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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 7월 8일 임오 2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좌의정 김응기를 체직하고 합당한 인물을 발탁할 것 등을 지적한 대간의 상소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제는 ‘나인(內人)은 마땅히 내보내야 한다.’는 전교를 들었는데 오늘 전교의 뜻을 들으니 지극히 결망(缺望)이 됩니다. 병조(兵曹)에 잡힌 것은 사송하는 물건 때문이 아니라 사물(私物)을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인(內人)이 ‘사송하는 물건’이라고 빙자하여 병조로 하여금 놓아 주게 하고서, 그 말을 상달(上達)할 때에는 사물이라는 것을 숨기고 사송하는 물건이라 하여 천총(天聰)을 기망하였으니, 엄중히 다스려 내보내야 합니다.

내원당(內願堂)의 노비와 전지(田地)를 내수사로 보내라고 명하시었는데, 대저 임금은 내수사를 두고서 이를 사물로 여기는 것도 매우 부끄러운 일이거든, 하물며 이것을 더욱 늘리는 일이겠습니까? 전지는 백성에게 주어 갈아 먹게 하고 노비는 공사(公司)에 소속케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주상께서 대통을 이으신 뒤로, 영재(英才)를 모아 아름다운 공렬을 이룩해 보고자하신 지가 어느덧 십수년이 지났습니다마는, 어질고 덕 있는 이는 항상 적고 모두가 어리석고 재주 없는 자들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한번 폐정(廢政)403) 을 겪은 뒤로는 훌륭한 신하와 큰 선비들이 거의 모두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반정(反正)하실 때에 가까스로 그 나머지를 수습, 공(公)이니 경(卿)이니 하고 구차스럽게 지위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니, 이들이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하겠으며, 또한 그 직책을 다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난리를 겪은 뒤로부터는 사람마다 각각 제 한몸만 아끼어서, 충성을 다하여 극론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 하고, 시세를 보아 물러앉는 것을 현명한 일이라 하며, 【좌상(左相)을 가리킨 것이다.】 술잔이나 마시는 것을 아취 있는 일로 여기고, 【우상(右相)을 가리킨 듯하다.】 해학이나 일삼는 것을 고상(高尙)한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영상(領相)을 가리킨 듯하다.】 그리하여 일할 때에는 힘을 다하지 아니하고, 말을 해야 할 자리에 감히 곧은 말을 아니하니, 이는 제 한 몸만 잘 보전하려는 계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大臣)이라 하는 것은 뭇 신하들의 표본이니, 그를 사모하고 본받으려는 자가 어찌 한(限)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삼공(三公)은 자리가 있어도 거기에 합당한 인물이 없고, 인물은 있어도 실적이 없어서 기강(紀綱)은 풀어지고 정령(政令)은 문란하니, 이른바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고 천하를 경륜(經綸)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가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식견이 높은 선비들은 깊이깊이 애석히 여겨 마지않는 것입니다.

좌의정 김응기(金應箕)는, 재목이 비하하고 기국(器局)이 용렬하며, 지혜가 어둡고 뜻이 약한 사람인데, 시비(是非)와 호오(好惡)가 분명하지 않으며, 소심하게 살피고 침묵하며 결단하기를 즐기지 않으니, 이는 근신(謹愼)한 체하는 것이요, 일에 대해서는 가부(可否)를 결단하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서는 사정(邪正)을 가리지 않으니, 이는 후덕한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신과 후덕함이 일신을 보전하고 작록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기에는 족하겠지만 나라에 대하여는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중임(重任)을 맡긴 지가 저렇듯이 오래되었는데도, 위로는 임금을 보좌한 공효가 없고, 조정에서는 자리만 지킨다는 비난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그 은혜를 입은 것이 없으며, 크고 작고 간에 수립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런 정승을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대저 재상의 도(道)는 세 가지가 있으니, 배워서 그 마음을 넓히고, 정성으로써 그 뜻을 보지(保持)하며, 허심탄회하게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재상 중에는,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한 사람도 있었고404) , 토포 악발(吐哺握髮)405) 로 성력을 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재상은 화조(華藻)406)훈기(訓記)407) 를 학문으로 여기고, 문부(文簿)에 부지런한 것을 성실로 여기며 청탁(請托)을 받아들이는 것을 공평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풍습이 되어서 조정에는 실다운 정사가 없고 선비들에게는 아름다운 습속이 없는데도 도무지 돌이킬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간혹 의리(義理)를 궁구(窮究)하고 힘써 나라를 근심하여 감히 공의(公議)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는 이자(李耔)·김정(金淨) 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이를 오괴(迂怪)한 사람이라 하여, 속으로 꺼리고 겉으로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실로 대신(大臣)이 학문이 없고 성실치 않으며 공평치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 근년 이래로 나라에는 훌륭한 치적이 없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상서를 내리지 않으며, 재변의 일어남은 이제 더욱 극심하여 신음(呻吟)하는 괴로움이 폐조(廢朝) 때나 다름없습니다. 그리하여 궁민(窮民)은 조석거리가 없고 변군(邊郡)에는 1년의 저축이 없는데 여기에 또 도적들은 상국(上國)을 범하여 군사가 서북(西北)에 이었고 불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만물이 살아날 기미가 없으니, 언제 흙더미같이 무너지는 사태가 이를지 모릅니다. 민력(民力)이 이와 같이 척박하고 병재(兵財)가 이렇듯이 고갈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요즈음은 전하께서 깊이 구중 심처에 계시어,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어진 사람은 접하지 않으시고 오직 부녀자·환관들만 함께하시니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시는 일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고 들으매 뉘라서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대신은 마땅히 불을 끄듯이 애타게 논열(論列)하여, 우선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천견(天譴)에 답하고 또 백성을 구제하며 변경에 대비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어느 실수를 바로잡고 어느 시책을 건의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말이 이에 미치매 애닯고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군신(君臣)의 계합(契合)이 성실하지 못하면 실질적인 공효를 이룰 수 없고 현우(賢愚)의 구별이 명백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대신(大臣)을 대할 때에 엄한 예(禮)로써 임하시고 친절과 믿음으로써 하지 않으시어, 때로는 몇 달이 지나야 겨우 한 번 보시니 이는 대신을 존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무능한 사람을 그 자리에 두어 두시니 이는 또 권려(勸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존중하지 않으면 그 뜻을 실행할 수 없고, 권려함이 없으면 그 공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속히 김응기(金應箕)를 가시어 그 명기(名器)를 높이시고 예로써 존중하고 믿으시어 그 성적을 기대하시면 벼슬은 외람되지 않고 사람은 권려하는 바를 알아서 치공(治功)을 거의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물리치는 까닭은 다른 사람을 진출케 하려는 것이니, 대신을 물색함에 있어서 성심(聖心)으로 생각하시고 경사(卿士)에게 물으시고, 또 자격(資格)에 구애됨이 없이 널리 자문하시어, 나라의 여망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밝게 아신 뒤에 제수하시면, 아마도 합당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 대신을 제수함에 있어서는, 의망에 오른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다가 그것이 또한 정관(政官)408) 에게서 나온 의견이 아니어서 사람은 늘 부족하고 정치도 언제나 부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관직은 자리만 다 채울 필요가 없는 것이요 오직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였으니, 만약 합당한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그대로 비워둘 뿐인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좌의정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가? 체직할 수 없다. 나머지도 아울러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신진 사류(新進士類)에게 마음을 두고 조석으로 치적을 올리려 하매,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사람이, 호조 판서 안당(安瑭)이 일찍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김정(金淨)·박상(朴祥)을 구해 준 일을 가지고서 대신의 기량이 있다 하여 그를 추천해서 속히 삼공(三公)의 지위에 앉히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정광필은 중망(重望)이 있고 신용개는 풍도(風度)가 있어 둘 다 문제삼을 수가 없었고 오직 김응기(金應箕)만이 지나치게 공근(恭謹)하여 가부(可否)를 잘 말하지 않으므로, 그를 내쫓고 안당(安瑭)을 들여보내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287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궁관(宮官)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신분-천인(賤人) / 농업-전제(田制) / 역사-사학(史學)

  • [註 403]
    폐정(廢政) : 연산군 때의 난정을 말함.
  • [註 404]
    옛날의 재상 중에는, 훌륭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한 사람도 있었고 : 우(禹)임금이 순(舜)을 섬길 때, 훌륭한 말을 들으면 문득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는 고사.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우가 훌륭한 말을 듣고 절하며 ‘옳은 말씀입니다’ 했다." 하였다.
  • [註 405]
    토포 악발(吐哺握髮) : 입 속에 있는 음식을 토하고 머리카락을 움켜 쥐는 것. 옛날 주공(主公)은 손님이 오면 식사중에라도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토해 낸 뒤에 그를 맞았고, 또 머리를 감다가도 그 머리를 움켜 쥔 채 손님을 맞았다는 고사. 어진 사람을 얻기에 급급한 것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3.
  • [註 406]
    화조(華藻) : 아름다운 글.
  • [註 407]
    훈기(訓記) : 훈고(訓詁)와 기송(記誦).
  • [註 408]
    정관(政官) : 정사를 맡은 관원.

○臺諫啓前事, 又啓曰: "昨聞內人當黜之敎, 今聞傳敎之意, 至爲缺望。 被捉於兵曹, 非以賜送, 乃以犯私物也。 而內人依憑賜送之物, 令兵曹放之, 及其上達也, 隱蔽其私, 而只以賜送, 欺蔽天聰, 須痛治黜送。 內願堂奴婢、田地, 命屬于內需司。 大抵人君設內需司, 以爲私物, 可恥之甚, 而況附益之乎? 田地則許民耕種, 而奴婢則屬于公司, 可也。" 又上疏, 略曰:

主上赫嗣丕緖, 蒐攬英才, 思欲保固休烈, 十數年于玆矣。 而賢有德者常寡, 愚不才者皆是。 況一經廢政, 碩臣、宏士, 賊害無遺。 當其反正之始, 僅拾燼散之餘, 曰公曰卿, 苟位而授之, 果能稱其望, 而盡其責歟? 歷亂而後, 人各自愛, 盡忠極言者爲愚; 相時退默者爲工, 【指左相也。】 以銜杯爲雅, 【疑指右相也。】 謔浪爲高, 【疑指領相也。】 臨事而不致力; 當言而不敢直, 不過營己自保之計耳。 大臣者, 庶臣之表也。 蹤而慕效之者, 又何限乎? 故三公有位, 而無其人; 有人而無其實, 綱紀無所統, 政令無所管, 所謂燮理而經綸者, 更無望焉。 達識高見之士, 未嘗不痛惜於斯焉。 左議政金應箕, 材下而器庸, 智暗而志弱, 是非無所擇, 好惡無所執, 細察委曲, 容默優游, 則疑於謹; 事不決可否, 人不擇邪正, 則疑於厚。 其謹其厚, 若以爲保身、持祿之資則有裕, 而亦何裨於國哉? 寄任之重, 如彼其久, 而無匡弼之效於上; 有尸素之誚於朝民, 則不被其惠, 小大無所建, 將焉用彼相哉? 大抵相之道有三焉, 學而廣其心, 誠以持其志, 虛以受人言。 故古之爲相者, 有聞善言則拜者; 有吐哺而盡瘁者。 而今者爲臣者, 以華藻、訓記爲學; 勤事文簿爲誠, 延納請托爲公。 轉而成風, 朝無實政, 士無善習, 靡然不知反焉。 或有學究義理, 勤心憂國, 敢陳公議者出焉, 則 【時則有若李耔、金淨, 其人也。】 指爲迂怪, 罔不內忌, 而外非之, 此實大臣不學、不誠、不公之致也。 嗟乎! 比年來, 國無良政, 天不垂休, 災咎之變, 在今尤極, 呻吟之苦, 無異廢朝。 窮民無朝夕之供; 邊郡無一年之蓄, 加以賊犯上國, 兵連西北, 赤炎恒地, 物無生意, 土崩之勢, 恐在朝夕。 民力如是其瘠; 兵財如是其竭, 未審將何以處之。 況日者, 殿下深居九重, 越月踰時, 不接賢士, 唯婦寺與處, 虧行缺德, 隨事疊出, 凡在聽聞, 孰不隕心? 大臣義宜焦思論列, 悚若救焚, 先格君心, 用答天譴, 以爲恤民、策邊之地也。 而未聞規某失, 而獻某猷也。 言之至此, 不勝傷怛。 然君臣之契不孚, 則勢不能效質; 賢愚之路不白, 則義難與濟事。 殿下於大臣, 駕以嚴禮, 不推親信, 或過數月, 纔得一見, 非所以尊之也。 又以伴食之人, 置諸其位, 非所以勸之也。 不尊焉則無以行其志; 不勸焉, 則無以致其功。 伏請亟遞應箕, 以隆其器; 加禮尊信, 以期其績, 則官不濫, 而人知所勸, 治功庶可冀也。 夫所以退之者, 欲其進之也。 當其卜相, 謀及乃心, 謀及卿士, 不泥資格, 必廣詢訪, 明知國望所歸, 然後授之, 庶得其人矣。 爾來樹相之擧, 議不過數相; 謀不出政官, 所以人恒不得, 而治恒不足也。 且聞: "官不必備, 惟其人。" 如或無其人, 寧闕之而已。

傳曰: "左議政有何愆? 尤不可遞也。 餘竝不允。"

【史臣曰: "是時, 上方注意新進之士, 朝夕欲致治, 趙光祖諸人, 以戶曹判書安瑭, 常爲大司憲, 救金淨朴祥之事, 有大臣之量, 欲推薦, 速置三公之位, 而時居其位者, 鄭光弼有重望, 申用漑有風度, 皆不可議, 惟應箕恭謹之過, 而若無可否於事, 故乃欲擊去, 以爲進之路。"】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287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궁관(宮官)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신분-천인(賤人) / 농업-전제(田制)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