라(探邏) 등의 일을 모두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고서 연대(烟臺)를 내지(內地)에 옮기기까지 하여, 성 근처 밖은 다 노인이 엿보는 곳이 되었으므로 곧바로 와서 책(冊)을 부수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조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새 폐단을 일으켜 힘이 다해 가는 백성을 구박하여 그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아 더욱 안정을 잃게 하니 이것이 어찌 변방을 굳게 하는 좋은 방책이겠습니까? 빨리 정파(停罷)하소서. 그러면 세 고을의 백성이 조금은 짐을 덜 것입니다. 예전에 적국과 변방을 자주 대하고 있던 나라는 잠깐 사이에 성패(成敗)가 당장 드러나는데도 진중(鎭重)하기를 힘쓰고 망령되게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는데, 더구나 지금의 사세는 그때와 같지 않음에리까! 땅을 맞대고 있는 자는 특히 야인(野人)인데, 이미 성저(城底)에 사는 자는 부락을 이루어서 우리의 힘에 의존하고, 심처(深處)에 사는 자도 덕화(德化)를 따르고 환심을 보이니, 그 사이에서 도둑질을 하는 자는 의식(衣食)을 생각하는 데에 불과합니다. 기미(羇縻)801) 하여 대우하고 성의를 베풀어서 그 마음을 감복시키는 등 모든 무어(撫禦)하기 위한 만전의 방도를 매양 생각하여 안정(安靜)하게 해야 하며, 장황하게 만들고 어지럽게 동요시켜 적이 오기 전에 먼저 스스로 지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야인과 앞을 다투어 매매하는데, 우리에게 쓸모있는 것으로 저들에게서 쓸모없는 것을 바꾸어 오니, 이것이 육진의 심한 걱정거리이고 그 중에서도 초피(貂皮)가 심한 것이므로, 국가가 법을 마련해서 금지하고 방면을 맡은 자가 매양 살펴서 적발하나, 금지하기는 더욱 엄하게 하여도 범하기는 더욱 많이 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폐단을 없애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근원을 막아야 하며 그 근원을 열어 두고서 그 말류(末流)를 막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풍속이 사치를 좋아하여 기이한 물건을 다투어 귀하게 여기니, 이것이 폐단을 만드는 근원이요, 그 매매하는 것은 말류일 뿐입니다. 계급을 한정하여 당상관(堂上官)이 아니면 초피로 이엄(耳掩)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법이 서 있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지나친 사치가 풍습이 되어 하류의 천품(賤品)도 참람하게 착용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부가(富家)·거실(巨室)은 서로 자랑하느라고 의구(衣裘)·금석(衾席) 따위도 다 이것으로 만들며, 향려(鄕閭)의 작은 모임에도 초의(貂衣)가 없는 부녀(婦女)는 부끄러워 가려 하지 않는데, 이런 버릇을 만들어낸 까닭은 다른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바로 양계(兩界)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매양 진읍(鎭邑)에 제수되는 사람이 있으면 올 때에는 부탁이 모여들고 이미 부임하면 간독(簡牘)이 모여드는데, 한번이라도 얻지 못하게 되면 책망이 따릅니다. 그래서 진장(鎭將)이 된 자는 사사로 취할 뿐 아니라 징색(徵索)하기에 괴로우나, 마지못해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여 혹 염속(鹽粟)이나 우마(牛馬)·철물(鐵物)로 날마다 매매를 일삼되 뒤질까 염려하며, 서로 장사하도록 허가하여 그 세(稅)를 거두는 자까지 있습니다. 변방 백성의 힘을 다하여 국가가 금하는 물건을 날라다가 야인을 대어 주되 그칠 줄 모르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그 근원을 막기 위하여, 무릇 초피로 의구·금석을 만드는 자와 참람하게 이엄을 착용하는 자를 다스리는 과조를 엄하게 세우고, 사치를 금하는 것은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간소한 풍속이 조정에서 행해지게 하소서. 그러면 매매하는 자가 금하지 않아도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법금(法禁)으로 눌러서는 안 되고 전화(轉化)시키고 검약(儉約)시켜야 하니, 요는 전하께서 몸소 이끄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곡식을 저축하여 변방을 충실하게 하고 양창(兩倉)802) 에 나누어 저장하는 것은 군려(軍旅)를 위하고 기황(飢荒)에 대비하는 방법이며, 당초에 저장하는 방법이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수령에 마땅한 사람을 많이 얻지 못하므로 그것을 흙모래처럼 써서 국가의 백년을 위한 저장을 하루아침의 비용으로 하되 거의 꺼리지 않습니다.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일 때에 있어서는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게을리하여 어떤 일을 하는지를 모르므로, 하리가 문서를 농간하여 마음대로 속여서 피차에 뜻대로 하니, 호강(豪强)한 무리는 연줄을 부탁하여 한 사람이 받은 것이 50∼60곡(斛)토록 많은데 조금도 상환하지 않고, 빈약하여 고할 데가 없는 자는 먼저 침탈과 독책(督責)을 받아 피부를 깎고 골수를 긁어내어 힘이 지탱하지 못하여 도망하는 자가 잇답니다. 한 사람이 도망하면 이웃이나 일가에게 미치고 이웃이나 일가가 또 도망하면 그것은 다른 데로 옮기므로 드디어 한 마을이 다 비게 됩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자가 고향에 돌아오려 하더라도 그 침탈과 독책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합니다. 도망한 지 이미 오래므로 징수할 데가 없어도 그 성명은 장부에 남아 있으므로, 왕년에 민간에 흩어 주었다는 것이 멀면 18∼19년이고 가까우면 10여 년이 되므로 궤적(櫃籍)에 쌓인 것이 반은 헛된 문서입니다. 거둬들일 때에는 10분의 1을 율(率)로 한다는 법조(法條)가 있기는 하나, 거의 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합니다. 체대(遞代)할 때가 되어 창고가 이미 비어 있고 보충할 길을 없으면 해유(解由)803) 를 위한 꾀를 꾸미고 또 공연(公然)히 이민(吏民)과 유향 품관(留鄕品官)804) 들을 불러 향풍(鄕風)으로 책망하고 거짓으로 명목을 벌여 적어 받았다는 문기(文記)를 억지로 만들어, 천만 곡(斛)일지라도 붓 하나로 처리해 버리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후임자도 혹 정고(情故)에 끌리고 또 뒷날의 자기 처지를 위하여, 알더라도 드러내지 않고 거짓을 이어받고 그름을 이어받아 다시 은폐하고서, 헛된 문서를 가지고 그 수를 살피고는 사실인 양으로 하니, 만약에 뜻밖의 조도(調度)할 일이 있으면 어찌 국가의 일을 망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사(攸司)에 명하여 그 사실을 상세히 살펴서 호강하여 상환하지 않는 자를 적발해서 죄주게 하시고, 해묵은 포흠(逋欠)은 연한을 정하여 면제해서 도망했던 자로 하여금 돌아와 모일 수 있게 하소서. 지금 국가가 부족을 근심하는데 신이 포흠을 면제하자고 말하는 것도 오활한 듯하나, 예전에 유약(有若)이 ‘용도(用度)가 부족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한 노공(魯公)의 물음에 ‘왜 철법(徹法)805) 을 쓰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으니, 왕자(王者)의 부(富)는 백성을 충족하게 하는 데에 있고 축적하는 데에 있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이 헛된 문서는 두어도 무익(無益)하고 장차 교활한 구실아치가 속이는 도구가 될 것임에리까!
호포(戶布)라는 것은 가장 명색이 없는 것이며, 전국에 없는데 이 함경 남북도에만 있습니다. 당초에 신포(神布)라 하였는데, 대개 이 도의 풍속이 완우(頑愚)하여 귀신을 숭상하는데 무격(巫覡)이 승세(乘勢)하여 민중을 유혹해서 이(利)를 취하는 일이 많으므로 그에 따라 한 사람에게서 베[布] 한 필을 거두었으니, 역시 예전에 상인(商人)에게서 세를 거두던 뜻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간사한 자에 의하여 변경되어 점점 실지에서 빗나가 무격을 업으로 하지 않는 여느 백성도 다 호(戶)를 헤아려서 거두니 이를 호포라 하였습니다. 그 뒤에 국가에서는 열읍(列邑)이 거두는 것이 너무 광범하고 쓰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여 한 고을의 호를 모두 모아서 넷으로 나누어, 감사(監司)·병사(兵使)와 본읍(本邑)이 각각 한 몫을 취하고 나머지 한몫은 곡식을 사서 군자(軍資)에 보태게 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하였습니다. 대저 조폐(凋弊)하여 겨우 살아가는 백성이 꾸어다 먹은 관창(官倉)의 곡식도 갚지 못하여 유리(流離)하게 되는데, 이렇듯 가혹하게 거두면 어떻게 명을 감당하겠습니까? 이미 죄다 거두고 몹시 요구하여 사들이고 또 억지로 추장하되 한 번 하고서 다시 침탈하여 곤폐(困弊)하게 하니, 꼭 이렇게 해서야 채울 수 있다면 마치 남의 살을 깎아다가 자기를 살찌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왕자가 하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보탬이 되는 것은 얼마 없는데 감사·병사·열읍으로 돌아가는 것은 낭비와 증여의 밑거리가 됨에리까! 아, 한 가닥 실이라도 모두가 백성의 피인데, 어찌하여 인인(仁人)이 위에 있는데도 교묘히 명목을 만들어 이토록 침탈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까?
무릇 이 다섯 가지 일은 다 오늘날 변경에서의 급한 일이요, 그 근본은 또 수령을 신중히 가리는 데에 달려 있으니, 어진 수령을 얻어서 자목(字牧)을 맡겨 백성에게 이(利)를 주고 백성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게 하고 가혹하게 침탈하는 일이 없게 하면 자연히 집과 사람마다 급족하여, 군사는 훈련되고 저축은 충실해져서 적을 위복(威服)시키고 먼데 사람을 복종시키는 일은 베풀어서 안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염려하는 생각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고 백성을 돌보라는 분부를 아침 저녁으로 내리더라도, 헛되게 겉치레만 갖추는 것에 지나지 않아서 뜻만 있고 실지는 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유념하고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소서. 혹 행할 만한 일이라 생각되어서 행하여 조금이라도 공효(功效)를 얻게 된다면 변방의 다행이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30면
- 【분류】재정-상공(上供)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과학-천기(天氣) / 신분-천인(賤人)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통신(通信) / 군사-병참(兵站) / 외교-야(野)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797]기계(器械) : 병기.
- [註 798]
기부(騎副) : 기마(騎馬)와 부속물.- [註 799]
보인(保人) : 군사 및 환관(宦官)·역졸(驛卒)·수호군(守護軍) 등 국역(國役)에 종사하는 사람의 살림 또는 자장(資裝)을 돕게 하기 위하여 딸려 주는, 실역(實役)에 종사하지 않는 장정.- [註 800]
임신년 : 1512 중종 7년.- [註 801]
기미(羇縻) : 아주 끊어 버리지 않고 속박하여 두는 것.- [註 802]
양창(兩倉) : 여기서는 상평창(常平倉)과 군자창(軍資倉).- [註 803]
해유(解由) : 관물(官物) 관리에 관한 하자가 없어 책임을 해제한다는 뜻. 전곡(錢穀)과 그 밖의 물품을 출납하는 책임이 있는 관원이 교체될 때에는 후임자에게 관계문서를 작성하여 인계하며 이것을 호조(戶曹)에 신보(申報)하고, 호조는 이상이 없으면 이조(吏曹)에 통보한다. 여기에는 책임면제 증명서라 할 수 있는 해유첩(解由牒)이 쓰이는데, 이것이 없으면 실직(實職)에는 천보(遷補)되지 못한다.- [註 804]
유향 품관(留鄕品官) : 민치(民治)·풍헌(風憲)을 돕게 하기 위하여, 그 고을에 사는 유력한 자를 가려서 좌수(座首)·별감(別監) 등의 향직(鄕職)에 임명하는데, 이 사람들을 유향 품관이라 한다.- [註 805]
철법(徹法) : 주대(周代)에 행하던, 수확의 10분의 1을 관에 바치는 세법(稅法). 철은 ‘通’의 뜻. 철법이란 천하의 통법(通法)이라는 뜻.○咸鏡北道評事柳沃上疏曰:
伏覩本道所管, 富寧以北, 爲邑有六, 鏡城以南, 爲邑有三, 幷諸鎭堡, 有四十所, 而軍卒充額, 僅八千有奇, 以八千之卒, 分領四十所, 固甚單弱, 而又多空闕。 凡甲冑、弓箭之屬, 所以應敵, 至衛身者, 一無可恃, 徒手者居半, 其有利器械、具騎副, 投石拔距, 堪賈勇者, 十無二焉。 至於儲峙, 匱乏尤甚。 臣聞, 吉州摠十萬二千斛, 而今所存, 僅二萬餘; 鏡城摠七萬一千餘斛, 而今所存亦僅二萬。 擧此二邑, 他可類推, 一遇水旱爲災, 雖罄展救恤, 尙不克贍, 脫有警急, 其何能支? 夫兵所以衛邦國; 穀所以養兵, 而皆出乎民者也。 兵疲穀殫, 若是其極者, 由小民貧乏, 而所從出者殘也。 國家之愛民, 非不至也, 然愛民之意常存, 而害民之事尙多, 害未去而愛未及, 此民之所以日就殘困也。 殘其本而求裕其後, 豈可得乎? 籍民爲丁, 秩爲諸色, 擇一人首戶, 而差以給保, 使得同力相助。 今也, 凡爲軍士, 所管鎭邑, 悉加驅役, 顧猶不足, 又幷其保人, 一切奪之, 凡日用營爲供辦, 率皆取責。 計丁取魚, 謂之丁魚; 計丁取雞, 謂之丁雞; 計丁取酒, 謂之丁酒; 計丁調役, 謂之丁役。 少有違忤, 囚累其父母妻子, 繼以鞭扑, 畢醻而後止。 豐飮食, 美居止, 唯務稱快目前, 以悅人掠譽。 雖間有識者, 廢而不爲, 或施之一邑, 而不能禁其他, 亦有廢之於前, 而復之於後, 因循積久, 指以爲例, 恬不知怪。 惟緣守宰苛暴, 致有此弊, 亦由列邑官屬、奴婢尠少, 無以備趨走使喚故也。 伏願殿下, 命推內需司、各司公賤, 量其多少, 假屬所在本邑, 爲奴婢, 以供其役, 特降敎諭, 申勑邊將, 其有侵責軍卒者, 痛加罪責, 斷絶根株, 毋使滋蔓。 失今不救, 臣恐爲害日深, 將至於不可爲矣。 寓兵於農, 更迭番休, 番則防戍, 休則歸農, 此國家良法美意也, 助防之弊, 頃年爲極。 其始以合凍之時, 六鎭防備最急, 抄發鏡城以南三官之卒以戍之, 氷解而罷, 自壬申年, 始加煩擾於本番之外, 別作一番, 號稱爲助番, 從十月至明年正月, 分戍六鎭鎭堡, 從二月至九月, 分戍鏡城以南鎭堡, 使之間二朔, 立番一朔而遞, 每年直番者四朔, 推移輪轉, 與本番相埒。 行者齎, 居者送。 吁嗟! 滿途往還之際, 荼毒倂身, 幸而不死, 足纔及門, 本邑之徵督又至, 一歲之中, 無一日居家自便, 作爲生計, 展轉赤立, 所不忍見。 六鎭防備, 固甚緊急, 而助戍冬月, 其來已久, 事出於不得已, 今不可廢。 若鏡城以南鎭堡, 則不唯距虜穴頗遠, 由長白而南, 峻嶺、巨川, 間疊無數, 夏日霖潦, 人馬不得通, 明斥堠, 謹烽燧, 寇至必知, 知而爲之備, 足以相待, 其勢與六鎭差異。 壬申賊變, 雖曰屢作, 問其所自, 則皆由任邊者之過也。 其初也, 有虜人爲父復讎, 自相仇敵, 而容護其讎, 激而釁之; 其終也, 又畏被擄, 凡斥堠、探邏等事, 一廢不擧, 至移烟臺於內地, 環城之外, 皆爲虜人潛伺窺覘之所, 直來破柵, 而猶不得知。 不悟措置失宜, 所以致此, 而更作新弊, 驅就盡之民, 奪其農時, 轉益失所, 豈固邊長策乎? 請速停罷, 庶三邑之民, 少得息肩。 古之與敵國對邊者, 呼吸之間, 成敗立見, 猶務鎭重, 不妄擾民, 況今之事勢, 與此不同。 所與接壤者, 特野人, 已居城底者, 廬落成蔭, 仰我鼻息, 而在深處者, 亦多懷化輸款, 其間爲偸竊, 不過以衣食爲志耳。 羈縻以待之, 推誠而服其心, 凡所以撫禦之道, 動思萬全, 以就寧靜, 不宜作爲張皇, 紛紜擾之, 賊未至, 而先自取困也。
與野人爭相貿買, 以我有用, 易彼無用, 此六鎭深患, 而貂皮爲甚。 國家設法禁之, 任方面者, 每加糾摘, 禁之愈嚴, 而犯之愈多, 其故何哉? 臣聞, 欲去弊者, 先塞其源, 導其源而能遏其流者, 未之有也。 俗尙侈靡, 競貴異物, 此所由致弊之源, 而其爲貿買, 特其流耳。 定爲限級, 非堂上官, 不得以貂皮爲耳掩, 法非不立也, 而近來奢泰成習, 下流賤品, 莫不僭着。 富家巨室, 迭相矜衒, 如衣裘、衾席之屬, 亦皆以此爲之, 鄕閭小會, 婦女無貂衣者, 恥不肯赴焉。 其所從出, 則不由乎他, 特在乎兩界而已。 由是, 每有一人, 除拜鎭邑, 其來也, 囑托坌集; 及其旣赴也, 簡牘塡委, 一有不及, 嫌責隨至。 爲鎭將者, 非但取以自私, 困於徵索, 有不能自已, 侵漁百端, 或以鹽粟, 或以牛馬、鐵物, 日事貿買, 唯恐或後, 至有許令互市, 而陰收其稅者。 竭邊民之力, 輸國家禁物, 以資野人, 無有窮已, 豈不痛哉? 伏願殿下, 先杜其源, 凡以貂皮, 爲衣裘、衾席及僭着耳掩者, 嚴立科條, 奢靡之禁, 始于宮壼; 簡素之風, 行于朝廷, 則其爲貿買者, 將不禁而自止矣。 然此未可以法禁制之, 轉而化之, 儉而約之, 要在殿下以身率之耳。 積粟實邊, 分儲兩倉, 所以爲軍旅、備飢荒也。 當初所以儲之, 非不厚也, 而爲守宰者, 多不得其人, 用之若泥沙, 將國家百年之儲, 取以供一朝之費, 略無顧忌。 至於分斂之時, 委諸下吏, 慢不知爲何事, 吏弄刀筆, 恣爲欺詐, 彼此任意, 豪武之徒, 因緣憑托, 一人所受, 多至五六十斛, 而一不輸償, 貧弱無告者, 先被侵督, 剝膚搥髓, 力不能支, 散亡者相繼。 一人之亡, 緣及比隣、族黨, 比隣、族黨又亡, 則以此而之他, 遂至一里皆空。 其幸而免於塡壑者, 雖欲還故里, 畏其侵督而不敢。 散亡已久, 徵之無依, 其姓名簿紀猶存, 稱爲往年散在民間者, 遠至十八九年, 近或十餘年, 積樻盈籍, 半爲空文。 其斂也, 以十分爲率, 雖有法條, 率皆以無爲有。 及其遞代也, 倉庾已虛, 無以充之, 則規爲解由之計, 又公然號召吏民若留鄕品官輩, 責以鄕風, 僞列名目, 勒成受記, 雖千萬斛, 一筆而旣者, 比比有之。 爲代者或牽於情故, 又爲他日自己之地, 雖知而不擧, 承僞襲尤, 更爲蒙蔽, 持空文, 按其數, 以爲實, 然若有調度出於不虞, 豈不敗國家事耶? 伏願殿下, 特命攸司, 詳覈其實, 摘其豪武不償者, 罪之, 其歲久逋欠, 限年蠲除, 使流亡者, 庶獲還集。 今國家方憂匱乏, 而臣以蠲逋負爲言, 似爲疎迂, 昔有若以 "盍徹?", 對魯公 "用不足" 之問, 王者之富, 在於足民, 不在積聚也。 況此空文, 留之無益, 祇爲猾吏欺蔽之具乎! 戶布一事, 最爲無名, 擧國所無, 而獨此南北道爲然。 其初謂之神布, 蓋以此道之俗, 頑愚尙鬼, 巫覡乘之, 惑衆牟利者多, 故從而征之, 人收一布, 亦古征商之遺意也。 中爲奸細所變更, 浸轉失實, 雖齊民之不爲業巫者, 亦皆計戶而取, 謂之戶布。 厥後國家以列邑取之太廣, 用之太濫, 盡括一邑之戶, 分而爲四, 監司、兵使洎本邑, 各取其一, 餘一分則令貿穀, 以補軍資, 歲以爲常。 夫以凋瘵僅存之民, 其所食官倉穀粟, 猶不能償, 而至於流離, 若此橫斂, 何以堪命? 其取之旣盡, 刻責貿之, 又加勒促, 一擧而再行侵困, 正使因此, 可實倉庾, 比猶剝肉以肥己, 王者所不爲, 況其所補者無幾, 而其歸於監司、兵使、列邑者, 盡爲費破施與之資乎? 嗟夫! 一絲一縷, 皆民血, 焉有仁人在上, 而巧作色目, 漁奪至此乎? 凡此五者, 皆今日邊境之所急也, 而其本又在於愼擇守宰, 苟得賢守宰, 任其字牧, 興民之利、除民之害, 毋爲苛暴侵尅之事, 則自然家給人足, 以兵則鍊, 以儲則實, 威敵懷遠, 無施而不可。 若其不然, 雖憂民之念, 每軫宵旰; 恤民之敎, 朝頒夕下, 未免虛具文爲, 徒有其意而無其實耳。 伏願殿下, 特留聖念, 議諸大臣。 倘以爲可擧而行之, 以收一得之效, 邊鄙幸甚。
-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30면
- 【분류】재정-상공(上供)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과학-천기(天氣) / 신분-천인(賤人) / 군사-부방(赴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통신(通信) / 군사-병참(兵站) / 외교-야(野) / 의생활-장신구(裝身具)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