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1516년 명 정덕(正德) 11년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915) 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242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 [註 915]내신(內臣) : 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