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 나아가다. 시독관 김구 등이 내수사의 혁파, 겸병 금지 등을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김구(金絿)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는 그 유래가 오랜 것으로서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데, 구차한 일이 많이 이로 말미암아 나옵니다. 만일 지치(至治)를 구하려면 곧 혁파하여야 합니다."
하고, 사경(司經) 정응(鄭譍)은 아뢰기를,
"내수사는 비록 선왕조(先王朝) 때에 창립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폐단이 더욱 심하니, 모름지기 이를 혁파한 연후에야 민심이 화복하고 태평해질 것입니다. 그 근본은 바루지 않고 끝만을 다스리려 하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을 자손이 만약 혁파하지 않으면, 이는 선왕의 실덕(失德)을 무겁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이모(貽謨)527) 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잘 다스리려 한다면 먼저 이를 혁파하여야 합니다."
하고, 영사 신용개는 아뢰기를,
"내수사는 선왕조에서 설치하여 오래되었으므로 곧바로 혁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폐단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전후 논하는 자가 많은데도, 선왕조의 구사(久事)이므로 혁파할 수 없다 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두는 것은 실로 옳지 않습니다. 대저 선왕의 선도(善道)는 으레 준수하여 잃지 말아야 하고 조금도 동요시켜서는 안 되나 이같은 일은 부득이 없애야 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겸병(兼幷)528) 이 정치를 해치는 것이 심한데도, 지금 겸병하는 자가 많습니다. 대저 한전(限田)529) 은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전조(前朝)에서 시행하려 하였으나 논의가 한결같지 않아서 끝내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도 시행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시행한다면 거의 옳을 것입니다."
하고, 김구는 아뢰기를,
"만일 다스림을 이루려면 한전을 불가불 해야 합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행(李荇)은 아뢰기를,
"한전은 용이하게 할 수 없으니 먼저 겸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김구는 아뢰기를,
"한전한 연후에야 겸병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겸병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땅히 종용히 상의하여 점차로 하여야 합니다."
하고, 정응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의 고제(古制)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은 속론(俗論)에 구애되어 능히 결단하지 못했던 때문입니다. 정전(井田)은 비록 할 수 없으나 백성의 명전(名田)을 제한하는 것은 으레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아뢰기를,
"지난번 봉천상(奉天祥)이 상소(上疏)하자 명하여 서용(敍用)하였는데, 대저 말을 진달한 사람을 위에서 채택하여 곧 관작(官爵)에 서용하면 다른 이를 권장시킬 수 있으니 이는 진실로 좋은 일입니다. 단지 신의 뜻은 상소만 가지고 서용하는 것은 불가하고 그 인물을 보고서 써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고, 정응은 아뢰기를,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후세에 과거(科擧)를 설치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과목(科目)은 비록 없앨 수 없으나 과목 외에 따로 효렴과(孝廉科)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이 가합니다. 송(宋)나라는 10과로 선비를 뽑았는데 지금은 그와 같이 할 수 없으니 문장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덕행이 넉넉한 사람은 별도로 나올 수 있는 길이 있게 하면 쓸 만한 사람을 많이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장령(掌令) 정순붕(鄭順朋)은 아뢰기를,
"듣건대, 방외(方外)에 유일(遺逸)530) 의 선비가 많다 하는데, 곧 과제(科第)를 취택하여 스스로 파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나오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따로 과제(科制)를 세울 수는 없지만 중외(中外)로 하여금 많이 천거하게 하여 쓰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김구는 아뢰기를,
"식년(式年)의 정액(定額)이 비록 많은 것 같으나, 혹 수령(守令)과 교수(敎授)가 될 자는 있으되 요직에 쓸 만한 사람은 참으로 적으니, 모름지기 천거하는 길을 넓혀서 사람 쓰는 방법을 다 해야 합니다. 과거는 없을 수 없으니 따로 기용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정순붕은 아뢰기를,
"효제(孝悌)하고 방정(方正)한 사람은 과목(科目)을 숭상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과목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두 가지로 취하는 길을 두어 천거하기도 하고 설과(設科)하기도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정순붕이 정언(正言) 허위(許渭)와 전의 일을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0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재정-상공(上供) / 농업-전제(田制)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註 527]이모(貽謨) : 선조가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계책.
- [註 528]
○癸卯/御朝講。 侍讀官金絿曰: "內需司, 其來久矣, 及今猶在, 苟且之事, 多由是出。 如求至治, 宜卽罷之。" 司經鄭譍曰: "內需司, 雖創於先王朝, 而及今弊尤甚焉, 須早革此然後, 民心和而太平生矣。 不正其本, 而欲末之治, 不可得也。 如此之事, 子孫若不革之, 則是重先王之失德也, 而固非貽謀持守者也。 如欲爲治, 當先革此。" 領事申用漑曰: "內需司, 先王朝所設之久者, 不卽革之, 以此也。 然弊之已極, 前後論之者多矣, 而謂之先王朝久事不可革, 至今猶在, 實未可也。 夫先王善道, 固宜遵守勿失, 無少搖動。 如此之事, 不得已當損。" 又曰: "兼幷之害治甚矣, 而今者兼幷者多矣。 夫限田, 爲之不易, 前朝欲行, 而議論不一, 終不爲也。 我太祖, 亦欲行之而未果。 今若行之, 則庶可矣。" 絿曰: "如欲致治, 限田不可不爲。" 參贊官李荇曰: "限田, 不可容易爲之, 先使不爲兼幷, 可也。"絿曰: "限田然後, 可無兼幷。 不然, 何以能禁兼幷耶? 然當從容商確, 漸次爲之。" 譍曰: "自古人君, 不能行古制者, 拘於俗論, 不克決斷故也。 井田雖不可爲, 限民名田, 固可爲也。" 用漑曰: "頃者奉天祥上疏, 命敍用。 夫陳言之人, 自上採之, 卽使敍於官爵, 則他可勸奬, 此固善矣。 但臣意以爲, 不可只以上疏敍之, 亦可見其人物而用之。" 譍曰: "士習不美, 由於後世之設科擧也。 科目雖不可無, 而科目之外, 別立如孝廉科, 可也。 宋以十科取士, 今不可如是, 而文章雖不足, 德行有餘之人, 別有出之之路, 則無乃多得可用者乎?" 掌令鄭順朋曰: "聞, 外方多有遺逸之士, 而乃以取科第, 自衒爲羞, 故不肯出矣。 雖不能別立科制, 而令中外多薦而用之, 可也。" 絿曰: "式年定額, 雖似多矣, 或有爲守令、爲敎授者, 而可用於要切者, 固少矣。 須廣其薦擧之路, 以盡用人之道。 科擧不可無, 而別爲科擧之制, 可也。" 順朋曰: "孝悌、方正之人, 不尙科目者, 有之矣, 不可以科目取之矣。 須有兩得之路, 或薦擧, 或設科, 可也。" 順朋與正言許渭又論前事, 不允。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0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재정-상공(上供) / 농업-전제(田制)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註 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