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과 연산의 후손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다
전후에 의논된 것을 정원에 내리며 이르기를, 【정광필 등의 의논은 19일에 한 것이다.】
"노산과 연산의 후손을 세우려 한 뜻은, 곧 옛적에 멸망하는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던 유의(遺意)이다. 속적(屬籍)이 삭제되지 않았으니, 속적이 마땅히 끊어지게 된다는 의논은 과연 잘못이다. 이들이 비록 폐출(廢黜)되기는 하였지만, 천륜(天倫)을 어찌 폐하겠는가. 후손이 없음을 민망히 여겨 이어갈 후사(後嗣)를 세우려 함이 비록 뜻이 지극한 일이지만, 다른 종친(宗親)이 후사를 세우는 예와 같지 않으니, 이런 일은 모름지기 옛 법에 맞게 된 다음에 거행해야 한다. 지금 보건대 여러 의논이 한결같지 못하고, 그 중에 비록 옛 예를 인용한 것이 있지만 꼭 이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후손을 세우려 함은 제사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데 송씨와 신씨가 아직도 생존했으니, 관이 제물을 가져다 치제함이 역시 후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그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유순(柳洵)은,
"노산과 연산의 후손을 세움은 경솔하게 할 수 없는 일이나 상께서 만일 가하게 여기신다면, 후손 되기에 가합한 사람 및 제사 받드는 모든 사항들을, 해조(該曹)가 자연 마련하여 시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송일(宋軼)의 의논은,
"노산과 연산의 후손 세우는 일은 불가한 듯하고, 각기 그 집 사람들이 상례에 의해 하도록 함이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였고, 강혼(姜渾)은,
"노산과 연산이 비록 모두 후손이 없지만 만일 후손을 세우기로 하면, 후손된 사람이 아들이 되게 되고, 봉사(奉祀)를 하고 안함은 후손이 있고 없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일에 신이 그렇게 계달(啓達)한 것인데 또한 지금 송씨와 신씨가 모두 생존했으니, 상례에 의해 소원대로 후손을 세움이 의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고, 이손(李蓀)은,
"노산과 연산의 후손을 세움은 사세가 곤란할 듯합니다."
하였고, 박열(朴說)은,
"노산과 연산이 비록 도리를 잃어 폐출되었지만 후사가 없음을 민망히 여겨, 후손을 세워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함은, 참으로 인정과 의리에 합치되는 일입니다."
하였고, 이계맹(李繼孟)은,
"그 두 집에서 소원한 소목(昭穆)이 서로 맞는 일가를 가려 후손을 삼도록 허락하되 범상한 가문처럼 단지 제사만 받들고, 습작(襲爵)이나 가관(加冠)하는 일은 없도록 함이 인정과 의리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유담년은,
"사대부의 예대로 송씨와 신씨가 후손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 해조(該曹)에 정소(呈訴)하여 후손으로 세우도록 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고, 김극핍(金克愊)은,
"두 집이 스스로 가려 후사를 삼도록 함은 곧 한때의 임시 변통이지, 예문에는 맞지 않을 듯싶습니다. 또한 세종조에 이방석(李芳碩)의 후사를 세운 일이 있으니, 예관(禮官)이 옛 법례를 고찰하여 지당한 법제를 정하도록 함이 어떠하리까?"
하였고, 승지 이자화(李自華)는,
"노산과 연산의 후손을 세워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함은 진실로 대의와 합치되는 일인데, 성상께서 심정이 간절 지극하시니 참으로 덕이 훌륭하신 일입니다. 선왕 때에 방석의 후손을 세운 일과 사세는 다르지만 의의는 같으니, 후사를 세울 때 거행해야 할 절차를 예관으로 하여금 옛 법제를 자세히 고찰하여, 정례(情禮)를 다해 거행하도록 함이 합당합니다."
하였고, 이조 참의 김안로(金安老)는,
"노산과 연산은 속적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봉호(封號)를 의당 왕자군(王子君)처럼 내려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묘지기를 두며, 또한 제물을 주도록 해야 하는데, 후손을 세우지 않으면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으니 후손을 세워 세습(世襲)하기를 일체 왕자군의 예에 의하도록 하되, 만일 제택(第宅)이 없다면 관에서 주어 사묘(祠廟)가 있게 해야 하고, 또한 제토(祭土)와 노비[臧獲]를 주어 변함 없이 제사하도록 함이 의리에 합치될 듯합니다."
하였고, 호조 참의 이맥(李陌)은,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진실로 애처롭고 민망스러워 마땅히 후손을 세워 제사를 받들도록 해야 합니다마는, 다만 성종(成宗) 때에 이런 의논이 없었고, 비록 죄가 없는 듯하지만 지금 이미 연대가 오래되었으니, 추후하여 후손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연산은 도리를 잃음이 한없어 종사를 거의 위태롭게 하였으니, 종사에 죄를 얻음이 큰데 성상께서 반정(反正)하시자, 군으로 강등해서 봉하여 천명[天年]을 마치도록 하였으니 은덕을 입음이 큽니다. 이미 종묘에 추방하여 폐출한다고 고하여 놓고, 또한 어찌 후손을 세우겠습니까? 이번의 후손을 세우자는 의논이 비록 인자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국가의 대계에 있어서는 매우 불가합니다. 가사, 조정이 그래도 연산이 후손 없음은 애석하게 여겨 왕자군들의 아들로 후사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가, 그 계후(繼後)한 아들이 혹시라도 불초한 마음을 갖는다면 어찌 구실삼아 후일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을지 알 일이겠습니까? 이 두 군의 후손이 있고 없음은 조정이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맥은 요행으로 과거했고, 척리(戚里)에 연줄 대어, 성질과 행동이 간특했다. 상이 그의 의논에 따라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어, 훌륭한 일이 이 세상에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맥의 살을 씹어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한 마디 말이 나라 일을 망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조 참의 정수강(丁壽岡)은,
"노산과 연산은 이미 군(君)으로 봉작(封爵)되고 속적(屬籍)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국가의 법제대로 그의 후손을 습작시키고, 또한 관에서 민전(民田)870) 과 집을 주어, 사당 세우고 제사 받들 근거를 삼도록 함이 어떠하리까?"
하였고, 공조 참의 정광국(鄭光國)은,
"노산과 연산은 이미 사중삭(四仲朔)871) 에 사당 제사를 폐하지 않으니, 제사 맡을 사람을 없게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번에 비록 후손을 세우더라도 여타 왕자군으로 후손을 삼은 예처럼 습작함은 공편 합당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하였고,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이홍간(李弘幹) 등은,
"노산과 연산은 이미 국가에서 군으로 봉하고 종실로 대우하여 진실로 속적이 끊어진 것이 아니니, 종실 중에 후사될 만한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 제사 받들도록 해야 할 것이 단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70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23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下前後議得于政院曰: " 【鄭光弼等議, 在十九日。】 魯山、燕山欲立後之意, 此古興滅、繼絶之遺意也。 其屬籍不削, 屬籍當絶之議, 果非也。 是雖見廢, 天倫豈可廢乎? 憫其無後, 欲立繼嗣, 意雖至矣, 非如他宗親立後之例。 如是事, 須合於古典然後, 擧而行之。 今觀, 群議不一, 其間雖引古例, 未知其正合於此。 欲其立後者, 爲祭祀而然也。 宋氏、愼氏尙在, 官輸祭物致祭, 不亦厚乎?" 其議則柳洵以爲: "魯山、燕山置後, 未可輕易施行。 上若以爲可, 則爲後可當人及奉祀諸事, 該曺自可磨鍊施行。" 宋軼議: "魯山、燕山立後事, 似若不可, 令各其家人, 依常例爲之, 恐或無妨。" 姜渾以爲: "魯山、燕山, 雖皆無後, 若令立後, 則爲之後者爲之子, 其奉祀與否, 不係於其後之有無也。 故臣前日, 以此啓達。 且今宋氏、愼氏俱存, 令依常例, 從願立後, 似當於義。" 李蓀以爲: "魯山、燕山立後, 其事勢似難。" 朴說以爲: "魯山、燕山雖失道見廢, 憫其無嗣, 立後使不絶祀, 正合情、義。" 李繼孟以爲: "許其兩家, 擇其疏遠昭穆相當之族, 以爲後, 自同凡家, 只奉其祀, 而無襲爵、加冠之事, 於情、義爲當。" 柳聃年以爲: "依士大夫例, 令宋氏、愼氏, 擇其可爲後者, 呈該曺立後, 似當。" 金克愊以爲: "令兩家自擇爲後, 乃一時權宜, 恐未合禮文。 且於世宗朝有芳碩立後事, 令禮官參考古例, 定爲至當之制, 何如?" 承旨李自華等以爲: "魯山、燕山立後, 俾不絶祀, 允合大義。 聖情懇至, 實盛德事也。 其與先王立芳碩後, 事殊而意同, 立後應擧節目, 可令禮官, 詳究古制, 盡其情、禮, 行之爲當。" 吏曺參議金安老以爲: "魯山、燕山屬籍未絶, 降有封號, 自可同於王子君, 不宜絶祀。 今置守塚, 又給祭物, 不立後, 無以主其祀, 其立後世襲, 一依王子君例, 如無第宅, 官爲給之, 使祠廟有所。 且置祭田、臧獲, 俾不贊祀事, 似合於義。" 戶曺參議李陌以爲: "嘗聞, 魯山傳位於世祖, 世祖卽位之後, 人心未定, 不得已降封爲君, 尋賜死, 誠可憐悶, 宜當立後, 以奉其祀。 但在成宗朝未有是議, 雖似無罪, 今年代已遠, 不可追立其後。 燕山失道已極, 宗社幾危, 其得罪宗社大矣。 聖上反正, 命降封爲君, 使終天年, 爲賜大矣。 旣告宗廟放黜之, 又何立後? 今此立後之議, 雖出於仁慈, 於國家大計, 甚不可也。 設使朝廷猶惜其燕山無後, 請王子君之子, 立以爲後, 使奉其祀, 其繼後之子, 幸有不肖之心, 則安知藉口不爲後日之患哉? 此兩君有後、無後, 非朝廷所可恤也。"
【史臣曰: "陌, 僥幸〔僥倖〕 中第, 攀緣戚里, 性行奸慝。 上於此議, 不能無疑, 使盛事, 不得見於斯世, 至有欲磔食陌之肉者, 豈非一言喪邦者乎?"】
禮曺參議丁壽崗以爲: "魯山、燕山, 旣封號爲君, 不絶屬籍, 則當依國制, 襲爵其後。 且官給民田、茅舍, 以爲立廟、供祭之資, 何如?" 工曺(參義)〔參議〕 鄭光國以爲: "魯山、燕山, 旣於四仲, 不廢廟祀, 則似不可無主祀之人。 但雖今立後, 以他王子君爲後之例襲爵, 恐未便當。" 藝文館奉敎李弘幹等以爲: "魯山、燕山, 旣封爲君, 則國家以宗室待之, 固非見絶於屬籍也。 擇宗室可嗣者而嗣之, 以奉其祀, 斷無可疑。"
-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70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23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