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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9권, 중종 9년 1월 27일 신묘 1번째기사 1514년 명 정덕(正德) 9년

환관의 폐단에 대해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강목(綱目)》을 강하다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당 소종(唐昭宗)이 환관들에게 제재당함을 논란한 데 이르러 시독관 소세양(蘇世讓)이 아뢰기를,

"온공의 이 논란은, 임금이 환관 대하는 도에 아주 유익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환관에게 권한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폐가 없으나, 임금은 현사(賢士)를 접하는 때가 적고, 환관을 가까이하는 때가 많으니, 만약 처음부터 막지 않는다면 그 술책에 빠지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의당 엄히 대하여 조그마한 허물도 용서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관은 내외의 말을 통하는 자라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당나라가 환관을 썼기 때문에 자주 제재를 당하였으니, 이는 처음부터 폐단을 막는 데 삼가지 않은 때문이다. 여기에도 ‘크면 죽이고 작으면 형벌한다.’ 하였으니, 만약 죄과(罪過)가 있으면 엄히 다스려야 된다."

하매, 소세양이 아뢰기를,

"요즈음 들으니, 환관이 도로에 벽제(辟除)하기를 재상과 같이하여 기탄없이 자행한다 합니다. 무릇 그들이 하는 말을 상께서는 혹시라도 귀를 기울여 채택하지 말 것이며, 만약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용서하지 말으소서."

하고, 사간(司諫) 한효원(韓效元)은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소위 설리(薛里)040) ·승전색(承傳色)이라는 자가 말미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면 그 곳 감사와 수령은 더없이 관대하다 하는데, 이는 내시로서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셔 환관이 용사(用事)하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반부(攀付)041) 하니, 그 조짐을 예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은 아뢰기를,

"들으니, 세조조에서는 승지로 하여금 명을 전하게 하고 또한 조신(朝臣)이 사신나갔다가 복명할 적에는 반드시 친히 보고 들은 일을 묻기 때문에 신하가 진언(進言)하기 쉬웠는데, 그 뒤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임조(臨朝)하면서부터 비로소 환관으로 내외의 말을 출납하게 하였으므로, 한효원이 ‘환관이 하향하면 감사와 수령이 후대한다.’고 한 말은 과연 옳습니다. 전에 이숭원(李崇元)이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가 되었을 때, 내관(內官) 이효지(李孝智)가 그 도에 내려가서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았으며, 심지어 기생을 태워 가지고 다니기까지 하는데도 각관 수령들이 서로 초청하여 맞아들이니, 숭원이 노하여 이르기를 ‘나는 현석규(玄碩圭)가 아니거니 어찌 너에게 아부하랴.’ 하였다 합니다. 신이 들으니 ‘그 당시 현석규효지를 위해 교외에 잔치를 베풀고, 또 아내(衙內)로 맞아들여 의복을 주고 울면서 작별했기 때문에 숭원이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환관이 하향함에 반드시 이러한 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민번(閔蕃)성윤(成允)에게 아부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니, 이와 같이 용렬한 사람들은 환관에게 아부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시인(侍人)이 명령 전하는 것을 조종조로부터 혁파하고자 한 지 오래되었는데, 심지어는 상소하여 논란하는 자까지 있었다. 성종조에서 큰 일은 승지가 친계(親啓)하고, 작은 일은 환관으로 하여금 전계(傳啓)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는 중원(中原)과 달라 사소한 일이 많으니 어찌 일일이 친계할 수 있겠는가?"

하매, 효원이 아뢰기를,

"사소한 일을 다 친계할 수는 없거니와 큰 일만이라도 가려 친계하여 점차 이 폐단을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삼시 경연(三時經筵) 때에는 승지로 하여금 각자 아뢰게 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아뢰어야 될 일은 승지가 경연에서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하매, 효원이 아뢰기를,

"근일 승계(陞階)하거나 사직하는 조신들이 인견(引見)042) 이 있을까 두려워합니다. 인견은 신하를 성심으로 대접하는 것인데,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실례될까 염려하여서입니다. 군신 사이에 서로 친근하여 소원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인견하지 않을까 걱정할 것인데, 어찌 인견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근간에는 사대부를 접촉하는 날이 적기 때문에 소원하고 친근하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707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註 040]
    설리(薛里) : 몽고어(蒙古語)에서 유래된 말로 ‘돕는다’는 뜻인데 내시부(內侍府)에 소속된 직명으로 어선(御膳) 등의 일을 맡았다.
  • [註 041]
    반부(攀付) : 세력에 붙는 것.
  • [註 042]
    인견(引見) : 임금이 불러 보는 것.

○辛卯/御朝講。 講《綱目》, 至司馬溫公 昭宗爲宦官所制, 侍讀官蘇世讓曰: "溫公此論, 有益於人君待宦官之道。 我國之於宦官, 不授以權柄, 故無如此之弊, 然人君接賢士之時少, 親宦官之時多, 若不防之於幾微, 則不陷於術中者幾希。 當待之以嚴, 而雖有小過, 勿容赦之可也。" 上曰: "宦官通內外之言, 不可無也。 然用宦官, 故屢爲所制, 以其防微杜漸之不謹也。 此亦曰大則誅之, 小則刑之, 如有罪過, 則當嚴治也。" 蘇世讓曰: "近聞宦官, 辟除道路, 有同宰相, 恣行無忌。 凡有所言, 自上無或傾採, 若有小過, 勿少容貸也。" 司諫韓效元曰: "臣聞所謂薛里承傳色者, 受由下去, 則監司、守令, 款待有加, 以其內侍而有權勢也。 今聖明在上, 宦官無所用事, 然猶攀附, 其漸不可不預防也。" 領事鄭光弼曰: "聞世祖朝, 使承旨傳命, 且朝臣出使復命, 必親問所聞見之事, 故臣之進言也易, 其後貞熹王后臨朝, 始以宦寺, 出納內外之言。 韓效元所謂宦官下鄕, 監司、守令厚待之言是矣。 昔李崇元平安道監司時, 內官李孝智, 下歸其道, 求請甚繁, 至載妓而行, 各官守令, 爭相邀請。 崇元怒曰: ‘吾非玄碩圭, 何以附於汝乎?’ 臣聞其時玄碩圭, 爲孝智, 設宴於外, 而又引入於衙內, 贈以衣服, 哭以相別, 故崇元如是云爾。 宦官之下鄕, 必多有如此之弊矣。" 上曰: "前日閔蕃, 依附成允, 求爲宣傳官, 如此庸劣之人, 趨附於宦官者, 必多矣。 寺人傳命, 自祖宗朝, 欲革久矣, 至有上疏論之者。 在成宗朝, 大事則承旨親啓, 小事則令宦官傳啓。 我國家異於中原, 多有細碎之事, 何能事事而親啓乎?" 效元曰: "小事不可皆令親啓, 擇大事而親啓, 漸革斯弊爲當。 且有三時經筵時, 令承旨各自啓之善矣。" 上曰: "果然當啓之事, 承旨於經筵, 啓之爲宜也。" 效元曰: "近日朝臣(陞)〔陛〕 辭者, 恐其有引見。 引見乃待臣以誠也, 而以此爲恐者, 恐其失禮也。 君臣之間, 若親而不踈, 則人猶恐不引見也。 何以引見爲恐乎? 近間接士大夫之日少, 故其踈而不親如是。"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707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