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 등이 망합의 일·변방 방비책을 논의하다
좌의정 정광필·우의정 김응기·우찬성 신용개·좌참찬 장순손·지중추부사 윤순 유담년·호조 판서 고형산·풍창군(豊昌君) 심형(沈亨)·계림군(鷄林君) 최한홍(崔漢洪)·훈련원 도정 조한손(曹漢孫)·청양군(菁陽君) 유계종(柳繼宗)·이조 참판 심정·병조 참판 이장생·판결사 김극성·첨지중추부사 이윤종(李胤宗) 전오륜(全五倫)·통례원 우통례 서지(徐祉)·홍문관 응교 이빈(李蘋) 등이 망합(莽哈)의 일을 의논하였다, 정광필이 아뢰기를,
"망합이 여기 있을 때에 그 죄를 다스려야 했을 것인데, 지금은 길을 떠나서 시기를 잃었으니 형세가 따라가 처벌하기 어렵겠습니다. 대저 망합의 일은 신 등 여러 사람이 의논하였는데, 이빈과 신의 생각으로는 모두 잡아다가 다른 곳에 구류(拘留) 하든가 또는 멀리 외딴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족친(族親) 중에서 재주와 기량(器量)이 좀 있는 자를 택하여 망합을 대우하던 예절로 대우하고 망합의 죄를 포유(布諭)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정 같은 자는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후일의 말썽이 어찌될지 모른다고 하여 이 두 가지 의견을 나누어 아뢰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만 북도의 병력이 매우 잔약하여 만일 큰일이 있으면 당해내지 못할까 염려되니 천천히 형세를 보아가면서 처리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병사(兵使)로 하여금 비밀히 그 하는 일을 탐지하여 그때 그때 계문하게 하다가 죄악이 심해진 다음에 도모함이 사체에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또 북도 병사도 정밀히 택해서 보낸 후에라야만 응변(應變)하고 무어(撫御)하는 도리가 합당하게 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망합이 사납고 거만하니, 그 성낸 일을 버려두고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있을 때에 죄를 다스렸어야 될 것인데, 어제야 그 일을 계주하여 곧 의논을 모으려 하였지만 날이 저물어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방법은 먼저 이편의 형세를 굳건히 하고서 응하는 것이니, 심정 등의 의논이 가하다. 또 북도 병사는 전에 헌부의 계청으로 인하여 대신에게 물었는데, 이 사람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문신 중에는 알 수 없지만 무신에게서는 이런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다. 헌부에서는 남방에서 패군(敗軍)한 일만 가지고 말을 하지만 경오년의 일023) 은 뜻밖에 생긴 일이니, 이것을 가지고 문책할 수는 없다. 빨리 부임해야 함이 가하다."
하였다. 정광필 등이 또 의논드리기를,
"만일 불의의 일이 있게 되면 오진(五鎭)024) 에 이미 군량이 다 되었으니 형세가 지탱할 수 없고 다른 도의 곡식을 옮겨가기에도 또한 어려우니 둔전(屯田)을 하여 양곡을 저축함만 같지 못합니다. 들은즉 고원(高原)·경성(鏡城) 등지에 비워 둔 넓은 땅이 많다 하니, 청컨대 둔전을 하고 또 착한 사람을 얻어 위임하소서."
하고, 호조 판서 고형산은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함경도에 있어서 그 도의 일을 좀 압니다. 그 도에서 군량으로 하는 피곡(皮穀)이 모두 90여 만 섬인데 지금 회계의 수량을 보면 다만 30여 만 섬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민간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 군량을 계산하면 1∼2개월 사용할 것도 못됩니다. 둔전은 과연 상책이 되겠습니다. 홍원(洪原)·경성에 모두 둔전하는 곳이 있지만 농군(農軍)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병조로 하여금 그 도의 유진(留鎭)하는 정병(正兵)025) 중에서 뽑아 정하게 해야 합니다. 다만 지금 여기서 멀리 생각만하여서는 정병의 실제 수효를 정확히 알지 못할까 염려되니, 청컨대 그 도에 공문을 보내어 그 허실(虛實)을 알아서 처리하게 하소서. 다른 도에서 이전하는 폐해가 매우 크니, 부득이 본도에서 양곡 저장하는 계책을 하여야 할 것인즉, 모름지기 금년 중에 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광필 등이 또 아뢰기를,
"함경도 백성으로 임신년026) 흉년 후에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로 유이(流移)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만일 본도가 비어 있다면 남쪽의 백성을 옮겨다 살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본도 사람으로서 타처에 유이한 사람은 불가불 쇄환(刷還)하여야 하겠지만, 만일 이접(移接)한 곳에서 찾아내어 데려가는 것은 소요할 것 같으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도의 예전 살던 곳에 알아보면 이접한 곳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혹 장사하는 사람을 따라 서울에 와서 사는 사람도 또한 많다고 합니다. 본도 및 유이한 곳에 글을 내려보내되, 그 기한을 멀리하여 오는 가을을 기다려 쇄환하게 함이 매우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각도의 추쇄(推刷)하라는 계본(啓本)을 병조에 내려보낸다면, 일 많은 관청이므로 즉시 거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미 입거청(入居廳)027) 을 설치하였으니, 입거청에 내려보내어 속히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고, 또 정부에 묻기를,
"대간(臺諫)이 완천정(完川正)의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니, 선원록(璿源錄)에 환록(還錄)함이 미편하다고 한다. 일찍이 대신들에게 묻고자 하였는데 지금 마침 와서 모여 있으므로 묻는다."
하매, 정광필 등이 아뢰기를,
"그 상언(上言)으로 보아서, 죄가 그렇게 중한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신 등이 일찍이 환록하기로 의논하여 아뢰었습니다. 그 죄의 경중은 신 등이 처음에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미 발병되었다면 환삭(還削)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정광필 등이 또 아뢰기를,
"변방의 일을, 성식(聲息)이 없다 하여 그만 비어(備禦)의 준비를 해이(解弛)함은 매우 불가합니다. 그런데 근래 남방의 백성들이 지극히 곤폐(困幣)하여, 친히 그 도의 형편을 본 유담년·유계종 같은 이들이 모두 지금에 있어서는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번(番)을 나누어 갈아서 일하게 하여야 한다 합니다. 관찰사 홍숙(洪淑)이 지금 내려가게 되니, 좌·우 병사와 함께 의논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번을 나누어 쉬게 하라는 일로 친교(親敎)하시어 보냄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또 정광필 등에게 전교하기를,
"근일 헌부의 계목(啓目)을 본즉 서얼(庶孽)이 유생(儒生)을 구타해서 상하게 하였다 하므로 이미 형추하도록 명하였다. 다만, 성균관의 유생 90여 인이 서로 힐난하였다 하니, 선비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한 것 같다. 내 생각은 유생을 그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니, 여럿이 아뢰기를,
"유생으로서 닭이나 오리를 훔치다가 혹 그 주인에게 잡히게 되면 웃으면서 달아나는 일은 신 등이 선비였을 때에도 간혹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이 선비의 무리가 매우 잘못하였다 하더라도 유생을 상해하는 것만은 지극히 잔혹한 일이니, 그 죄를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근일 들은즉 유생들의 과실을 장관이 학벌(學罰)028) 로 이미 예조에 보고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아뢰기를,
"그 서얼은 곧 신의 아내의 서육촌(庶六寸)입니다. 서로 싸운 송사가 정랑(正郞) 신한(申瀚)에게 돌아왔는데, 신한은 곧 신의 아들이라 상피가 되므로 곧 다른 사람에게 이관하였으며 신 또한 피혐 관계로 아직까지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들의 소위가 모두 잘못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생 등이 닭·오리를 약취(掠取)하는 일은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도 혹 들었다. 지금 이 유생을 상해한 일은 자연 그죄가 있을 것이며 유생 또한 과실이 없지 않다. 성균관의 사장(師長)을 항상 택하여 보내는데, 구독(句讀)의 공부만을 가르치고 덕행으로 권면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평상시의 교양에 덕행을 우선한다면 후일의 사업에 이행할 수 있을 것이요, 이런 불미한 일 또한 감히 방자히 하지 못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사장이 교훈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 하겠다."
하니, 여럿이 아뢰기를,
"근본을 바로한다는 말이 과연 상교와 같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4면
- 【분류】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병참(兵站) / 군사-지방군(地方軍) / 농업-전제(田制) / 상업-상인(商人)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호구-이동(移動)
- [註 023]경오년의 일 : 1510 중종 5년 여름에 삼포(三浦:동래 부산포〈東萊富山浦〉·웅천 제포〈熊川薺浦〉·울산 염포〈蔚山鹽浦〉)의 왜관(倭館)에 와서 살던 일본인들이 대마도(對馬島)와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데, 이를 삼포 왜란(三浦倭亂)이라 한다.
- [註 024]
오진(五鎭) : 북쪽 변방의 5개 진. 북방의 여러 진은 모두 세종조(世宗朝)에 새로 설치한 것으로 육진에서 남쪽의 부령(富寧)을 제외한 종성(鍾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온성(穩城)을 말한다.- [註 025]
정병(正兵) : 장정으로 군역(軍役)에 복무하는 자.- [註 026]
○左議政鄭光弼、右議政金應箕、右贊成申用漑、左參贊張順孫、知中樞府事尹珣ㆍ柳聃年、戶曹判書高荊山、豐昌君 沈亨、雞林君崔漢洪、訓鍊院都正曺漢孫、菁陽君 柳繼宗、吏曹參判沈貞、兵曹參判李長生、判決事金克成、僉知中樞府事李胤宗ㆍ全五倫、通禮院右通禮徐祉、弘文館應敎李蘋等, 議莽哈事。 光弼啓曰: "莽哈在此時, 當治其罪, 今已發程, 已失事機, 勢難追討矣。 大抵莽哈事, 臣等僉議, 則如李蘋及臣意, 皆欲捉來, 拘留他處, 或遠流絶島, 而擇其族親中稍有才器者, 待以待莽哈之禮, 而布諭莽哈之罪, 則似可矣。 如沈貞則以爲: ‘自我先動, 則後日釁端, 恐或難測’云。 此兩意, 欲分別啓之, 而但北道兵力甚殘弱, 脫有大事, 恐不能支, 徐觀其勢而圖之。 又使兵使, 僭候所爲, 隨卽啓聞, 至於罪盈惡極而圖之, 甚合事體。 且北道兵使, 亦須精擇而送之, 然後應變撫御之道, 可得其宜矣。" 傳曰: "莽哈桀鷔, 發怒之事, 不可置而不論也。 然及其在此, 而治罪則可矣, 而昨日始啓其事, 卽欲議得, 而日晩未果。 大抵待夷之道, 先固在我之勢而應之, 其如沈貞等議, 可也。 且北道兵使, 前因憲府之啓, 而問于大臣則曰: ‘無踰於此人者。’ 予意亦以爲, 於文臣中則未知也, 武臣則如此之人, 必不易得。 憲府但以南方敗軍之事爲言, 然庚午之事, 出於不意, 不可以此責之, 使之速赴, 可也。" 光弼等又議曰: "若有不意之事, 則五鎭已乏軍糧, 勢不能支移轉他道之穀亦難, 不如爲屯田而儲穀。 聞, 高原、鏡城等處, 多有閑曠之地, 請爲屯田, 又得善人以委任之。" 戶曹判書高荊山啓曰: "臣久在咸鏡道, 稍知其道之事。 其道軍糧皮穀, 幷九十餘萬石矣。 今見會計之數, 只三十餘萬石, 其餘皆散在民間。 計其軍糧, 則亦不能周一二朔之費, 屯田果爲上策也。 洪原、鏡城皆有屯田之處, 但農軍甚難, 宜令兵曹, 抄定其道留鎭正兵矣。 但在此遙度, 恐未的知正兵之實數, 請行移其道, 知其虛實而處之。 他道移轉之弊甚鋸, 不得已於本道, 爲儲穀之策, 則須及今年爲之。" 光弼等又啓曰: "咸鏡道百姓, 於壬申年凶荒之後, 流移於江原、黃海等道者甚多。 本道若空虛, 則至移南方之民以實之, 況以本道之人而流移他處, 不可不刷還。 若推刷於移接之處, 似乎騷擾, 不可爲也。 推於本道舊居之處, 則可知移接之處。 或隨商買之人, 來居於京者亦多云, 須下書于本道及流移之處, 遠期其限, 竢來秋刷還甚可。 且各道推刷啓本, 若下于兵曹, 則事繁之司, 未卽擧行。 今已設入居廳, 請下入居廳, 使速施行。" 傳曰: "可。" 且問于政
府曰: "臺諫以完川正罪關宗社, 而還錄於《璿源》, 未便云。 曾欲問于大臣等, 而今適來會, 故問之。" 光弼等啓曰: "觀其上言, 其罪似不至重, 故臣等曾以還錄議啓。 但其罪之輕重, 臣等初未詳知, 若已發明, 則似不可還削矣。" 傳曰: "知道。" 光弼等又啓曰: "邊鄙之事, 以其無聲息, 而輒弛備禦之具, 甚不可。 然近來南方之民, 至爲困弊。 親見其道事勢者, 如柳聃年、柳繼宗等皆以爲: ‘今則其留防軍士, 宜可分番遞立。’ 觀察使洪淑, 今當下去, 與左右兵使同議, 使軍士分番休息事, 親敎而送之, 何如?" 傳曰: "可。" 又傳于光弼等曰: "近見憲府啓目, 庶孽之人打傷儒生云, 已命刑推矣。 但成均館儒生九十餘人, 與之相詰云, 士習似不美矣。 予意非以儒生爲非, 欲使大臣等知之耳。" 僉啓曰: "儒生偸搏鷄鴨, 或被執於其主, 笑而走出, 臣等爲儒時, 亦或有之。 今此儒輩, 雖甚失之, 但傷害儒生, 至爲殘酷, 不可不痛治其罪矣。 臣近聞, 儒生等所失, 長官以學罰, 已報于禮曹云。" 申用漑啓曰: "其庶孽之人, 卽臣之妻孽六寸也。 相鬪之訟, 歸于正郞申瀚之房, 瀚卽臣之子也。 以其相避卽移他房, 臣亦以避嫌, 故未敢啓之。 但彼人等所爲, 皆失矣。" 傳曰: "儒生等掠取鷄鴨之事, 予在潛邸, 亦或聞之。 今此傷害儒生, 自有其罪, 而儒生亦不無其失。 成均館師長, 常爲擇送, 而徒敎句讀之學, 不以德行勉之, 則亦何益乎? 常時敎養, 以德行爲先, 則後日可措諸事業, 如此不美之事, 亦不敢肆矣。 予意以爲, 師長之失其敎訓, 而然耳。" 僉啓曰: "端本之言, 果如上敎。"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5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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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