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 등이 홍문관의 차자로 인하여 사직을 청하다
"근일에 재변이 겹쳐서 나타나니, 비록 임금께서 하문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재변을 그치게 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전일에 하문을 받고도 개진(開陳)하지 못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네, 네, 하면서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마땅히 지혜가 밝고 사리에 통달한 선비를 가려서 그들과 더불어 정치를 해야 할 것이니, 신 등은 사직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신은 이런 중요한 임무를 받아 항상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는데, 홍문관에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과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또한 기운이 쇠약하여 임무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 사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대신을 불러 보려고 하니, 승지(承旨)는 홍문관의 차자와 전일 간원(諫院)의 상소를 조목조목 친히 아뢰라."
하였다. 유순 등이 입시(入侍)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의 재변은 보통 일이 아닌데 그 폐단을 구제할 방법이 없겠는가?"
하였고, 승지 이자화(李自華)가 차자를 다 읽자 유순이 아뢰기를,
"차자에 ‘백성이 다 소복(蘇復)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대저 조정의 정령(政令)이 여러 갈래로 나와서 아랫사람이 봉행(奉行)하지 못한 때문에 백성이 소복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이 된것입니다. 또 폐조(廢朝) 때로부터 유이(流移)하는 백성이 매우 많았는데, 지금 비록 점점 직업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6∼7년 사이에 어찌 예전과 같이 되겠습니까? 금년의 재변은 근래에는 없었던 것인데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하늘이 반드시 먼저 재변을 보여줌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고쳐서 선이 되도록 하고, 재앙을 고쳐서 상서(祥瑞)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대저 형정(刑政)330) 을 너무 가혹하고 포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조정에 중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또한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공죄(公罪)를 범했더라도 그 정상이 징벌(懲罰)할 만한 것은, 옛날에는 혹 대신에게 물어서 이를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형정은 비록 각박하고 포악해서는 안 되지마는 느슨하고 해이(解弛)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정광필은 아뢰기를,
"차자에 ‘예의(禮義)가 밝지 못하다.’고 했는데 대저 예의는 반드시 사대부에서 근원하여 미천한 백성이 이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세가(世家)331) 에 이르기까지, 그 어버이가 죽은 날에도 문득 전지(田地)를 다투게 되어 반드시 시비가 있게 되는데, 이러한 자는 마땅히 엄격하게 죄를 다스려서 중외(中外)의 백성에게 보여주어서 그 나쁜 짓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징계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염치가 없어졌다.’고 했는데, 지금 장죄(贓罪)를 다스리는 법은 또한 엄격합니다. 그러나 다만 관청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만 장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도리어 국고(國庫)의 물건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스스로 수납(收納)하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이같은 사람은 마땅히 엄격히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지위와 명망이 높고 현달한 사람이 술을 함부로 마시고 위의(威儀)를 어지럽히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어느 누구임을 지적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같은 사람이 있으면 대간은 스스로 마땅히 풍문(風聞)에 의해서 규거(糾擧)해야 할 것입니다. 또 주(周)나라 때의 육경(六卿)은 10년이 되도록 천직(遷職)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의 육경은 자주 체직하게 되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문관(文官)으로서 육시(六時)·칠감(七監)332) 이 된 사람은 그들의 생각에, 자신이 이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는 전혀 사무를 다스리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신은 그 구제할 방법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인사가 세상에서 잘못되면 천변이 위에서 감응하는 것이니, 상하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직무에 힘쓰고 화목한다면 재이(災異)를 소멸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주 조계(朝啓)와 상참(常參)333) 을 하고, 또 경연에 부지런히 나아가서 정치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정사에 힘쓰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옛날에는 판결사(判決事)를 엄선(嚴選)하여 오랫동안 사무를 맡겨 3∼4년까지 송사를 판결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판결사는 원망의 소지(素地)라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를 꺼리니, 마땅히 엄선하여 임명해야 하며, 승지와 부제학(副提學)과 같은 관직 이외에는 천직하지 못하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사무를 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근일에 왜인(倭人)을 전부 제포(薺浦)에서 접대하게 되니 역로와 각 고을에서 연향(宴享)하는 폐해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세히 듣건대 부산포(釜山浦)의 객관(客館)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하오니, 이를 보수하여 나누어 접대하도록 하소서."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대마도의 과실이 매우 크지만 매양 이 일로써 죄책을 돌릴 수는 없으며, 그 감(減) 한 쌀과 콩이 많지 않으니 종전대로 주어서 나라의 은혜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호구-이동(移動) / 가족-가산(家産)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재정-국용(國用)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註 330]형정(刑政) : 죄인을 다스리는 정사.
- [註 331]
세가(世家) : 대대로 국록(國祿)을 타먹는 집안.- [註 332]
육시(六時)·칠감(七監) : 조선 초기에 육조(六曹) 이외의 중앙의 관아를 통틀어 일컬은 것. 육시는 봉상시(奉常寺)·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사섬시(司贍寺)·예빈시(禮賓寺)이고, 칠감은 군자감(軍資監)·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선공감(繕工監)·사재감(司宰監)·제용감(濟用監)이다.- [註 333]
상참(常參) : 매일 종친부(宗親府)·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중추부(中樞府)·의빈부(儀賓府)·돈령부(敦寧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각 1원(員)과, 경연(經筵)의 당상관·당하관 각 2원이 윤차(輪次)로 임금에게 일을 아뢰는 것. 의정부·육조의 당직 감찰(監察)도 참석한다. 뒤에는 반드시 매일 행해지지는 않았다.○鄭光弼、金應箕啓曰: "近者災變疊見, 雖不下問, 當講究弭災之方, 而前承下問, 未有開陳。 弘文館以爲, 唯唯不言, 此論宜矣。 當擇明達之士, 與之圖治, 臣等請辭。" 柳洵啓曰: "臣受此重任, 常未安于懷。 弘文館以爲未能格正, 未知聖躬之闕失, 其何能格正乎? 臣又衰耗, 不能堪任, 請辭。" 傳于政院曰: "今欲引見大臣, 承旨以弘文館箚子, 與前日諫院上疏, 條條親啓。" 柳洵等入侍, 上曰: "近日災變非常, 其無救弊之方乎?" 承旨李自華讀箚子訖, 柳洵曰: "箚子云: ‘民生未盡蘇復’ 夫朝廷政令多端, 下人或有不能奉行, 故民生之不蘇, 自爾如此。 且自廢朝, 民之流移者甚多。 今雖稍稍還業, 而六七年間, 豈能如故乎? 今年災變, 近古未有。 治亂、安危, 天必先示之, 欲使其變惡爲善; 轉災爲祥也。 夫政刑, 過於苛暴, 不可也。 然於朝廷之上, 有犯重罪者, 亦不可不治。 雖犯公罪, 其情之可懲者, 古則或問於大臣以治之。 臣意以爲 ‘刑政雖不可刻暴, 而不可使至於緩弛也。’" 鄭光弼曰: "箚子曰: ‘禮義不明’, 夫禮義, 必原於士大夫, 下民效而則之。 今上自宗室, 下及世家, 當其親死之日, 輒爭田民, 必有一是一非者。 當痛治, 以示中外百姓, 使其爲惡者, 有所懲戒, 可也。 又曰: ‘廉恥道喪。’ 今之治贓之法, 亦嚴矣。 然不特盜官物爲贓, 亦有欲要譽於民, 反以國庫之物, 散給百姓, 不自收納者。 如此人, 所當痛治也。 又曰: ‘位望尊顯者, 縱酒亂儀。’ 不知指某人而言之。" 若有如此之人, 則臺諫, 自當風聞糾擧。 且周時六卿, 至有十年不遷者, 而今之六卿, 頻數遞之, 甚不可也。 文官爲六寺七監者, 其心以爲, ‘吾不久在於此, 專不治事者有之’, 臣未知其所以救也。" 金應箕曰: "人事失於下, 則天變應於上。 上下相與同寅協恭, 則災異可得而消矣。 數爲朝啓、常參, 又勤御經筵, 講求治道, 亦勤政之一端也。" 柳洵曰: "古者, 極選判決事而久任, 至於三四年, 使之決訟。 今則不然, 以判決事爲聚怨之地, 人皆憚之。 當極選差除, 如承旨副提學外, 勿使遷轉, 使之久任, 可也。" 應箕曰: "近者, 倭人一切接待於薺浦, 驛路及各官宴享, 其弊不貲。 詮聞, 釜山浦客館, 不至破毁, 請令修補, 分爲接待。" 柳洵曰: "對馬島所失甚大, 然不可每以是歸責。 其所減米太不多, 當依舊還給, 以示國恩。"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4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호구-이동(移動) / 가족-가산(家産) / 과학-천기(天氣) / 인사-임면(任免)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재정-국용(國用) / 외교-왜(倭)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사법-재판(裁判)
- [註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