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서 백성을 위하는 도리와 인재 등용·묘현에 관해 이야기하다
조강(朝講)533) 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임금은 근심과 즐거움을 혼자 해서는 안 되고
사신은 논한다. 즐거움은 혼자 해서 안 되겠으나 근심이야 혼자 해서 안 되겠는가.
백성과 같이해야 합니다. 걸(桀)·주(紂)는 경궁(瓊宮)·요대(瑤臺)의 즐거움을 극진하게 하였다 하겠는데 백성이 원망하였으므로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고, 문왕(文王)은 내 몸이 다친 듯이 근심을 지극히 하였다 하겠는데 백성이 기뻐하였으므로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이 이 때문에 흥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임금이 체념(體念)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장령(掌令) 소세양(蘇世讓)이 아뢰기를,
"천변(天變)이 일어나는 것은 매양 민심이 화락(和樂)을 잃는 데서 말미암는데, 민심이 화락을 잃는 것은 위에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근자에 폐조(廢朝)534) 를 겪어 민심이 불평하였거니와, 이제까지도 참다운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니, 백성의 괴로움을 생각하여 자애(慈愛)하면 저절로 민심이 화락해져서 천변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언호(李彦浩)가 아뢰기를,
"임금이 위를 덜고 아래를 보태는 마음을 가지면 백성이 기한(飢寒)에 시달리더라도 위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백성에 대하여, 흉년에만 이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풍년에도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고, 헌납(獻納) 민수원(閔壽元)이 아뢰기를,
"백성의 원망은 반드시 말에 나타나야 원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래 신하들이 봉행(奉行)에 마음을 다하지 아니하여, 수령(守令)이 된 자가 혹 제 처자를 뒷바라지 하느라고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으니 참다운 혜택이 어떻게 백성에게 미치겠습니까? 하고많은 고을에 죄다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보낼 수는 없겠으나 매우 삼가서 보내야 합니다. 또, 한 방면을 맡은 자에게는 위임해서 성적을 책임지워야 합니다."
하고, 이언호가 아뢰기를,
"풍년일지라도 모든 백성이 다 배부를 수 없거니와, 곡식이 조금 잘 된 해라면 공채(公債)·부역(賦役) 따위 일이 있으므로 백성의 먹는 것이 도리어 흉년만도 못하고, 나라에서 우환에 대비하는 것도 흉년만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가난한 백성은 차라리 흉년에 편안하고 곡식이 조금 잘된 해에는 안락하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보면, 풍년일지라도 백성을 돌보는 생각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임금과 백성이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해야 한다는 말이 마땅하다. 천하의 즐거움을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고, 천하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데, 나에게 과연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진실이 없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이처럼 자책(自責)하기를 꺼리지 않으나 아래에서는 또한 자목(字牧)의 일에 성심이 없으므로 백성의 곤궁이 지금까지도 처음 【처음이란 반정(反正)한 당초를 가리킨다.】 과 같았다.
과연 아뢴 바와 같이 수령은 죄다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할지라도 감사(監司)를 가려서 마땅한 사람을 얻어 보내면 어리석은 관리도 절로 외람된 짓을 못하게 될 것인데, 지금은 인물이 모자라고 내직(內職)535) ·외직(外職)536) 의 경중이 다르기 때문에 수령을 가려서 보내지 못하나, 수령은 가려서 맡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매,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수령은 다 가려서 맡겨야 합니다. 감사 자리에는 마땅한 사람을 얻고, 위에서는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감사가 어찌 위의 뜻을 체념하지 않겠습니까? 경기 백성이 먼저 혜택을 입어야 마땅한데도 더욱 곤폐(困弊)한데, 신은 아마도 요역(徭役)이 더욱 번다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에게 어찌 원근(遠近)의 다름이 있겠는가? 혜택은 고루 입어야 한다. 다만 경기가 고통받는 것은 예장(禮葬)과 같은 일들에 있어서 그 폐해를 다 경기의 백성만이 받기 때문이다."
하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상께서 ‘내직이 중하고 외직이 경하다.’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에 인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관직이 많지도 않으나 인재도 적으니, 대간(臺諫)537) ·시종(侍從)538) ·사명(使命)539) 으로 삼을 사람은 가려서 맡기지 않을 수 없고 보면 수령을 가리고자 하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도 큰 고을 수령의 말을 들어서 포폄(褒貶)540) 하므로 작은 고을 수령도 큰 고을 수령을 두려워하거니와, 예전에 성종조(成宗朝)에 있어서는 이미 승지(承旨)·참의(參議)를 지낸 사람일지라도 한가한 자리에 있으면 다 수령으로 보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하면 백성이 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고, 이청이 아뢰기를,
"인재를 잘 등용한다면 어찌 인재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근래 사로(仕路)가 넓지 않아서 흔히 문음(門蔭)541) 에서 나오니, 시골에서는 몇 사람이나 선거(選擧)에 참여되겠습니까? 유일(遺逸)542) 이 진선 진미(盡善盡美)할 수는 없겠으나, 널리 구하여 써야 인재가 내 소용이 될 수 있습니다.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기 백성의 곤폐는 예외(禮外)의 상장(喪葬) 따위 일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내직이 중하고 외직이 경하다는 것은 나도 생각하나, 큰 고을 뿐 아니라 작은 고을이 더욱 잔폐(殘弊)하니, 나는 작은 고을에 대하여 더욱 사람을 가려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매, 특진관(特進官) 이사균(李思鈞)이 아뢰기를,
"이청(李淸)이 아뢴 것이 옳습니다. 또 근일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를 선거하는 법이 있으니, 이 일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땅한 사람이 있어도 선거하지 않으면 보탬이 없으며, 선거하더라도 벼슬을 맡기지 않으면 수신(修身)·제가(齊家)의 공효(功效)를 볼 수 없습니다. 또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는 살아가기가 어려운데, 근자에는 경서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를 찾아서 차서에 의하지 않고 서용(敍用)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박훈(朴薰) 등을 가리킨다.】 과거 출신(科擧出身)이 아닌 자도 근시(近侍) 【승지(承旨)·대간(臺諫)을 가리킨다.】 가 될 수 있으니, 근시의 자리에 두어야 회포(懷抱)를 설시(設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거하여 서용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군현(郡縣)의 자목(字牧)의 책임을 맡길 자로는 외방(外方)의 구생원(舊生員) 중에서 널리 찾아서 서용하면 되며, 《대전(大典)》543) 에도 여러 번 과거보아 급제하지 못한 자를 서용하는 법이 있으니, 이 법도 시행해야 합니다. 또 외직을 중히 하고 내직을 경하게 하면 더욱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를 얻지 못하고도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는 없으니 천발(薦拔)된 사람이라면 특별히 서용해야 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히면 내직·외직에 다 인재를 얻게 될 것이다."
하매, 이청(李淸)이 아뢰기를,
"여러 번 과거 보아 급제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어찌 죄다 어질겠으며, 과거에 급제한 자일지라도 어찌 죄다 어질겠습니까? 현능(賢能)하되 과거하지 못한 자도 있으니,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그 재주에 따라 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간이 전의 일을 반복하여 논계(論啓)하였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김세필(金世弼)은 명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에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예전에는 부역(賦役)하지 않던 백성 【이것은 세가(勢家)의 노자(奴子)를 가리킨다.】 을 김세필이 다 사역하니 이 때문에 혹 원망하여 욕하는 자가 있는데, 대간의 공론(公論)도 반드시 들은 바가 많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고, 소세양(蘇世讓)이 아뢰기를,
"수령(守令)이 호족(豪族)을 억제하는 것은 바로 선정(善政)이니, 호족 중에 원망하는 자가 있더라도 기뻐하는 자가 많으면 민원(民怨)이라 할 수 없습니다. 대간의 논집(論執)도, 탐오(貪汚)한 짓을 해서 백성에게 폐해를 끼쳤다는 것이 아니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호족의 말을 들어서 아뢰었겠습니까?"
하고, 이청이 아뢰기를,
"신 등(臣等)이 아뢴 묘현(廟見)544) 에 관한 일은, 부득이 거행해야 하므로 날마다 말로 아뢰고 혹 써서 아뢰기도 하는데, 다만 고례(古禮)를 거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노영손(盧永孫)의 일은, 대간이 해를 걸쳐서 논하고 시종(侍從)도 이미 극진히 아뢰었습니다. 상산 도정(常山都正)의 일은, 그때의 옥사(獄事)가 다 바른 데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가선(嘉善)의 자급(資級)을 삭탈하기는 하였으나 도정(都正)도 될 수 없습니다. 근래 국가의 실정(失政)이 많은데 대간이 여러 번 아뢰어도 윤허받지 못하는 것도 많으니, 신(臣)이 시종의 반열(班列)에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전교(傳敎)에 ‘경연(經筵)을 매우 늦게 파하므로 상하가 다 끼니때를 잃는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경연에 오래 계시어 대간이 아뢰는 것도 많기 때문인데,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이처럼 쾌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의 경연이 전과 같지 아니하여 대신(大臣)과 함께 강론하는 것은 매우 좋다. 다만 조강(朝講) 때는 상하가 다 식사 전이니, 주강(晝講)·석강(夕講) 때와 같지 않다. 그러나 회포를 펴자면 어찌 때의 이르고 늦은 것을 헤아리겠는가?"
하였다. 이언호·소세양 및 헌납(獻納) 민수원(閔壽元)도 묘현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좌우가 나가니 그때는 이미 사말(巳末)545) 인데, 상이 이어서 윤대(輪對)546) 를 들었다.
사신은 논한다. 윤대의 말 가운데에 변방(邊方)을 안정하는 계책과 백성을 구제하는 방략이 있어 그것을 시행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겠으나, 윤대의 본의가 어찌 이러한 것이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30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금융-식리(殖利) / 재정-역(役) / 역사-사학(史學)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신분-양반(兩班)
- [註 533]조강(朝講) : 아침에 여는 경연(經筵). 경연은 임금이 학덕(學德) 있는 신하를 궁중에 불러 경사(經史) 등을 강독(講讀)하고 논사(論思)하는 자리인데, 여는 시각에 따라 조강, 주강(晝講)·석강이 있었다. 이 밖에 임시로 행하는 것을 소대(召對)라 하며, 폐문(閉門) 시각 이후에 행하는 소대를 야대(夜對)라 한다. 경연관(經筵官)으로는 영사(領事) 3원(員), 지사(知事) 3원, 동지사(同知事) 3원, 참찬관(參贊官) 7원, 시강관(侍講官)·시독관(侍讀官)·검토관(檢討官)·사경(司經)·설경(說經)·전경(典經)이 있는데, 모두 타관(他官)의 겸직(兼職)이며, 영사는 의정(議政)이, 참찬관은 승지(承旨)와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시강관 이하는 홍문관의 관원이 으레 겸직한다. 이 밖에 경연에 입시(入侍)하는 관원으로는 특진관(特進官) 및 한림(翰林)·주서(注書)·대간(臺諫) 등이 있다.
- [註 534]
폐조(廢朝) : 연산군 때를 가리킨다.- [註 535]
내직(內職) : 중앙 관직.- [註 536]
외직(外職) : 지방 관직.- [註 537]
대간(臺諫) :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곧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과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사간(司諫)·헌납(獻納)·정언(正言)의 통칭(通稱).- [註 538]
시종(侍從) : 항시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 곧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관원 및 대간(臺諫)을 통칭하는 것인데, 쓰이는 데에 따라 뜻의 광협(廣狹)이 다르다. 여기서는 대간을 제외한 경연 시종신(經筵侍從臣)의 뜻으로 쓰였다.- [註 539]
사명(使命) : 왕명을 받들어 외방(外方)에 나가는 신하, 곧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 등의 통칭.- [註 540]
포폄(褒貶) : 벼슬아치의 근무성적을 고사하여 등급을 매겨서 아뢰는 것, 또 그에 따라 벼슬아치를 승출(陞黜)하는 것. 여기서는 전자만을 뜻한다. 경관(京官)은 그 관사(官司)의 당상관(堂上官) 또는 제조(提調)와 속조(屬曹)의 당상관이, 외관(外官)은 관찰사가 매년 6월과 12월에 상·중·하로 등급을 매겨서 임금에게 아뢴다.- [註 541]
문음(門蔭) : 과시(科試)에 합격하지 않고,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에 의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 [註 542]
유일(遺逸) : 학행(學行)은 있으나 등용되지 않은 사람.- [註 543]
《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 [註 544]
묘현(廟見) : 사당에 참배(參拜)하는 것.- [註 545]
사말(巳末) : 하루를 12시(時)로 하는 제도에 있어서의 한 시각. 각시는 지금의 2시간인데, 그 한가운데의 시각을 정(正)이라 하고 정과 정의 한가운데가 되는 시각을 말(末)이라 한다. 즉 지금의 밤 12시 30분을 자정(子正)이라 하고, 그 뒤 1시간 간격으로 자말(子末)·축정(丑正)·축말(丑末)……등으로 부른다. 사말은 지금의 낮 11시 30분.- [註 546]
윤대(輪對) : 동반(東班) 6품 이상, 서반(西班) 4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아문(衙門)의 차례에 의하여 매일 윤번으로 들어가서 임금을 면대(面對)하는 것.○甲辰朔/御朝講。 侍講官李淸曰: "人君憂樂, 不可獨也,
【史臣曰: "樂則不可獨, 憂不可獨歟?"】
當與民同之。 桀、紂 瓊宮、瑤臺之樂, 可謂極矣, 而下民嗷嗷, 以至於亡; 文王如傷之憂, 可謂至矣, 而下民欣欣, 周業以興。 如此者, 人君所當體念也。" 掌令蘇世讓曰: "天變之作, 每由於民心之失和。 民心之失和, 上之所使然也。 近經廢朝, 民心嗷嗷, 至今實惠, 未及於民。 念民之艱苦, 而慈愛之, 則自然民心和樂, 而天變可弭也。" 參贊李彦浩曰: "人君若有損上益下之心, 則百姓雖困於飢寒, 亦無怨上之心矣。 人主之於民, 非但於凶年有是心也, 雖樂歲, 亦有此念, 可也。" 獻納閔壽元曰: "民怨, 非必發於言, 然後爲怨也。 近來人臣, 不盡心於奉行。 爲守令者, 或以妻子之奉, 而不顧民事, 實惠安得及民乎? 許多郡縣, 雖不能盡得其人, 亦當愼嚴也。 且爲方面之任者, 是可委任責成也。" 彦浩曰: "雖樂歲, 萬民不得皆飽也。 歲若小稔, 則有公債、賦役等事, 民食反不如凶年, 而國之備虞, 亦不至如凶年。 是故, 貧民寧安於凶年, 而不樂於小稔之歲矣。 以此觀之, 雖豐年, 不當弛恤民之念也。" 上曰: "人君, 與民同憂樂之言, 當矣。 以天下之樂, 爲己之樂, 以天下之憂, 爲己之憂, 可也, 而予則果無誠心愛民之實也。
【史臣曰: "其不憚自責如此, 下亦無誠心字牧之事, 民之困窮, 至今如初。 【初指反正之初。】 "】
果如所啓, 守令雖不盡得其人, 若擇監司而得人, 則庸吏自不得爲猥濫之事矣。 今人物乏少, 以內外輕重, 不得擇差守令矣。 然守令, 不可不擇任也。" 淸曰: "守令, 皆可擇任。 監司若得其人, 而自上有誠心愛民之念, 則監司其不體上意乎? 畿甸之民, 當先被實惠, 而尤困弊, 臣恐徭役尤煩以致之也。" 上曰: "百姓何有遠近之不同乎? 惠澤當均被也。 但畿甸之所苦如禮葬等事, 皆畿民獨受其弊也。" 領事鄭光弼曰: "上敎云: ‘內重外輕。’ 我國人物, 有幾許也? 官職不至多, 而人才亦少, 臺諫、侍從、使命之人, 不可不擇任, 則雖欲擇守令, 亦不得矣。 監司亦聞大邑守令之言, 而褒貶, 故小邑守令, 亦畏大邑。 昔在成宗朝, 雖已經承旨、參議之人, 若在閑地, 則皆差遣守令。 今亦如是, 則百姓庶被實惠矣。" 淸曰: "人才若能用之, 則豈爲無乎? 近來仕路不廣, 多出於門蔭, 鄕村幾人, 與於斯選乎? 遺逸之士, 雖不能盡善盡美, 旁求而用之然後, 人才可爲吾用矣, 願勿以爲無人才也。" 上曰: "畿甸百姓之困弊, 以有禮外喪葬等事故也。 且內重外輕之事, 予亦計之也。 非徒大邑, 小邑尤殘弊。 予意小邑尤當擇人也。" 特進官李思鈞曰: 李淸所啓是矣。 且近日有擧明經、行修之法, 此事至美也。 但有其人, 而不擧則無益, 雖擧之, 不任之以爵, 則無以見修身、齊家之效也。 且經明、行修者, 其生也固難矣。 近者求經明、行修者, 不次用之矣, 【如趙光祖、金湜、朴薰等也。】 然非科擧出身者, 亦可爲近侍焉。 【承旨、臺諫。】 置之於近侍之地然後, 可見懷抱設施之事也。 不然, 雖擧而用之, 何益? 若任郡縣字牧之責者, 則廣求外方舊生員, 用之斯可。 《大典》亦有用累擧不中之法, 此法亦可施行也。 且外重內輕, 則尤有弊也。" 上曰: "不得人才而望治, 不可能也。 如被薦拔之人, 則當特用也。 若廣用人之路, 則內外皆得人也。" 淸曰: "雖累擧不中者, 豈盡賢哉; 雖中科目者, 亦豈盡賢哉? 亦有賢能, 而不爲科擧者, 用人須以其才可也。" 臺諫將前事, 反覆論啓, 皆不允。 鄭光弼曰: "金世弼, 有名望人也。 嘗爲廣州, 前古不賦役之民, 【此勢家奴子也。】 世弼皆使之。 以此, 或有怨詈者, 臺諫公論, 亦必多有所聞也。" 世讓曰: "守令之制豪族, 乃是善政也。 豪族雖有怨之者, 而悅之者多, 不可以此爲民怨也。 臺諫論執, 亦非謂以貪汚之行, 而貽弊於民也, 以不能爲治也。 何以聞豪族之言, 而啓乎?" 淸曰: "臣等所啓廟見事, 不得已可行, 故日日以言啓之, 或以書陳之, 只欲行古禮也。 盧永孫事, 臺諫論以經年, 侍從亦已盡啓。 常山都正事, 其時獄事, 皆未出於正, 雖奪嘉善, 而都正亦不可爲也。 近來國家失政多, 而臺諫累啓, 不得蒙允者亦多。 臣在侍從之列, 不敢不言。 昨日傳敎曰: ‘罷經筵甚晩, 上下皆失食時。’ 此, 專由久御經筵, 而臺諫所啓且多故也。 從諫, 不可如是不快也。" 上曰: "近日經筵, 非若前時, 與大臣講論, 則至好矣。 但朝講則上下皆不食, 非若晝夕講也。 然若展布懷抱, 則何計其日之早晩?" 彦浩、世讓及獻納閔壽元, 亦以廟見事啓之, 上不答。 左右出, 時已巳末, 上仍聽輪對。
【史臣曰: "輪對之言, 雖有安邊之策、濟民之略, 其行之也幸矣, 輪對之本意, 豈如是乎?"】
- 【태백산사고본】 15책 29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30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금융-식리(殖利) / 재정-역(役) / 역사-사학(史學)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신분-양반(兩班)
- [註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