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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1권, 중종 9년 10월 17일 병오 1번째기사 1514년 명 정덕(正德) 9년

간원에서 나 숙의를 치료한 의관·시종을 엄벌할 것 등을 아뢰다

대간이 한순(韓恂)의 일을 아뢰고, 간원(諫院)이 또 홍경주(洪景舟)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나 숙의를 호산(護産)한 사람이 어찌 여의(女醫) 혼자뿐이겠습니까? 또한 반드시 수종(隨從)한 여시(女侍)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의의 죄는 마땅히 형률(刑律)에 따라 죄를 정해야 할 것인데도 이에 죄를 감(減)하여 속죄(贖罪)하도록 명하였으니, 후일의 일을 염려할 만합니다. 모름지기 형률에 의거하여 이를 처벌할 것이며, 시호한 여시도 아울러 추문하여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숙의가 궁(宮)에서 나간 뒤에도 아직 생기(生氣)가 있었다 하니 만약 생기가 있었다면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의녀와 궁인이 함부로 아뢰어 궁에서 나가게 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피접해 나간 집은 얕고 땅바닥이 드러나 이 때문에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그를 모셨던 여의와 여시는 처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또 듣건대 박소의(朴昭儀)도 사제(私第)에 나가서 해산(解産)했다고 하니, 비록 보통의 궁녀일지라도 밖에서 오랫동안 거처하게 할 수는 없는데, 하물며 소의(昭儀)의 높은 신분으로서 여염 사이에서 함부로 거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나씨의 초상에 장생전(長生殿)의 재궁(梓宮)259) 을 하사하도록 명하셨으나, 명기(名器)260) 를 분수에 지나치게 할 수 없습니다. 숙의(淑儀)의 품계(品階)는 2품과 같으니 마땅히 귀후서(歸厚署)의 관(棺)을 써야 될 것인데, 좁고 작아서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하니 이는 또한 해당 관원이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를 추문하소서. 수도(遂道)261) 는 재궁(梓宮)만큼 중요하지 않은데도 오히려 ‘왕자(王者)의 제도는 남에게 빌려 줄 수가 없다.’고 하였거늘 하물며 재궁이겠습니까? 예관(禮官)도 또한 참람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으니, 아울러 이를 추문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나 숙의(羅淑儀)는 구제할 수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다. 내간(內間)에 있을 때 이미 숨이 끊어졌던 것인데 이튿날 다시 소생(蘇生)했다고 떠들게 된 것은 태아(胎兒)에게 생기(生氣)가 있었던 것이 의심을 사서 잘못 전해졌던 것이다. 호산(護産)한 여의(女醫)는 마음을 다하여 구료(救療)하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참작해서 죄를 감한 것뿐이다. 여의뿐 아니라 또한 시비도 있었으니, 어찌 힘을 다하여 구료(救療)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또 박소의는 대내(大內)에 질병이 있고, 집마다 연고가 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사제(私第)에 나가게 한 것이고, 밖에서 오래 있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몸을 조섭(調攝)해서 궁으로 되돌아온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 또 재궁에 대한 일은 내가 그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입관(入棺)할 시각은 박두했는데 해당 관사(官司)의 관은 작아서 사용할 수가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하사해 준 것이다. 다만 귀후서에서는 소홀히 하여 살피지 않았고 제조(提調)도 검거(檢擧)하지 않았으니 모두 추문해야 하겠다. 예관은 추문할 필요가 없으며, 나머지도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처음에 나씨가 난산(難産)이 되어 병이 위급하니, 궁중(宮中)이 떠들썩하면서 숨졌다는 말이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밖에 나가도록 명하였으며, 나가서 해산(解産)하니 아이는 생기(生氣)가 있었으나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그때 사람들이 슬퍼하고 상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해산할 수가 있었다면 생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니, 처음에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모자(母子)가 혹시 보전(保全)될 수가 있었는데 강박해서 밖으로 내보내어 이런 사고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궁중에 사설(邪說)과 구기(拘忌)가 있어서 임금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시 나씨가 궁에서 나갈 때 타고 갔던 교자(轎子)를 불에 태워 없애도록 명하고, 또 박씨(朴氏)로 하여금 피접하여 사제(私第)로 나가도록 했으며, 나씨를 시병(侍病)했던 여의는 다시는 나인(內人)의 해산을 돌보지 말도록 명하고, 장일(葬日)에 이르러서는 풍수(風水)의 관원으로 하여금 부부(夫婦) 사이의 금기(禁忌)를 가리도록 했다. 또 이때에 와서 다시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궁내(宮內)에 있을 때 숨이 이미 끊어졌다.’고 하니, 임금이 사설에 미혹(迷惑)된 믿음이 언사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3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신분-중인(中人) / 역사-사학(史學)

  • [註 259]
    재궁(梓宮) : 임금이나 왕후의 상에 쓰는 관임.
  • [註 260]
    명기(名器) : 작호(爵號)·거복(車服).
  • [註 261]
    수도(遂道) : 묘지(墓地)속의 통로.

○丙午/臺諫啓韓恂事。 諫院又啓洪景舟事, 且曰: "羅淑儀護産之人, 豈獨女醫乎? 亦必有隨從女侍矣。 女醫之罪, 宜從照律斷之, 而乃命減罪許贖, 後日之事, 亦可慮也。 須依律罪之, 侍護女侍, 竝推治罪。 且淑儀出宮之後, 尙有生氣。 若有生氣, 不可出外, 而醫女宮人, 妄啓出宮, 甚爲不可。 避出之第, 淺露令地, 是以致此變故。 其所侍女醫女侍, 不可不罪。 臣等又聞, 朴淑儀亦出私第而解産。 雖尋常宮女, 不可久居于外, 況以昭儀之尊, 而混處閭閻之間乎? 且羅氏之喪, 命賜長生殿梓宮, 名器不可僭分。 以淑儀秩, 視二品, 當用歸厚署之棺, 而窄小不可用云, 則是亦該官不勝其任故也, 請推之。 隧道不如梓宮之重, 而尙云: ‘王章不可假人’, 況梓宮乎? 禮官亦知僭濫而不啓, 竝推之。" "傳曰: "羅淑儀, 非有可救之勢, 而出外也, 自在內間, 氣已絶矣。 翌日以復蘇喧騰者, 以孕兒有生氣, 故致疑而訛傳也。 護産女醫, 非不盡心救療, 故斟酌減罪耳。 非獨女醫, 亦有侍婢, 豈不欲盡力救之? 但死生有命, 爲之奈何? 且朴昭儀, 則以大內疾病, 家皆有故, 不得已出于私第。 非欲久居于外, 調理還入, 有何妨焉? 且梓宮事, 予非不知其非也。 但入棺時刻已逼, 該司之棺, 小不可用, 不得已賜給矣。 但歸厚署, 慢不致察, 提調不能撿擧, 竝可推也, 禮官不須推之。 餘不允。"

【史臣曰: "初, 羅氏難産疾革, 宮中喧播以爲氣絶, 乃命出外。 出而解産, 兒有生氣, 少頃亦絶, 時人莫不悲傷曰: ‘旣能解産, 則非無生氣, 初不出焉, 則母子庶乎得全。 而迫令出外, 致有此故。’ 是必宮中拘忌邪說, 而上不能不惑, 旋命燒毁羅氏出宮時所乘之轎, 又使朴氏, 避出私第。 羅氏侍病女醫, 命勿復護內人之産, 至於葬日, 令風水之官, 擇夫婦互忌。 至是, 復敎曰: ‘自宮內氣已絶矣。’ 上之惑信邪說, 見於言事者如是。】


  •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15책 3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신분-중인(中人)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