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 11월 15일 계유 1번째기사 1514년 명 정덕(正德) 9년

조강에서 사간원의 상소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사간(大司諫) 최숙생(崔淑生)·지평(持平) 소세량(蘇世良)이 전의 일을 논계하고, 최숙생이 또 아뢰기를,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이 분관(分館)305) 되면 반드시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306) 를 해야 하는데, 정응(鄭譍)은 이 예를 행하지 않고서 갑자기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으니 미편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四館)307) 의 옛 풍속은 비용만 허비하는 외람된 일로서 유폐(流弊)가 습속을 이루어 치화(治化)를 크게 손상시켰으니 간관된 사람은 마땅히 혁파(革罷)하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도 최숙생이 이와 같이 외람되게 아뢰었으니, 번세(煩細)한 것만 살피고 대간의 대체는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최숙생이 또 아뢰기를,

"근래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적지 않으니 모름지기 자주 신하를 불러들여 물어서 정치하는 방법을 헤아려 정한 후에야 상하(上下) 사이에 정의(情義)가 서로 통하고 일에 막힘이 없게 되어, 폐정(弊政)을 제거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한 사람도 모두 말없이 물러가고 있으니, 반드시 위에서 성의(誠意)를 미루어 말듣기를 좋아한 후에야 아랫사람이 또한 말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지금의 문사(文士)는 폐조(廢朝)의 여화(餘禍)를 두려워하여 문학을 숭상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배양(培養)한 후에야 흥기하게 될 것입니다. 또 침체(沈滯)된 사람을 천용(薦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추천된 사람은 모두가 현달(顯達)한 사람이니, 침체되어 현달하지 못한 사람 중에 어찌 그 적임자가 없겠습니까? 비록 문신은 아닐지라도 조금이라도 재주와 행실이 있는 사람은 또한 천용(薦用)할 수 있습니다. 근래 탐풍(貪風)이 크게 유행하고 있으니, 청백리(淸白吏)를 표창하고 상(賞)을 주어서 그들을 면려(勉勵)시킨다면 염치(廉恥)를 아는 기풍이 흥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재변을 만난다면 마땅히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그 성경(誠敬)을 다한 후에야 하늘에 응하여 화를 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상소(上疏)하는 것을 보통으로 보고서 다시 유념하지 않고 으레 유사(有司)에게 물으면, 유사는 문득 고례(古例)에 따라 방지하게 되니 나라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바가 지당하다. 지금 간원의 상소(上疏)는 마땅히 대신에게 친히 물어서 의논하여 정하겠다."

하였다. 상이 의정부(議政府)·부원군(府院君)·육경(六卿)을 인견하매, 승지(承旨) 이항(李沆)이 사간원의 상소 제 1조 학교에 관한 것을 진독(進讀)하니, 부원군 송일이 아뢰기를,

"근래의 유생은 성균관(成均館)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단령(團領)308) 도 입지 않으니, 이같은 습관은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생을 대우하는 데는 법제(法制)로써 대우할 수는 없으니, 재상(宰相)된 자가 먼저 그 자제(子弟)들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성균관에 있도록 한다면, 지방의 유생들도 거의 이를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정광필은 아뢰기를,

"사장(師長)을 시관(試官)으로 삼아 선비를 뽑아야 한다는 설(說)은 마침내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혹 집요(執拗)한 사람이 있어 자기의 소견(所見)을 고집하는 일이 있다면, 어찌 그 사정(私情)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정시(庭試)의 일은 비록 혹 시험하더라도 서책(書冊)으로써 상을 주는 것은 가하거니와 일정한 규정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우의정 김응기는 아뢰기를,

"어진 사장(師長)을 얻으면 유자가 모두 마땅히 본받게 될 것입니다. 성종조(成宗朝)에는 사유(師儒)에 합당한 사람을 사학(四學)에 오랫동안 임명하여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우위(右位)에 서용했으니, 지금도 그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교회(敎誨)에 전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인재(人才)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인재를 양육하는 데는 학교만한 것이 없는데, 이 일은 시종과 대간이 매양 말하고 있는데도 또한 시행한 바가 없었으니 지금 다시 의논함이 옳겠다."

하매 형조 판서 강혼이 아뢰기를,

"윤차(輪次)하는 당상(堂上)을 설치하는 것은 권장(勸奬)하려는 것입니다. 단지 제술(製述)만을 과(課)하고 강론은 하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3순(旬) 내에 2순은 강론하여 의리의 근원과 효제(孝悌)의 도리를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제 2조의 상고(商賈)를 억제해야 한다는 일에 대하여는 우찬성(右贊成)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태평한 세상이 오래 계속되어 인구(人口)가 번성(繁盛)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또 지방에서 부역(賦役)을 도피(逃避)한 사람도 또한 서울에 모여들어서 골목마다 시장(市場) 아닌 곳이 없으니, 만약 예전부터 있던 시장이 아닌 것은 일체 금지시킨다면 저절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전(金詮)은 아뢰기를,

"상고가 성한 것이 이 같은 까닭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을 침해(侵害)하여 직업에 안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비록 조세(租稅)를 감(減)해 주고 부역을 면제해 주더라도 백성이 은택(恩澤)을 입지 못하는 것은 모두 수령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업(本業)을 저버리고 말업(末業)을 따르는 것은 금지시키는 것이 당연하지마는, 그러나 일체 금지하면 백성이 혹 직업을 잃게 되어 원망과 번민(煩悶)을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해사(該司)가 스스로 금지시킬 것이요, 법을 제정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제 3조의 문학의 일에 대하여는 신용개가 아뢰기를,

"지금의 사가 독서(賜暇讀書)하는 인원(人員)을 각사(各司)로 하여금 추심(推尋)하게 하지 말고, 만약 긴요한 일이 있으면 체직시켜 한직(閑職)으로 옮겨서 그로 하여금 전업(專業)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대우하는 방법은 모두가 성상의 장려하는 데에 있으니, 자주 내사(內使)를 보내어 위로하고 면려(勉勵)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고, 김응기는 아뢰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은 대간 외에는 다른 관직에 임명하지 않았으며, 성종조(成宗朝)에도 또한 이와 같이하여 하는 일에 전심하게 하였는데, 지금 홍문관의 관원을 이조·병조의 낭관(郞官)으로 추천 주의(注擬)하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였다. 제 4조의 수령에 관한 일에 대하여는 김응기가 아뢰기를,

"시종(侍從)에 있는 사람을 수령으로 임명한다면 온 고을이 은덕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물(人物)에 한정이 있으니, 군덕(君德)을 보좌하는 사람을 외직(外職)에 임명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종에 있는 신하도 간혹 임명하여 보내는 것은 무방하다."

하매,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시종하는 신하를 모두 외임에 임명하면 외방을 중시하는 것이 됩니다. 내직과 외직의 임무는 서로 다릅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도 있고 임금을 잘 보좌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 재주에 따라 임명하는 것이 가합니다. 시종하는 신하를 외관에 많이 보직시킨다면 아마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적을 듯합니다."

하고, 신용개는 아뢰기를,

"옛날의 문사(文士)는 수령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비록 어버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도 외직을 많이 구하니, 이 관습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하였다. 제 5조의 염치의 일에 대하여는 우참찬 이계맹이 아뢰기를,

"지금 비록 탐오한 자는 도태(淘汰)시키고 있으나 아직 청백리(淸白吏)를 천거하여 임용하지는 않고 있으니, 모름지기 포장(褒奬)하여 권려(勸勵)하는 법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제 6조의 사필(史筆)의 일에 대하여는 송일이 아뢰기를,

"외사(外史)를 만들려는 의논이 있은 지 오랩니다. 옛날에는 야사(野史)가 있었는데, 지금 만약 마지못해서 하게 된다면 도사(都事)는 할 수 있어도 수령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 만드는 일은 경솔히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전에도 또한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록 많이 겸직(兼職)시킬 수는 없지마는 한 도(道)안에 1∼2원(員)을 겸차(兼差)시키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가려서 임명한다면 그 적임자를 얻을 수가 있겠지마는, 만약 수대(數代)를 지나면 점차로 사람을 잃게 될 것으로 그 폐해가 더욱 클 것이니 전대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신용개는 아뢰기를,

"옛날에는 한일(閑逸)한 사람이 스스로 야사를 지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국가에서 법을 제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쓰도록 한다면 집필(執筆)하는 사람이 모두가 공정하지는 않아서 시비가 실상을 잃게 될 것이니, 더욱 불가할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박열은 아뢰기를,

"외방 풍속의 좋고 나쁜 것을 기록하여 유전(流傳)시킨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울의 겸춘추(兼春秋)도 또한 사실을 기록하는 일에 힘쓰지 않으니, 비록 외방에다 이를 설치하더라도 한갓 겉치레만 될 듯합니다."

하였다. 제 7조의 사치의 일에 대하여는 상이 이르기를,

"사치의 습관을 금지하고 혁파해야 된다는 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른바 상의원(尙衣院)의 이엄(耳掩)과 초록색(草綠色)의 일은, 전례에 따라 만든 것이고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하니, 송일·정광필·김응기 등이 아뢰기를,

"이는 비록 작은 일이나 크게 습속에 관계되니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제 8조의 금주령에 대하여는 송일·정광필 등이 아뢰기를,

"재변(災變)을 만나 하늘을 공경할 때에는 비록 위에서 술을 금지하지마는 아랫사람은 술을 마시니,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제 9조의 법령의 일에 대하여는 예조 판서 권균(權鈞)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대전(大典)》의 법을 준수하여, 견고하기는 금석(金石)과 같이 하고 미덥기는 사시(四時)와 같이 한다면 백성이 모두 이를 믿겠지마는, 만약 자주 고친다면 관리는 법을 지킬 줄 모르게 되고 백성은 법을 범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아뢰기를,

"해사의 공사(公事)가 문득 윤허되면 이것이 마침내 법조가 됩니다. 만약 새로 제정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어서 그 가부를 정한 후에 시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제 10조의 음사(淫祀)의 일에 대하여는 상이 이르기를,

"무격(巫覡)309) 의 풍속이 자못 성행하는 듯하니 법사(法司)가 금단할 것이고, 소격서(昭格署)310) 의 일은 비록 부정(不正)한 것 같지마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다."

하니, 신용개가 아뢰기를,

"소격서의 일은 매우 황당무계하니, 만약 법사로 하여금 금단시킨다면 상의 덕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또 기신재(忌晨齋)311) 때에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혼령을 욕되게 하니, 옳음은 없고 해만 있습니다. 과감히 금단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송일 등도 또한 모두 혁파해야 된다는 뜻을 극론하였다. 승지 이항(李沆)은 아뢰기를,

"옛날에 선조(先祖)를 받드는 곳은 종묘뿐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문소전도 있고 또 능침(陵寢)의 삭망제(朔望祭)도 있으니 성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기신재는 혁파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날 상이 몸소 의논한 것은 당시에 성대한 행사라고 하였지마는, 그러나 억지로 한것이고 허심 탄회하여 즐겨 듣기를 좋아하는 성의(誠意)를 볼 수가 없으므로, 인심을 감동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논이 기신재에 미치자 상이 홀로 어렵게 여기면서 혁파하지 않았고, 의논이 《후속록(後續錄)》에 미치자 송일·정광필·김응기 등은 모두 그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 그 법조의 방애(妨礙)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건백(建白)한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을 따르고 고치기를 꺼리었다. 상하(上下)가 서로 실수했으므로, 임금이 친히 의논했다는 이름은 있으나 건의(建議)한 실상은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무익함을 비난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1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의생활-상복(常服)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호구-이동(移動)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상업-상인(商人)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305]
    분관(分館) :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성균관·교서관의 삼관(三館)에 분속(分屬)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 분관을 하는 데는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일렬(一列)로 적어서, 박사(博士) 세 사람으로 하여금 채점케 하여 3점은 승문원, 2점은 성균관, 1점은 교서관에 보내는데 다시 이를 승문원의 도제조(都提調)와 수정하여, 이조가 계품(啓稟)하여 삼관에 입속시킨다. 그리고 점수를 얻지 못한 사람은 후방(後榜)을 기다리는데 이를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고 한다.
  • [註 306]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 : 허참례는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구관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예이다. 이로부터 상종(相從)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신관원(新官員)의 오만을 없앤다는 풍속이며, 다시 10여 일 뒤에 면신례를 행해야 비로소 구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면신례는 새로 출사하는 관원이 허참례를 닦은 뒤에 다시 구관원을 청하여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일을 말한다.
  • [註 307]
    사관(四館) : 성균관·예문관·승문원(承文院)·교서관(校書館)의 통칭.
  • [註 308]
    단령(團領) : 갓을 둥글게 만든 공복(公服).
  • [註 309]
    무격(巫覡) : 무당과 박수.
  • [註 310]
    소격서(昭格署) : 하늘·땅·별에 지내는 도교(道敎)의 초제(醮祭)를 맡은 관아(官衙).
  • [註 311]
    기신재(忌晨齋) : 기일(忌日)에 불공을 드려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비는 일.

○癸酉/御朝講。 大司諫崔淑生、持平蘇世良論啓前事。 淑生又曰: "新及第分館, 必爲許參免新之禮。 鄭譍不行此禮, 而遽授弘文館正字, 未便。" 皆不允。

【史臣曰: "四館古風, 糜費恣淫, 流弊成習, 大傷治化。 爲諫官者, 所當請革, 而淑生瀆啓如是, 可謂察於煩細, 而不知臺諫之大體也。"】

淑生又曰: "近來, 天災時變不小, 須屢爲延訪, 商確治道, 然後上下之間, 情意交孚, 而事無壅滯, 可以祛弊政, 而弭災沴矣。 近來入侍經筵者, 亦皆無言而退, 必自上推誠樂聞, 然後下人亦樂爲之言矣。 今之文士, 怵於廢朝餘禍, 不尙文學, 須培養然後, 庶乎興起矣。 且沈滯之人, 有薦用之命, 而所薦, 乃皆顯達之人。 沈而未達者, 豈無其人? 雖非文臣, 少有才行者, 亦可薦用也。 近來貪風大行, 淸白之吏, 褒而賞之, 使之勉勵, 則廉恥之風, 庶可興矣。 若遇災變, 則當恐懼修省, 盡其誠敬而後, 庶乎應天召禍矣。 凡所上疏, 視爲尋常, 不復留念, 例問于有司, 有司輒因古例防之, 何補於國乎?" 上曰: "所言至當。 今諫院上疏, 當與大臣, 親問議定也。" 上引見政府、府院君、六卿。 承旨李沆, 將諫院上疏, 進讀第一條學校之事, 府院君宋軼曰: "近來儒生不肯居館, 不著團領, 如此之習, 不可不革。 然待儒生, 不可待以法制, 爲宰相者, 先敎其子弟, 使居于館, 則外方之儒, 亦庶幾效之矣。" 左議政鄭光弼曰: "以師長爲試官, 取士之說, 終必有弊。 或有執拗之人, 偏執所見, 則豈無其私乎? 庭試事, 雖或試之, 賞以書冊則可也, 不可立爲恒規也。" 右議政金應箕曰: "師得賢, 則儒者皆當取法。 成宗朝師儒可當之人, 久任於四學, 陞秩右敍, 今可依此例, 專其敎誨。" 上曰: "大抵治國, 無如人才; 養育人才, 莫如學校。 此事, 侍從、臺諫每言之, 而亦無所施, 今可更議。" 刑曹判書姜渾曰: "輪次堂上之設, 所以勸奬也。 只課製述, 而不爲講論, 自今三旬內, 二旬講論, 俾論義理之源、孝悌之道, 使之感激, 何如?" 至第二條抑商賈之事, 右贊成申用漑曰: "昇平日久, 生齒繁盛, 故如是耳。 且外方逃賦之人, 亦聚于京師, 曲坊委巷, 無不出市, 若非舊市, 一切禁之, 則自可歸農矣。" 兵曹判書金詮曰: "所以商賈之盛如此者, 各官守令侵苦百姓, 不令安業故也。 國家雖減租蠲賦, 民未蒙澤, 皆守令之故也。" 上曰: "背本逐末, 禁之爲當。 然一切禁之, 民或失業, 致其冤悶矣。 該司自禁, 不必立法也。" 至第三條文學之事, 用漑曰: "今之賜暇人員, 使各司毋得推尋, 若或事緊。 則遞之遷閑, 使之專業, 何如? 其待之之道, 皆在睿奬, 屢遣內使, 慰勉可也。" 應箕曰: "世宗朝, 集賢殿官員, 臺諫外, 不除他官, 成宗朝亦如之, 俾之專業。 今則以弘文館官員, 薦注吏、兵曹郞官, 甚爲不可。" 至第四條守令之事, 應箕曰: "以侍從之人, 除守令, 則一邑蒙澤矣。 然人物有限, 輔君德之人, 不可除外也。" 上曰: "侍從之臣, 間或差遣, 不妨也。" 金詮曰: "侍從之臣, 盡除外任, 則外重矣。 內外之任有異, 有能治民者、有能輔君者, 隨其才而任之, 可也。 以侍從之臣, 多補外官, 則恐少輔君之臣也。" 用漑曰: "古者文士, 恥爲守令。 今也, 雖非爲親, 亦多求外, 此習不美矣。" 至第五條廉恥之事, 右贊參李繼孟曰: "貪汚者, 今雖沙汰, 然淸白之吏, 尙不擧用, 須褒奬, 以示勸勵之方。" 至第六條史筆之事, 宋軼曰: "欲爲外史之論, 久矣。 古者有野史, 今若不得已而爲之, 都事可爲, 守令不可爲也。 然新創之事, 不可輕擧也。" 上曰: "此事, 前亦有言者矣。 雖未得多兼, 一道內一二員兼差, 何如?" 光弼曰: "今若擇差, 可得其人, 若過數代, 漸以失人, 其弊尤大, 莫如仍舊也。" 用漑曰: "古則閑逸之人, 自作野史, 今則無其人矣。 若國家立法, 使之書之, 則執筆者, 未必皆公, 是非失實, 恐尤不可也。" 吏曹判書朴說曰: "外方風俗善惡, 記而流傳, 則豈不美乎然京之兼春秋, 亦不勉於記事, 外雖設之, 恐徒爲文具也。" 至第七條奢侈之事, 上曰: "侈習禁革之言, 當矣。 然所云尙衣院耳掩草綠事, 以前規爲之, 非新制也。" 宋軼光弼應箕等曰: "此雖小事, 甚關習俗, 所當裁抑。" 至第八條禁酒事, 宋軼光弼等曰: "遇災敬天之時, 雖自上禁酒, 然下人則飮之, 不可不禁也。" 至第九條法令事, 禮曹判書權鈞曰: "須遵守《大典》之法, 堅如金石、信如四時, 則民皆信之矣。 若屢改則吏不知守, 民易犯矣。" 繼孟曰: "該司公事, 輒爲允可, 故遂成法條。 若新建之事, 必問諸大臣, 定其可否而後, 施行可也。" 至第十條淫祀事, 上曰: "巫覡之風, 頗似盛行, 法司禁斷。 昭格署事, 雖似不正, 不可一朝卒革。" 用漑曰: "昭格署事, 無稽之甚。 若令禁斷, 則聖德增光矣。 且(忌晨)〔忌辰〕 祭時, 辱先王在天之靈, 無理有害, 決然禁斷爲當。" 宋軼等亦皆極論當革之意。 承旨李沆曰: "古之奉先, 只有宗廟, 今則旣有文昭殿, 又有陵寢朔望之祭, 非不盛也。 如(忌晨)〔忌辰〕 之齋, 革之爲當。"

【史臣曰: "是日親議, 時稱盛擧, 然出於勉强, 未見有虛懷樂聞之誠, 不足以感動人心。 議及(忌晨齋)〔忌辰齋〕 , 上獨難而不革; 議及《後續錄》, 宋軼光弼應箕等, 皆不言其可否。 其法條妨礙, 未必不知, 以己所建白, 故遂非憚改。 上下胥失, 有親議之名, 無建用之實, 時議譏其無益。"】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41면
  • 【분류】
    사법-법제(法制)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의생활-상복(常服)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호구-이동(移動)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상업-상인(商人)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