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 최숙생 등이 국정 등에 관한 12가지의 일을 상소
대사간 최숙생(崔淑生) 등이 상소하여 12가지의 일을 조목별로 진술하기를,
"1. 학교는 현재(賢才)를 배출하는 곳이고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곳입니다. 근래 학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힘쓰지 않고 훈송(訓誦)만 다투어 초(抄)해서 기송(記誦)만을 도모하여 요행히 과거(科擧)에 합격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본받습니다. 궁벽한 시골과 벽지(僻地)의 학교에 이르기까지, 비록 종지(宗旨)에는 어둡지마는 만약 구송(口誦)272) 에 능하면 그가 학업에 숙달했다고 여겨 일률적으로 이를 뽑는데, 다만 생소(生疎)함과 숙달함만 비교할 뿐이고 정밀(精密)함과 추솔(粗率)함은 논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무리들이 문득 과거의 학문은 편안히 앉아서도 할 수 있으니 스승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학궁(學宮)273) 에 있기를 싫어하고 사장(師長)을 우습게 보며, 사람마다 자신의 학문을 하여 각각 자신의 의논을 세워서 소경이 지팡이로 더듬거리면서 길을 가는 형국이어서 형세가 장차 도(道)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 이를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사유(師儒)를 가려 뽑아서 그 임무를 전임(專任)시켜 오래도록 있게 하고,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유업(儒業)을 강고(講考)하게 하면서 이어 주과(酒果)를 하사(下賜)하여 포상(褒賞)을 보이소서. 경서(經書)를 강(講)하여 선비를 뽑는 때에 이르러서도 또한 상항(上項)의 사유로 하여금 이를 주관(主管)하도록 하여, 그 말하는 바가 평일에 강한 바에 맞으면 이를 뽑고 맞지 않으면 이를 내치게 하면 절로 사람들이 다투어 스승을 섬기게 되어 학문이 귀일(歸一)될 것이니, 절대로 정시(庭試)274) 를 여러 번 시행하여 과생(科生)들로 하여금 앞을 다투어 시세에 편승하여 은전(恩典)을 바라 빠른 길을 택하는 요행의 문을 열어놓아서는 아니됩니다. 또한 별시(別試)를 자주 설치하여 과생들로 하여금 다투어 모사(模賜)만을 일삼고 근본은 버리고 말만 추구함으로써 부박하고 분경하는 습속이 자라나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2. 농사는 백성의 근본이고 의식(衣食)의 근원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할 일이요 진실로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폐조 때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굶어 죽은 사람이 길에 연했던 것을 성상(聖上)이 왕위에 올라 까다로운 정사를 깨끗이 제거하니 떠돌던 백성이 절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질통(疾痛)이 극도에 이르렀고 원기가 이미 쇠진되었으며, 근거를 잃은 나머지 직업에 안정하기가 어려웠고, 그 고리(故里)는 구허(丘墟)가 되고 전야(田野)는 모두 황폐되었습니다. 몸에 땀흘리고 발에 흙묻히는 사람은 이익을 얻지 못하고, 발에 흙 안 묻히고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리어 넉넉하고 부요(富饒)하므로 서로 다투어 소를 팔아 말을 사서 행상(行商)을 일삼게 되니, 밖으로 장문(場門)275) 에는 간도(奸盜)가 기생(寄生)하고 안으로 시정(市井)에는 남위(濫僞)가 모입니다. 적은 부락과 좁은 골목이 모두 시장이 되어서 이(利)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성하고 달마다 불어나니 본업(本業)이 황폐된 것은 실로 이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그대로 두고 계획하지 않는다면 형세가 장차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한(漢)나라의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상고(商賈)를 억제하여 번성하지 못하도록 하고, 새로 세운 시장은 또한 마땅히 다 혁파시킴으로써 백성을 농업으로 돌아가게끔 본업을 권장하소서.
3. 경술(經術)에 밝은 선비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바탕입니다. 우리 나라는 문헌(文獻)276) 의 나라라고 일컬어 왔으며, 삼국(三國)과 고려(高麗)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사(文士)가 쏟아져나와서 명성이 중화(中華)에 떨쳤으며, 세상에 쓰여지는 자가 많아서 대대로 사람이 모자라지는 아니했는데, 폐조 때 풀 베듯이 해서 거의 없앴으므로 그 나머지가 몇 사람 안 되며, 지금 학자들은 문학하기를 꺼려 스스로 힘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이는 바로 전하께서 권장하고 진기(振起)시킬 시기입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에 맨 먼저 홍문관을 회복시켰고, 또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서 한가한 시간을 주어 학업을 연구하도록 했으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일찍이 사가 독서(賜暇讀書)의 선(選)을 설치하셨고, 성종(成宗)께서도 또한 일찍이 이를 시험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돌보심이 날로 융성하여 사문(使問)277) 이 서로 잇달았으며, 선발된 사람은 모두 권면(勸勉)하여 감히 스스로 안일(安逸)히 지내는 자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하여 옵니다. 폐조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계승되었지마는 예절로써 접대하는 두터움은 대개 없었으니, 사림(士林)의 재앙을 어찌 유래(由來)한 바가 없었겠습니까? 예주(醴酒)의 진설을 잊으면 현자(賢者)가 머물지 않으며,278) 죽은 말의 뼈를 사가면279) 준마(駿馬)가 절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4. 수령(守令)은 백성에게 친근(親近)한 관원이므로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합니다. 그런데도 임명할 때는 자리는 많고 사람은 적으므로 정선(精選)하기가 어려워서, 잡류(雜類)의 출신(出身)에 이르기까지 품계가 6품에 오른 사람이면 현부를 논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외직(外職)에 임명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고, 미관인 녹사(錄事)에 이르러서도 서리(胥吏)와 다를 것이 없어서 평생에 바라는 바는 1현(縣)에 지나지 않는데, 적임자가 없기 때문에 외직에 임명되면 곧 먼저 빼앗는 것을 일삼고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고 용렬하여 이속(吏屬)의 미끼가 되기도 하니, 이로써 백성을 다스린다면 원망을 없애려고 하더라도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녹사(錄事)와 잡류(雜類)들을 비록 외임에서 모두 혁파할 수는 없더라도 일단 이를 경관(京官)에 시용하여 재능이 있고 없는가를 상고하여서, 만약 그 사람이 재능이 있으면 외직에 임명하고 재능이 없으면 파하는 것이 나라에도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폐해가 없을 것이거늘, 서둘러서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에 시용하여 우리의 적자(赤子)280) 에게 재화(災禍)를 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는 시종(侍從)하는 신하를 외직에 임명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그 임무를 중시(重視)하고 백성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백성의 생활이 바야흐로 곤궁하니 마땅히 선왕(先王)의 고사(故事)에 따라서 백성을 소생(蘇生)시켜야 할 것인데도, 말하는 사람은 지방만을 중시한다는 것으로써 핑계를 삼고 있으나 대개 미처 생각지 못한 때문입니다. 시종(侍從)하는 관원을 만약 한꺼번에 잇달아 임명한다면 지방만 중시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마는 수년(數年) 사이에 특별히 1∼2인을 명하여 임명한다면 지방만 중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임금의 명에서 나와 지공 무사하게 한다면 가하거니와 만약 아랫사람에게서 나온다면 장차 겉으로는 좋다고 하나 속으로는 배척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5. 염치(廉恥)는 나라의 네 가지 기강(紀綱) 중의 하나이니 확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사람의 마음이 예스럽지 못하여 염치의 도리가 없어져서 지방의 수령들이 자주 탐오죄(貪汚罪)에 걸려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니 그법이 대개 엄중합니다. 다만 청백리(淸白吏)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겠으니, 대개 있지마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입니까? 비록 그 본인은 이미 죽었더라도 만약 자손이 있다면 또한 포장(褒奬)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육경(六卿) 이상으로 하여금 각기 들은 바를 천거하도록 하여, 만약 보통사람보다 뛰어나게 특이한 사람이 있으면 빨리 포장을 베풀어 상(賞)이 후손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도 또한 선을 포장하고 악을 규탄하여 세상을 격려시키고 침체된 것을 쇄신시키는 하나의 기틀이 될 것입니다.
6. 사필(史筆)은 만고(萬古)의 부월(鈇鉞)입니다. 옛날에는 대대로 그 직을 지켰는데 지금은 달마다 그 소임이 갈립니다. 또 지금의 기사자(記事者)는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연에서 여러 사람이 의논하는 때를 당해서는 혹 재주가 부족한 데에 구애되기도 하고 혹 사무가 많은 데에 쫓기기도 하여 능히 그 자세한 부분을 다 기록하지도 못하고 기록한 바도 또한 서로 모순된 것이 많으니, 이것을 사실로 전한다면 믿어지기가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대저 하루아침에 급제하여 문득 한원(翰苑)281) 에 올라서, 포폄(褒貶)하는 권한을 다하려고 하니,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나라의 제도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형세가 법도를 고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방의 넓음과 군읍의 많음, 수령의 현우(賢愚)와 감사의 시비(是非), 사명(使命)의 왕래와 그 사정(邪正)·득실(得失)과 궁촌(窮村) 벽항(僻巷) 가운데도 경계할 만하고 모범될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인데도, 그 사이에는 사필이 없어서 민멸(泯滅)하여 전하는 것이 없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지금 시종·대간으로서 나아가 외관(外官)이 된 사람도 또한 많고 문학에 넉넉한 사람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진실로 이런 사람을 택해서 사직(史職)에 제수한다면 악한 사람은 듣고서 경계할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선한 사람은 믿고서 더욱 권장될 것이니, 당세에 도움이 있고 장래에도 공효(攻効)가 있을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7. 사치의 금지는 마땅히 궁액(宮掖)282) 에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위에서 발원(發源)하여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신 등은 멀리 전대(前代)의 일을 인증(引證)할 필요도 없이 바로 직접 본 일로써 말하겠습니다. 지금 초피(貂皮)·서피(鼠皮)는 대개 아주 먼 변방에서 나므로 이를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아름답고 좋은 것을 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오랑캐 땅에서 사게 되어 소[牛]와 바꾸어야만 하는데 형세가 이를 금지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지마는 진실로 절용(節用)하여 그 폐단을 덜어야 될 것인데도 지금 상의원(尙衣院)에서 하사하는 이엄(耳掩)은 그 제도가 매우 크고 그 비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이 이를 본받아서 넓고 크게 하기를 다투어 힘씁니다. 옛날에는 귀만 가리었으나 지금은 머리까지 모두 덮어씌우니 매우 괴이한 일입니다. 옛날에 초록색을 물들여 옷을 만드는 사람은 그 빛깔이 다만 풀빛처럼 만드는 데 그쳤지만 지금은 그 빛깔이 압두(鴨頭)보다도 더 진하고, 압두색(鴨頭色)으로 물들인 것을 다시 아청색(鴉靑色)으로 만들어 새로운 모양을 다투어 본받으므로 공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 오히려 스스로 그치지 않으니 어찌 숭상하는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상의원에서 내염(內染)283) 할 때에 남초(籃草)가 모자라면 또 민전(民田)에서 취하는데, 패(牌)를 세워놓고 다 베어 궐내로 실어들여서 될 수 있는 한 진하게 물들이도록 아랫사람에게 권한다 하니, 아랫사람 중에 어찌 이보다 심한 자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또한 나라의 대체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아, 사치를 변경시켜 검소를 따르게 하는 것은 윗사람에게 있고 아랫사람에게 있지는 않습니다.
8. 술은 마땅히 이를 쓰는 데 시기가 있어야 하고 절제없이 허비해서는 안 되니, 곡식만 낭비할 뿐 아니라 또한 재화(災禍)를 빚어냅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술로써 일을 폐지하는 사람이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일찍이 주계(酒戒)를 지어 중외에 널리 알렸는데, 그 말씀이 매우 간절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경계가 없으니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고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어찌 괴이히 여기겠습니까? 남상(濫觴)을 금하지 않으면 장차는 걷잡지 못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재변을 만나 하늘을 공경하는 날과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거리는 시기를 당하였음에리까? 금주령(禁酒令)을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밖에만 금하고 궐내에서는 쓰게 된다면 금지시키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는 무릇 내정(內庭)의 선온(宣醞)에서도 마땅히 일체 정파(停罷)시켜 근본을 끊어 버린다면, 자연 보고 감동하여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9. 법령은 위에서 나오므로 경홀히 할 수 없으며, 아래에 행하여지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 한 가지 법을 제정하면 여러 사람이 서로 논란하여 아침에 고치고 저녁에 변경시켜 사람들에게 법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므로, 떠들어대면서 서로 전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법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니, 아, 법이 어찌 그렇게 설정(設定)되었겠습니까? 법을 만든 사람이 능히 이를 지키지 못한 때문입니다. 《대전(大典)》에 기재된 법령 조문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다만 마땅히 굳게 지켜야만 할 것이고, 일이 중도에 폐지된 것이 있으면 진실로 마땅히 거듭 밝혀야 하고, 만약 시변을 구제하기 위하여 반드시 법을 제정해야 하겠으면 또한 마땅히 고사(故事)와 세변(世變)의 저앙(低昻)을 참작, 확연(確然)히 일정(一定)하되 의심없기가 강하(江河)처럼 범할 수 없고 산악(山岳)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절로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할 것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0. 옛사람이 말하기를 ‘음사(淫祀)284) 는 복을 받을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외에 무풍(巫風)이 점차로 만연되어 지방이 더욱 성하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마땅히 엄하게 개혁해야 할 것인데도 나쁜 풍습을 그대로 따라 몰래 감싸주어 방종하게 하는가 하면, 친구처럼 불러 드나들게 하면서 이를 아무(衙巫)라고 부릅니다. 감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비록 엄하게 규찰하더라도 서로 비호(庇護)하여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니, 저들 스스로 간사한 짓을 하는데 어찌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이 차츰차츰 젖어들어서 형세가 장차 서로 죄에 빠져들게 될 것이니,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성상께서도 또한 일찍이 이를 들었습니까? 궁액(宮掖)에서도 또한 국무(國巫)가 드나들되 금함이 없다는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전하께서는 아십니까? 소격서(昭格署)의 태일(太一)에 올리는 제사와 기신(忌晨)에 부처에 올리는 예(禮)를 맨 먼저 없애야 할 것이며, 앞서 이에 대해 말하기를 비록 간절히 했으나 오히려 상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던 것은, 대개 선왕(先王)으로써 핑계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은(祈恩)285) 이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음이 더욱 심합니다. 여무(女巫)를 많이 거느리고 산천(山川)에 기도하여 신명(神明)을 모독하면서도 이를 일러 기은이라고 하니,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만약 한번 이를 들으신다면 또한 근심하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는 사당 맡은 관원을 시켜 복을 빌지 말도록 했는데, 더구나 여자 무당을 시켜서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11. 조하(朝賀)와 조참(朝參)은 나라에 일정한 제도가 있으니, 한 달 안에 비록 다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사고(事故)만 없다면 진실로 자주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인들 어찌 안일(安逸)을 싫어하고 노고를 좋아했겠습니까? 대개 먼저 근로(勤勞)를 보여서 아랫사람을 권면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선조(先祖)에게 올리는 제사와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절은 마땅히 몸소 솔선하여야 합니다. 마지못해 행하더라도 오히려 아랫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는데, 하물며 지성(至誠)으로 실행함에리까? 겉모양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윗사람이 시행하면 아랫사람이 절로 본받게 되는 것이니, 누군들 보고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12. 경연(經筵)은 임금의 지혜를 열어 넓히는 곳이요, 훈고(訓詁)를 기송(記誦)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 등이 경악(經幄)에 시강(侍講)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시독(侍讀)하는 관원이 한 번 읽고 나서 한 번 해석하면 전하(殿下)께서도 또한 한 번 읽고는 문득 책을 덮어 버릴 뿐, 고문(顧問)하고 논란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제왕의 학문하는 것이 아마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합니다. 또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가신 후에는 구관(九關)286) 이 이미 잠겨지고 심궁(深宮)이 고요하여 야기(夜氣)가 맑아지고 모든 사물이 쉬게 되면, 선악(善惡)의 기미(幾微)가 이에 싹트기 쉬우므로 야대(夜對)287) 의 공부가 주강(晝講)보다도 간절하니, 임금의 옥체가 비록 괴롭지마는 또한 마땅히 스스로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이 소(疏)를 보건대 모두 시폐에 맞는 말이다. 초록색으로 진하게 물들이는 일은 상의원(尙衣院)에서 전일의 규정에 따라 한 것이고, 경연 강론은 지금 마땅히 해야 하리라. 조하와 조참은 마침 사고가 있은 까닭으로 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계(酒誡)는 조종조에서도 일찍이 하였으므로 나도 하려고 한다. 내정(內庭)의 선온(宣醞)은 방종하게 마시는 것이 아니고 약으로 먹는 일도 있으니 이것을 아주 없앨 수는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8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상업-상인(商人) / 농업-권농(勸農) / 정론-정론(政論)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의생활-관복(官服)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 호구-이동(移動) / 식생활-주류(酒類) / 역사-고사(故事)
- [註 272]구송(口誦) : 소리 내어 욈.
- [註 273]
학궁(學宮) : 성균관(成均館)의 별칭(別稱).- [註 274]
정시(庭試) : 보통 정시라 하면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 등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행하는 과거를 말하나, 여기서는 수시로 궁정에서 유생을 시험하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유생(儒生)의 학업을 권장할 목적으로 유생들을 궁중에서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는 다음에 있을 과거에서 회시(會試)나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註 275]
장문(場門) : 시장을 말한다. 성종(成宗) 원년에 흉년이 들었는데, 그때 전라도 백성이 서로 모여 시장을 만들고서 물건을 사고 판 데서 온 말이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4년 2월 임신조.- [註 276]
문헌(文獻) : 전적(典籍)·현자(賢者).- [註 277]
사문(使問) : 사자(使者)를 보내어 묻는 것.- [註 278]
예주(醴酒)의 진설을 잊으면 현자(賢者)가 머물지 않으며, : 임금이 어진이를 대우함에 있어 공경심이 없으면 어진이가 떠난다는 뜻. 전한(前漢) 때 초 원왕(楚元王)이 목생(穆生)을 맞이하였는데, 그가 술을 즐기지 않으므로 늘 단술을 차려 대접하였다. 그뒤 자손들이 왕이 되어서는 단술 준비하기를 잊었으므로 병을 핑계하고 떠났다.- [註 279]
죽은 말의 뼈를 사가면 : 덜 훌륭한 사람이라도 불러다 쓰면 훌륭한 사람은 자연히 온다는 뜻.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곽외(郭隗)가 ‘신은 들으니 「옛 임금이 1천금으로 천리마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사람을 시켜 죽은 천리마의 뼈를 사오니 석 달도 못되어 천리마 세 마리나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했다." 하였다.- [註 280]
적자(赤子) : 백성을 말한다.- [註 281]
한원(翰苑) : 예문관(藝文館).- [註 282]
궁액(宮掖) : 궁궐.- [註 283]
내염(內染) : 궐내(闕內)에서 염색(染色)하는 것.- [註 284]
음사(淫祀) : 부정(不正)한 귀신을 제사지냄.- [註 285]
기은(祈恩) : 왕가(王家)의 복을 비는 행사.- [註 286]
구관(九關) : 궁문(宮門).- [註 287]
야대(夜對) : 임금이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연(經筵)을 열고 경사(經史)중의 고금 치란(古今治亂)에 관하여 강관의 진강(進講)을 듣는 일.○大司諫崔淑生等上疏, 條陳十二事。
其一, 學校, 賢才所出, 風化所關。 近來學者, 不務師授, 爭抄訓誥, 以圖記誦, 僥倖得第, 人皆效之。 至於窮鄕僻學, 雖昧宗指, 若能口誦, 謂熟其業, 一槪取之, 但較生熟, 毋論精粗。 以此, 悠悠之輩, 便謂: "科擧之學, 安坐可能, 不必從師。" 厭居學宮, 傲視師長, 人自爲學, 各立私議, 摘埴冥行, 勢將失道, 奈何不救? 宜抄選師儒, 俾專其任, 待以悠久, 數遣內臣, 講考儒業, 仍賜酒果, 以示褒賞。 至於講經取士之時, 亦令上項師儒主之, 其所言, 合於平日所講者則取之; 不合則黜之, 自然人爭事師, 學歸于一。 切不可屢行庭試, 使之奔波希恩, 爭慕捷徑, 以開倖門。 亦不可數設別試, 使之爭事模寫, 棄本就末, 以長浮競之習。其二, 農者, 生民之本, 衣食之源, 爲國先務, 誠不可緩。 頃在廢朝, 四方流離, 道饉相望。 聖上龍興, 滌去煩苛, 流逋自集。 然而疾痛之極, 元氣已衰, 失巢之餘, 安業爲難。 見其故里丘墟, 田野荒蕪。 沾體塗足者, 未見其利; 游手逐末者, 反居優饒, 則相與賣牛買馬, 爭事行販。 外而場門, 奸盜所寄; 內而市井, 濫僞所聚。 以至曲坊、委巷, 莫不出市, 以邀纖利。 日盛月滋, 本業之荒, 實由於此。 失今不圖, 勢將難救, 宜倣炎漢故事, 排抑商賈, 使不得盛, 新立市門, 亦宜盡革, 驅民於農, 以勸本業。 其三, 經術之士, 理國所資。 我國號稱文獻之邦, 自三國、高麗, 以至我朝, 文士輩出, 名動中華, 蔚爲世用者, 代不乏人。 曩因廢朝, 芟刈殆盡, 其餘無幾。 至今學者, 以文學爲諱, 不肯自力, 此正殿下勸奬振起之秋也。 龍飛之初, 首復弘文館, 又擇文學之士, 賜閑硏業, 甚盛事也。 臣等聞之, 我世宗大王, 嘗設賜暇之選, 成宗亦嘗試之矣。 當時睿眷日隆, 使問相繼, 與選者, 莫不勸勉, 不敢自逸, 至今以爲美談。 至於廢朝, 猶踵而爲之, 若夫禮接之厚, 則蓋闕如也, 士林之禍, 豈無所自乎? 忘設醴酒, 則賢者不留; 市其死骨, 而駿馬自至。 其四, 守令, 親民之官, 所繫尤重。 然而除拜之時, 地多人少, 難於精選, 以至雜類出身, 階登六品者, 不論賢否, 一槪外除, 以貽民弊。 至於錄事之微, 無異胥吏, 平生所望, 不過一縣。 承乏外補, 便事攫取, 否則暗劣, 爲吏之餌。 以此治民, 欲其無怨, 豈不難哉? 錄事、雜類, 雖不可盡革外任, 姑試之京官, 考其能否, 如其才也, 授之外寄, 否則廢之, 於國有益, 於民無弊, 何必急急焉先試牧民, 以禍我赤子哉? 祖宗朝, 侍從之臣, 亦命外除, 蓋欲重其任, 而厚其民也。 今民生方困, 宜遵先王古事, 以蘇民生, 而言者有以外重爲辭, 蓋亦未之思也。 侍從之官, 若一時聯拜, 則謂之外重, 可也, 數年之間, 特命一二人爲之, 何有於外重乎? 然此事出於上命, 而至公無私則可矣, 若出於下, 則將有陽善陰擠之弊矣。 其五, 廉恥, 國之四維, 不可不張。 近來人心不古, 廉恥道喪, 外之守令, 屢染貪汚, 累及子孫, 其法蓋嚴矣。 但淸白吏則無聞焉, 蓋有之矣, 人未之知耶? 雖其人已死, 若有子孫, 則亦當褒奬。 宜令六卿以上, 各擧所聞, 如有卓異者, 則亟加褒美, 賞延于後。 亦是彰善癉惡, 礪世磨鈍之一機也。 其六, 史筆, 萬古鈇鉞。 古者世守其職, 今也月遞其任。 且今之記事者, 不過中書出納之事, 而當經筵群議之時, 或局於才短; 或窘於多事, 不能盡其委曲, 而所記亦多牴牾, 以此傳信, 蓋亦難矣。 夫以一朝釋褐, 便登翰苑, 欲盡褒貶之權, 豈易乎哉? 然此國制已定, 勢難改絃。 若夫四方之廣、郡邑之多, 守令之賢愚; 監司之是非, 與夫使命之往來, 其邪正、得失, 窮村僻巷之中, 可戒可法之事非一, 而無史筆於其間, 泯滅無傳, 甚可惜也。 今自侍從、臺諫, 出爲外官者亦多; 富於文學者亦不少, 誠擇斯人, 授之史職, 則惡者聞而知戒, 善者恃而益勸, 其有補於當世, 有功於將來, 豈淺淺哉? 其七, 奢侈之禁, 當先宮掖。 蓋源於上, 而流於下者也。 臣等不須遠引前代, 直以目覩之事言之。 今夫貂皮、鼠皮, 蓋出於極邊, 取之甚難。 若求美好, 必買胡中, 易之以牛, 勢已難禁。 雖不可頓革, 固宜節用, 以省其弊。 而今尙衣院所賜耳掩, 其制甚闊、其費亦鉅, 群下化之, 爭務寬大。 昔也只掩其耳, 今也全蒙其首, 甚可怪也。 昔之染草綠爲衣者, 其色只取如草之綠而止耳。 今則其色深於鴨頭, 而染鴨頭者, 則轉爲雅靑, 爭效新樣, 功重費廣, 猶不自止, 豈無所尙而然乎? 竊聞, 尙衣院內染之時, 藍草不足, 則又取諸民田, 立牌盡刈, 輸入于內, 務爲深染, 以勸其下, 下豈無甚焉者乎? 此雖細事, 亦關大體。 嗚呼!變奢從儉, 在上而不在下矣。 其八, 酒者, 固宜用之有時, 不可費之無節。 非徒糜穀, 亦以釀禍。 今之士大夫, 以酒廢事者尙多, 況其下乎? 昔我先王, 嘗作酒戒, 播告中外, 其言甚切。 今則已無戒矣, 酣歌朋飮, 何足怪哉? 濫觴不禁, 將至滔天, 況當遇災敬天之日, 民生阻飢之時, 禁酒之令, 不可不嚴。 若禁之於外, 而行之於內, 則非所以爲禁也。 自今以後, 凡內庭宣醞, 亦宜一切停罷, 以絶根本, 自然觀感, 糜費可省。 其九, 法令, 出於上而不可輕也; 行於下而不可反也。 今有建立一法, 群議相奪, 朝更夕變, 以致人不信法, 譁然相傳曰: "朝鮮之法, 不久。" 嗚呼! 法之設, 豈端使然哉? 爲法者, 不能守之耳。 《大典》所載, 法條已備, 但當堅守, 事有中廢, 固宜申明。 如欲救時, 必須立法, 亦當斟酌故實, 低昻世變, 確然一定, 較若無疑, 如江河不可犯也, 山岳不可動也, 自然人自畏法, 寧有異議? 其十, 古人云: "淫祀無福", 今中外巫風, 稍稍蔓延, 外方尤熾, 牧民之官, 固宜痛革。 而因循弊風, 陰護使縱, 招朋出入, 謂之衙巫。 監司巡邑, 雖嚴糾察, 相與蒙蔽, 匿不以報, 彼自爲邪, 安能正俗乎? 浸淫遠近, 勢將淪胥, 未審聖上, 亦嘗聞之耶? 似聞, 宮掖亦有國巫, 出入無禁, 豈殿下能知之乎? 若夫昭格太一之祭、(忌晨)〔忌辰〕 祀佛之禮, 在所先去, 而前此言之雖切, 猶不能回天, 蓋以先王爲辭也。 若今之祈恩云者, 無稽尤甚。 群率女巫, 祈禱山川, 褻瀆神明, 而謂之祈恩, 天可欺乎? 聖上若一聞之, 亦將戚然矣。 昔漢 文帝, 令祠官勿祈福, 況縱女巫而爲之耶? 其十一, 朝賀、朝參, 國有定制。 一月之內, 雖不可盡行, 若無事故, 固宜數擧。 古之帝王, 亦豈厭安而好勞哉? 蓋欲先示勤勞, 以風厲其下也。 且享先之祭、事大之禮, 尤當躬率, 勉强行之, 猶足化下, 況至誠以將之哉? 表正影直, 理勢自然。 上行下效, 孰不觀感? 其十二, 經筵, 所以開廣聖智, 非所以記誦訓誥也。 臣等侍經幄有年矣。 侍讀之官, 一番讀了, 一番釋了, 殿下亦一番讀罷, 倐爾掩卷, 了不聞顧問論難之益, 帝王爲學, 恐不如是。 且夫盡日三御之後, 九關已鑰, 深宮閴然, 夜氣澄淑, 群動已息, 善惡之幾, 於是易萌夜對之功, 切於晝講, 聖體雖勞, 亦宜自强。
傳曰: "今見此疏, 皆中時弊。 草綠深染事, 尙衣院以前規爲之。 經筵講論, 今當爲之。 朝賀、朝參, 適有事故, 未得行耳。 酒誡, 祖宗朝嘗爲之, 予亦欲爲焉。 內庭宣醞, 非縱飮, 服藥之事, 不宜全廢。"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5책 38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상업-상인(商人) / 농업-권농(勸農) / 정론-정론(政論)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의생활-관복(官服)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 호구-이동(移動) / 식생활-주류(酒類) / 역사-고사(故事)
- [註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