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향을 맡은 관원을 문신으로 차임하는 문제와, 과거 실시, 제언에 관한 일 등을 논의하다
전교하였다.
"금년에는 일찍이 한재(旱災)를 당하고 늦게 풍재(風災)를 당하였으므로, 내가 어사(御史)를 보내어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자 한다. 또, 금년의 전조(田租)와 왕년의 공채(公債)를 감하고자 하니, 오늘 연방(延訪) 때에 아울러 의논하라."
맨 먼저 제복(祭服)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송천희(宋千喜)가 아뢰기를,
"제복을 거칠게 만든 관원은 먼저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친히 감독해서 만들지 않았으니, 이것은 워낙 해조(該曹)의 잘못입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거칠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 더럽기까지 하니, 이것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지극히 미안합니다. 이는 전수(典守)하는 자가 삼가서 간직하지 않고 더러운 곳에 두어서 그런 것이니, 죄를 다스려서 뒷사람을 징계해야 합니다."
하고, 광필이 아뢰기를,
"워낙 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파직(罷職)은 율문(律文)에 없는 일이기는 하나, 뒷 사람을 징계하자면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上) 이르기를,
"제향(祭享)에 관한 일을 특별히 더 규검(糾檢)하는데도 이제 이와 같으니, 공죄(公罪)로 논하면 징계될 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하매, 광필이 아뢰기를,
"거칠게 만든 자와 전수하는 자는 추고하여 죄주어야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계맹(李繼孟)이 아뢰기를,
"거칠게 만든 것은 매우 옳지 않으나, 본디 법이 있는데 율문에 없는 죄를 주는 것은 임금이 할 일이 아닙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율문에 없는 죄를 주는 것은 워낙 옳지 않으나, 제향을 위하여 특별히 그 죄를 다스리는데 무슨 옳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안당(安瑭)이 아뢰기를,
"그 중에서 더욱 심한 자는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중에서 완만(頑慢)이 너무 심한 자는 혹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제향을 맡는 관원은 문신(文臣)으로 차임(差任)해야 하고 그 장관(長官)도 일에 익숙한 문신을 가려서 차임해야 한다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제향을 맡는 관원은 문신으로 차임해야 마땅하나, 종묘(宗廟)·사직(社稷)·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경전(永慶殿)에 다 문신을 차임한다면, 삼관(三館)의 관원을 써야 할 것이고, 벼슬이 높은 문신이 할 수는 없을 것인데, 젊은 문신이 능히 삼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유생(儒生)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니, 가려 쓰면 될 것입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다 문신으로 차임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를테면 사직 영(社稷令)·종묘 영(宗廟令)은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차임하면 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김응기(金應箕)·좌참찬(左參贊) 이자건(李自健) 등의 뜻도 그러하였고, 우찬성(右贊成) 박열(朴說)이 아뢰기를,
"종묘·사직에만 문신을 가려서 제수하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문신으로 차임하기는 어려우니, 생원(生員)·진사(進士)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라. 사직 영·종묘 영은 별법(別法)이 없더라도 이제부터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송흠(宋欽)이 수령(守令)으로 성적(聲績)이 있으니 갈아서 경직(京職)을 제배(除拜)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최숙생(崔淑生)은 문재(文才)가 넉넉하고 벼슬도 오래 지냈는데, 이미 당상(堂上)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초탁(超擢)할 뜻이 없으니, 또한 성감(聖鑑)이 살피셔야 할 바입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대신의 소임입니다. 이제 광필이 아뢴 송흠도 탁용(擢用)할 만하며, 신영홍(申永洪)은 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가 목장(牧場)의 일로 갈렸는데, 신의 사촌이기 때문에 천거하기 어려울 듯하나, 그 재기(才器)가 쓸 만하니, 한산(閑散)한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박열이 아뢰기를,
"이우(李堣)·신공제(申公濟)는 수령으로 성적이 있어서 가자(加資)하였는데, 송흠이 어찌 이 몇 사람들보다 못하겠습니까?"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박영(朴英) 같은 자는 탁용할 만합니다.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 김인손(金麟孫)은 비록 문무출신(文武出身)이 아니기는 하나, 일찍이 생원(生員)이 되어 문필(文筆)이 부족하지 않고 크게 무재(武才)가 있으며 나이는 마흔이 지났으나, 미처 쇠약해지기 전에 변방 및 육진(六鎭)의 판관(判官)으로 초서(超敍)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거된 사람은 먼저 경직에 시험해 보고, 변장(邊將) 자리가 비거든 적당히 그 자리를 채워 차임하도록 하라."
하매, 병조 판서(兵曹判書) 고형산(高荊山)이 아뢰기를,
"문신 중에서 이빈(李蘋) 같은 자도 탁용(擢用)할 만합니다. 검열(檢閱) 유용근(柳庸謹)은 신급제(新及第)이기는 하나, 인물이 범상치 않고 나이도 젊지 않으니, 이장곤(李長坤)의 전례처럼 평사(評事)를 탁수(擢授)해야 합니다.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신변(申抃)은 나이가 이미 마흔 남짓한데 장재(將才)가 있으니, 미처 늙기 전에 변방의 판관(判官)으로 초서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헌부(憲府)의 문을 쏜 일에 관해서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기강을 유지하는 직임인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추고(推考)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거 없이 추고하자면, 전에 대간의 논박을 받은 자와 불령(不逞)한 무리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어느 사람이 한 짓인지 모르고 무슨 근거로 추고하겠습니까? 지금 천변(天變)이 있고 옥수(獄囚)가 매우 많으니 이는 매우 불가합니다."
하고, 응기가 아뢰기를,
"헌부도 어느 사람이 한 짓인지 모르는데, 의심할 만한 사람을 다 추고한다면 형벌이 매우 지나칠 듯합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일에 단서가 없으면 사람이 많이 다칠 것입니다."
하고, 천희가 아뢰기를,
"신이 근래 형관(刑官)이 되어서 보니, 정상이 명백한 자일지라도 다 형장(刑杖)을 참고서 승복하지 않는데 더구나 이 일은 형적이 아주 없으니, 추문한다면 죄없는 사람이 많이 다칩니다."
하고, 좌찬성(左贊成)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추고하기에는 증거가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권균(權鈞)이 아뢰기를,
"추고하더라도 끝내 처치하기 어렵고, 또 사람이 혹 많이 다친다면 임금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 어그러질 듯합니다."
하고, 박열이 아뢰기를,
"형적이 없으니 결코 추고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에 증거가 없다 하여 추고하지 않으면 불가할 듯하다. 이는 큰 일이니, 추고하여 알아 내지 못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 어떠한가? 또, 사대부(士大夫)로서 논박받은 자가 많은데, 그 가운데에 어찌 흉험(凶險)한 자가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어찌 사대부가 한 짓이랴? 반드시 무지한 송자(訟者)가 한 짓일 것이다."
하매, 광필이 아뢰기를,
"헌부는 법을 지키고 요동하지 않아야 할 따름입니다. 추고하자면 증거가 없습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추고하자면 부득이 형장을 써야 하니, 신은 추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석전제(釋奠祭) 및 중시(重試) 뒤에 별시발췌과전시(別試拔萃科殿試)를 설행(設行)해야 할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석전을 친행(親行)할 때에 별시(別試)가 있고 또 중시(重試) 뒤에 별시를 하는 것은 번거로울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두 가지를 합하여 한 번의 별시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고, 응기의 의논도 같았고, 권균이 아뢰기를,
"성묘조(成廟朝)에서는 석전을 친행하면, 제사 뒤에 곧 시취(試取)하고, 무과는 하련대(下輦臺)에 전좌(殿座)하여 시취하였습니다. 이제 만약에 제일(祭日)에 곧 시취한다면, 다시 중시 때에도 별시를 해야 합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이미 석전 때에 사람을 뽑았다면 어찌 다시 중시 때에 사람을 뽑을 수 있겠습니까? 올봄 식년시(式年試)에 이미 33인을 뽑고 정시(庭試)에 1인을 뽑았는데, 또 다시 별시를 행한다면, 인재도 한이 있어서 양성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두 가지를 합하여 한 번으로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용개의 의논도 같았고, 광필·응기·용개가 함께 아뢰기를,
"발췌과(拔萃科)는 초시(初試)한 지 이미 오래나, 올해에는 아울러 행하기 어려우니, 후년에 한가한 틈을 타서 행하여도 무방합니다. 그 초시에 입격한 자를 버릴 것인지는 임시하여 작정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이것은 비록 성사(盛事)이기는 하나, 대례(大禮)에 관계되지 않으니 하지 않더라도 무방합니다."
하고, 박열이 아뢰기를,
"두 가지를 합하여 한 번의 별시로 한다면, 날짜를 물려 가려서 크게 거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외방(外方)의 유생(儒生)이 미처 올라오지 못하여 사람을 뽑는 길이 좁아집니다."
하고, 광필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유생은 기질(氣質)이 다 경박하여, 만약에 자주 별시를 한다면, 다 실학(實學)을 읽지 않고, 뽑아 모아서 과거에 응시하는 공부만 힘쓸 것입니다. 어찌하여 반드시 자주 별시를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석전을 친행하고자 해서 말한 것이다. 과연 두 가지를 아울러서 별시를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또, 강무장(講武場)의 긴요하지 않은 곳에 백성이 들어가서 경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상께서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강무장에 농사짓하게 하고자 하시는 뜻은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먼 곳에 있어서 강무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일구기에 마땅한 땅은 각도(各道)에 행이(行移)하여 백성이 농사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긴요한 곳과 긴요하지 않은 곳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매, 형산이 아뢰기를,
"상세하게 마련한 뒤에 백성에게 농사짓기를 허가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잔읍(殘邑)의 수령(守令)을 가려서 차임(差任)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잔읍은 어질지 않은 자를 수령으로 삼으면 백성이 폐해를 많이 받습니다. 이제 초록(抄錄)된 잔읍은 혹 적실(的實)하지 못하여, 이를테면 가평(加平)·용인(龍仁)·명천(明川)은 본디 잔읍이 아닌데도 초록하였고, 안협(安峽)·흡곡(歙谷)·부령(富寧)은 본디 잔읍인데 초록하지 않았으니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낭관(郞官)과 함께 의논하여 초록하였으니 어찌 모두 적실하겠습니까? 물러가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초록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잔읍은 다시 초록해야 하고 수령은 가려서 차임해야 한다."
하였다.
또, 제언(堤堰)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외방의 제언은 본도의 감사(監司)를 시켜 규찰(糾察)해야 합니다. 어찌 이 때문에 대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감사가 먼저 순심(巡審)하고 수축(修察)한 뒤에 다른 해에 뒤따라 대신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명색을 제언이라 하나 혹 폐기(廢棄)하면, 백성이 혹 차지하여 갈아 먹으니 이것은 막아야 합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성묘조(成廟朝)에 박원종(朴元宗)이 제언의 일을 호조(戶曹)에 맡겨서 전장(專掌)하도록 청하였으나, 지금 형세로 보면 따로 한 국(局)을 설치했을 때보다 아주 못합니다. 외방의 제언을 감사가 낱낱이 친히 살필 수 없으므로,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제언사(堤堰司)를 두어 그 일을 맡되 대신이 그것을 겸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대신으로 하여금 전장하게 해야 아마도 규검(糾檢)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감사에게 하유(下諭)하더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폐이(廢弛)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박열·남곤·신용개가 아뢰기를,
"이제 국을 설치하더라도 반드시 폐단이 있지는 않을 것이니, 국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김세균(金世鈞)에게 치부(致賻)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이는 참으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과연 치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금년의 전조(田租)와 왕년의 공채(公債)를 감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계맹이 아뢰기를,
"군사를 움직인 뒤라면 전조를 감할 만하나, 지금 전조를 감한다면 국용(國用)이 부족하므로 안될 듯합니다."
하고, 광필이 아뢰기를,
"백성의 고통을 묻고 전조를 감하는 것은 다 임금의 훌륭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는 국용이 매우 적으니 금년의 전조는 감할 수 없을 듯합니다. 왕년의 공채는 감면할 수 있겠으나, 공채는 다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축해서 흉황(凶荒)에 대비하는 것이니, 만약에 저축이 적은데 혹 흉황을 당하면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또, 환납(還納)하지 않은 자는 다 토호(土豪)이니, 이제 만약에 감면한다면 호강(豪强)한 자가 먼저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고, 박열이 아뢰기를,
"전조를 감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나, 국용이 매우 적고 백관(百官)의 봉록(俸祿)도 모자라니, 금년의 전조는 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왕년의 공채를 감하면 백성이 실혜(實惠)를 받을 것입니다."
하고, 형산이 아뢰기를,
"외방의 수령이 해유(解由)를 내고자 하여 공채를 독촉해 거두느라고, 왕년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다 근년으로 옮겨 기록하므로, 이제 감해 주더라도 백성은 실혜를 입지 못합니다. 다만, 그 중에서 받아 먹은 뒤에 죽었거나 도망하여 일족(一族)·절린(切隣)에게서 거두는 것이라면, 특별히 감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광필이 아뢰기를,
"재상(災傷)이 있는 고을에는 어사(御史)를 보내어 적간(摘奸)하므로, 각 고을의 수령이 어사가 내려오는 것은 두려워하여, 재상이 있더라도 거의 다 재상이 없는 것으로 시행하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이러하면 백성은 더욱 실혜를 입지 못합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한 법이 서면 한 폐단이 생기는 것이니, 이제 어사를 보내어 적간하는 것은 더욱 민폐(民弊)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상이 있고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서 모두 어사를 보내면 될 듯하다."
하매, 광필 등이 아뢰기를,
"백성의 고통을 묻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참으로 상교와 같이 어사를 보내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팔도에 다 보낼 수는 없으니, 풍재(風災)·수재(水災)가 있는 곳에만 어사를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송세림(宋世琳)이 상소한 일을 조목에 따라 의논하였다. 계맹이 아뢰기를,
"공부(貢賦)에 작지가(作紙價)를 거두는 일은 이미 오랜 폐단이 되었으나, 예전부터 금지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옳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당초에 세운 법이 이미 상세하니, 다시 할 일이 없습니다."
하고, 용개·천희가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고자(庫子)가 방납(防納)으로 이(利)를 취하니 그 폐해가 많습니다."
하였다.
또, 연해(沿海) 고을의 염세지(鹽稅紙)의 상납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종이가 천하고 베가 귀하였으므로 폐단이 없었으나, 이제는 베가 천하고 종이가 귀하므로 점점 폐단이 있게 되었으니, 호조로 하여금 따로 상정(詳定)하여 시가(市價)에 따라서 교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베 한 필의 값은 겨우 책지(冊紙) 한두 권이니, 개정하게 해야 됩니다."
하고, 승지(承旨)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상지(常紙)로 바쳤는데 지금은 백지(白紙)로 바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조(該曹)에 내려서 상세히 살핀 뒤에 상정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또, 승도(僧徒)를 추쇄(推刷)하고 사찰(寺刹)을 분훼(焚毁)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근자에는 이미 양종(兩宗)의 승도가 없어졌고 또 흥행(興行)할 수도 없으므로, 불교의 쇠퇴는 극도에 달했다고 할 만한데, 어찌하여 반드시 사찰을 분훼해야만 하겠습니까?"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이는 원위(元魏)에서 탑묘(塔廟)를 헐어 없앤 것과 같은 일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일체 분훼해야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역마(驛馬)에 대하여 값을 정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용개가 아뢰기를,
"말[馬] 한 마리의 값이 거의 베 5백 필이 되니, 이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고, 광필이 아뢰기를,
"말을 가진 자가 스스로 그 값을 올리느라고 미루면서 팔지 않아서, 역자(驛子)가 어쩔 수 없이 값을 넉넉히 주고서 사므로, 그 폐해가 적지 않으니, 그 법을 더욱 밝혀야 합니다."
하였다.
또, 음식을 사치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이 말은 지당합니다. 전에 이미 각도에 행이(行移)하였는데, 이제 다시 더욱 밝혀서 감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사치의 풍습이 이미 이루어져서 쉽게 금할 수 없습니다. 윗사람부터 아랫사람까지, 안으로는 궁금(宮禁)으로부터 밖으로는 여염에까지 한결같이 검약을 숭상하여 사치를 일삼지 않으면 아마도 금할 수 있으니, 윗사람이 몸소 행해야 하며, 그밖에는 금할 법이 없습니다."
하고, 용개가 아뢰기를,
"아래의 습속은 위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고, 안당이 아뢰기를,
"이 말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용개는 제도를 벗어나 아주 사치하게 집을 꾸미고, 아름다운 첩을 많이 거느려 각각 다른 집에 두고서 날짜를 헤아려 돌면서 자고 다녔고, 남녀 하인들도 앞을 다투어 의복과 음식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용개는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 지냈으며, 안당은 소격동(昭格洞)에 집을 짓되 돌로 기둥을 만들기까지 하였으므로, 대간(臺諫)이 논박하였다. 이 두 사람은 다 자신이 절검하지 않았는데도 말하는 것은 그럴 듯하였으니, 부끄러울 일이다.
상이 이르기를,
"위에서 하는 것을 아래에서 본뜬다는 말은 지당하다. 과연 법으로 금할 수 없다."
하였다.
또, 포산감(苞山監) 귀복(貴福)의 일을 의논하였다. 광필이 아뢰기를,
"종친(宗親)으로서 닭·오리를 훔쳤고 죄도 중하지 않으므로, 이미 상은(上恩)을 입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배소(配所)에 도로 보내야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안국이 아뢰기를,
"제언(堤堰)은 중대한 일이니, 옛사람이 하거서(河渠書)572) 를 두어 수리(水利)를 중시하였습니다. 호조는 일이 많아서 여기에 전력하지 못하므로, 조종조에서 반드시 헤아린 바가 있어서 국을 설치했을 것입니다. 이제 삼공(三公)이 다 여기에 들어와 있으니, 곧 의논을 정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광필·용개 등이 모두 아뢰기를,
"제언사(堤堰司)를 두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25권 72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201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정론(政論) / 재정-잡세(雜稅) / 인사-임면(任免) / 과학-천기(天氣) / 의생활-예복(禮服)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 [註 572]하거서(河渠書) : 《사기(史記)》의 편명(篇名).
○傳曰: "今年早遇旱災, 晩値風災, 予欲分遣御史, 問民疾苦。 又欲減今年田租及往年公債, 其竝議於今日延訪時, 首議祭服事。" 刑曺判書宋千喜曰: "祭服麤造官員, 所當先推。" 領議政鄭光弼曰: "不親監造, 此固該曺之失也。" 右議政申用漑曰: "非徒麤造, 又至陋汚, 着此行祭, 至爲未安。 此由典守者不謹藏守, 置於褻汚之地, 而然也。 此可治罪, 以懲其後。" 光弼曰: "固宜治罪而罷職, 乃律外之事。 然若懲後人, 則不得不爾。" 上曰: "祭享事, 別加糾檢, 而今若是, 若論以公罪, 似無可懲。" 光弼曰: "麤造與典守者, 當推而罪之。" 戶曺判書李繼孟曰: "麤造甚不可, 然本自有法, 律外加罪, 非人主之事也。" 用漑曰: "律外加罪, 固不可。 然爲祭享, 別治其罪, 有何不可?" 吏曺判書安瑭曰: "其中尤甚者, 罷職可也。" 上曰: "其中頑慢太甚者, 或罷職, 可也。" 又議祭享官員, 當以文臣差授, 其長官亦以諳錬文臣擇差事。 光弼曰: "祭享官員 當以文臣差授, 但宗廟、社稷、文昭、延恩、永慶殿, 若皆以文臣差之, 則必用三館官員, 非職高文臣所得爲也。 年少文臣能謹與否, 未可知也。 儒生中有學識者, 不爲不多, 擇用可矣。" 安瑭曰: "勢不可皆以文臣差之。 如社稷、宗廟令, 擇其有學識者差之則可也。" 左議政金應箕、左參贊李自健等意亦然。 右贊成朴說曰: "只於宗廟、社稷, 擇授文臣, 可也。" 上曰: "皆以文臣差授難矣, 擇生員、進士中, 有學識者, 任之可也。 社稷、宗廟令, 雖無別法, 自今擇差, 可也。" 又議薦賢事。 光弼曰: "臣意, 宋欽以守令有聲績, 遞拜京職爲當。 且崔淑生優於文, 歷仕亦久。 雖已陞堂上, 然無超擢之意, 且聖鑑所當察也。" 用漑曰: "薦賢, 大臣之任也。 今光弼所啓宋欽等, 亦可擢用。 申永洪, 前爲海州牧使, 以牧場事見遞。 以臣四寸, 似難薦進, 然其才器可用, 不可置諸閑地。" 朴說曰: "李堣、申公濟以守令, 有聲績授加資, 宋欽豈下於此數人乎?" 安瑭曰: "如朴英者, 可以擢用。 內贍寺直長金麟孫, 雖非文武出身, 曾爲生員, 文筆非不足, 大有武才。 年過四十, 宜未及衰, 超敍邊方及六鎭判官, 何如?" 上曰: "薦擧之人, 先試於京職, 邊將有闕, 隨宜塡差, 可也。" 兵曺判書高荊山曰: "文臣中如李蘋者, 亦可擢用。 檢閱柳庸謹, 雖是新及第, 人物異常, 年亦不少, 宜如李長坤之例, 擢授評事, 可也。 成均館學諭申抃, 年已四十餘, 有將才, 及其未老, 超敍爲邊方判官, 可也。" 又議射憲府門事。 光弼曰: "臺諫操紀綱之任, 而有如是之事, 其欲推之者, 不得不爾。 但推之無據, 曾被臺駁者及不逞之徒, 不爲不多, 不知某人所爲, 何所據而推之? 今有天變, 獄囚甚衆, 此甚不可。" 應箕曰: "憲府亦不知某人所爲, 可疑之人, 若皆推之, 則恐刑罰甚濫。" 用漑曰: "事無端緖, 人必多傷。" 千喜曰: "臣近爲刑官, 雖情狀明白者, 亦皆忍杖不服。 況此事頓無形跡, 若推之, 則無罪之人, 多傷矣。" 左贊成金詮曰: "推之無據。" 禮曺判書權鈞曰: "假令推之, 終難處置。 且人或多傷, 則恐乖人君好生之德。" 朴說曰: "無形迹, 決不可推。" 上曰: "若以事無所據而不推, 則恐爲不可。 此, 大事也。 推而不得, 然後棄之, 何如? 且士大夫被駁者多, 其中豈無凶險者? 然予意以爲, 此豈士大夫所爲? 必無知訟者所爲也。" 光弼曰: "憲府當守法不搖動而已, 欲推則無所據矣。" 用漑曰: "推之則不得已用刑杖。 臣意不可推也。" 又議釋奠祭及重試後別試、拔萃科、殿試可行與否。 光弼曰: "釋奠親行時, 有別試, 又於重試後, 爲別試, 似爲煩數。 臣意以爲, 合二事爲一別試, 何如?" 應箕議同。 權鈞曰: "成廟朝若親行釋奠, 則祭後卽試取, 武科則殿坐下輦臺, 取之。 今若於祭日卽取, 復於重試時, 又爲別試, 可也。" 右參贊南袞曰: "旣取人於釋奠時, 則豈可復取人於重試時乎? 今春式年, 已取三十三人, 又爲庭試取一人。 又若再行別試, 則人才亦有限, 而無養成之暇矣。 合二事一行, 可也。" 用漑議亦同。 光弼、應箕、用漑僉啓曰: "拔萃科, 初試已久, 然今年難可竝行, 待後年, 乘閑暇行之, 無妨。 其初試入格者, 可棄與否, 臨時酌定, 何如? 是雖盛事不關大體, 雖不爲, 亦無妨。" 朴說曰: "若合二事, 爲一別試, 則退擇日爲大擧, 可也。 不然則外方儒生未及上來, 而取人之路, 窄矣。" 光弼曰: "我國儒生, 氣質皆輕, 若數爲別試, 則皆不讀實學, 務爲抄集, 爲應擧之學矣。 何必數爲別試乎?" 上曰: "予欲親行釋奠而云耳。 果兼二事爲別試, 可也。" 又議講武場不緊處, 許民入耕事。 光弼曰: "上意, 欲令窮民, 起耕於講武場, 至爲美矣。 其在遠處, 不合講武, 宜於耕墾地, 當行移各道, 許民起耕。" 上曰: "其緊與不緊處, 使該曺磨鍊, 何如?" 荊山曰: "詳悉磨鍊後, 許民起耕, 可也。" 又議殘邑守令擇差事。 光弼曰: "殘邑以不賢者爲守令, 則民多受弊。 今所抄殘邑, 或未的實, 如加平、龍仁、明川, 本非殘邑, 而亦抄焉。 安峽、歙谷、富寧, 本是殘邑而不抄, 似未穩矣。" 安瑭曰: "與郞官同議抄之, 豈盡的實? 退與大臣, 更議抄之。" 上曰: "殘邑宜可更抄。 守令當擇差也。" 又議堤堰事。 光弼曰: "外方堤堰, 當令本道監司糾檢, 豈可爲此遣大臣乎? 監司先巡審修築, 然後他年, 隨後遣大臣看審可也。 名爲堤堰, 而或廢棄, 則民或自占耕食, 此則可禁。" 安瑭曰: "成廟朝, 朴元宗請以堤堰事委戶曺, 使之專掌, 以今見之, 殊不如設局時矣。 外方堤堰, 監司未得一一親審。 祖宗朝設堤堰司, 以掌其事, 而大臣兼之, 必使大臣專掌, 然後庶可糾檢矣。 今雖下諭監司, 久則必至於廢弛矣。" 朴說、南袞、用漑曰: "今雖設局, 未必有弊, 設局爲當。" 又議金世鈞致賻事。 光弼曰: "此則誠如上敎, 果不可致賻也。" 又議減今年田租及往年公債事。 繼孟曰: "若於軍旅之後, 則可減田租, 今若減租, 則國用疎虞, 恐不可也。" 光弼曰: "問民疾苦, 蠲減田租, 皆帝王盛事。 然我國國用甚小, 今年田租, 恐不可減也。 往年公債, 雖可蠲免, 然公債皆爲民儲穀, 以備凶荒, 若儲少而或値凶荒。 則無以救民之飢。 且其不納者, 皆土豪也。 今若蠲免, 豪强者先受恩矣。" 朴說曰: "減田租, 盛事也。 然國用甚少, 百官俸祿亦不足, 今年田租, 不可減也。 但減往年公債, 則民受實惠矣。" 荊山曰: "外方守令欲出解由, 督徵公債, 往年未納者, 皆移錄近年, 今雖蠲減, 民不得蒙實惠矣。 但其中受食後, 或身死、或逃亡, 而徵於一族、切隣者, 則特減似當。" 光弼曰: "有災傷之邑, 遣御史摘奸, 故各官守令, 恐御史下來, 雖有災傷, 率以無災傷施行, 至爲驚愕。 如此則生民尤未蒙實惠矣。" 安瑭曰: "一法立而一弊生, 今遣御史摘奸, 尤有民弊。" 上曰: "不計災傷有無, 竝遣御史, 則似可矣。" 光弼等皆曰: "問民疾苦, 此甚美事。 誠如上敎, 遣御史甚當。" 上曰: "八道不可皆遣, 但於風水之處, 遣御史, 可也。" 又以宋世琳上疏事, 逐條議之。 繼孟曰: "貢賦作紙之事, 已成積弊。 自古不能禁止, 未知何如而可也。" 安瑭曰: "當初立法, 旣已詳密, 更無所爲。" 用漑、千喜曰: "各司庫子以防納爲利, 其弊多矣。" 又以沿海官鹽稅紙, 上納事議之。 光弼曰: "昔紙賤而布貴, 故無弊, 今布賤而紙貴, 故漸至有弊, 令戶曺別爲詳定, 從市直相換, 則可矣。" 安瑭曰: "布一匹, 直冊紙纔一二卷, 須使改定, 可也。" 承旨金安國曰: "無乃古以常紙, 而今納白紙乎? 下該曺詳察後, 詳定何如?" 上曰: "可。" 又議推刷僧徒、焚毁寺刹事。 光弼曰: "今者旣無兩宗僧徒, 又不得興行, 佛敎之衰, 可謂極矣。 何必焚毁寺刹?" 南袞曰: "此乃元、魏毁塔廟之事, 何必一切焚毁乎?" 又議驛馬定價事。 用漑曰: "一馬之價, 幾至五百匹, 此弊可禁。" 光弼曰: "有馬者, 自高其直, 遷延不賣, 驛子不得已優給而買之, 其弊不貲, 申明其法, 可也。" 又議飮食毌得奢侈事。 光弼曰: "此言至當。 前旣行移於各道, 今更申明下諭監司, 可也。" 安瑭曰: "我國奢侈之風已成, 不可易禁。 當自上達下, 內自宮禁, 外及閭巷, 一以儉約爲尙, 不事奢侈, 則庶幾可禁而上之人, 當躬行而導之, 他無可禁之法。" 用漑曰: "下之習俗, 自上而作。" 安瑭曰: "此言當矣。"
【史臣曰: "用漑治第宅, 踰制極侈, 多畜美妾, 各置別第, 計日巡宿, 僕妾以衣服、飮食爭誇美, 用漑日夜淫湎。 安瑭建第於昭格洞, 至爲石柱, 臺諫論之。 二人皆不以節儉自治, 而所言則近似, 可愧。"】
上曰: "上行下效之言, 至當。 果不可以法禁之也。" 又以苞山監 貴福事議之。 光弼曰: "以宗親偸取雞鴨, 罪亦不重, 旣蒙上恩, 何必還發配所乎?" 安國曰: "堤堰, 大事也。 古人有《河渠書》, 重水利也。 戶曺多事, 未能專力於此, 祖宗朝必有計料而設局。 今三公皆入於此, 卽令定議, 何如?" 光弼、用漑等皆曰: "設堤堰司, 甚當。"
- 【태백산사고본】 13책 25권 72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2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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