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윤은보가 경상도로부터 와서 복명하다
어사 윤은보(尹殷輔)가 경상도로부터 와서 복명하기를,
"남쪽 지방은 경오년의 왜변(倭變)255) 이 일어난 뒤로부터 군사를 2번(番)으로 나누어 방어하다가, 그 뒤 왜변이 가라앉자 드디어 4번으로 나누었습니다. 허화(許和)한 뒤에 와서는 사은선(謝恩船)은 곧 나오지 않고 변장이 그 화호(和好)를 믿어 방어를 게을리할까 염려되므로 또다시 2번으로 나누었습니다. 2번으로 하면 한 달마다 교체하게 되는데, 군사들이 사는 곳의 거리가 혹은 7∼8일 길까지 되니 왕래하는 동안 자칫하면 순삭(旬朔)을 보냅니다. 집에 와 7∼8일을 머물렀다가 다시 수소(戍所)로 가게 되니, 이로 인하여 봉족(奉足)256) 을 매우 괴롭히고 군액이 감축되었는데, 이제 사은선이 이미 나왔으니 우선 3번으로 나누었다가, 화호가 전과 같아지기를 기다린 뒤에 다시 4번으로 나누어 소생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각처에 나뉘어 방어하는 군사가 길을 막고 호소하기 때문에 아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도(右道) 각포(各浦)는 왜변이 가장 심하였기 때문에 본래부터 성(城)이 있으나, 좌도는 왜변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성이 없었는데, 경오년 왜변이 있는 후 모두 벽보(壁堡)를 쌓아 성을 만들었습니다. 【벽보(壁堡)란, 욋가지[柧木]를 세우고 그 안팎에 진흙으로 바르기를 벽과 같이 하였기 때문에 벽보라 이른다.】 그 벽보는 위에 덮개를 만들고 안팎을 진흙으로 발랐는데, 그 곳 토지는 모두 사석(沙石)이기 때문에 먼 곳에서 진흙을 져다가 바릅니다. 그러나 한번 풍우(風雨)를 겪으면 다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떨어질 때마다 다시 보수하므로 분수(分戍)하는 군사들이 날마다 이를 일삼으며 그 민망함을 호소하되 ‘성 쌓는 군정을 따로 뽑지 말고 진(鎭)에 있는 수군(戍軍)이 각각 번들 때, 날마다 돌을 주워 금년에 한쪽을 쌓고 명년에 한쪽을 쌓게 하여 3∼4년이 되면 다 쌓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군사는 벽보를 수보하는 고초가 없이 오로지 방수(防戍)에만 전력할 것인즉, 군사도 쉴 수 있고 진도 완벽할 것입니다. 군사들의 호소를 전달하고자 하여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을 쌓는 것과 번(番)을 나누는 이 두 일을 해조(該曹)에 말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664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외교-왜(倭)
○御史尹殷輔, 自慶尙道來復命曰: "南方自庚午年倭變後, 軍士分二番防戍, 而其後倭變寢息, 遂分四番。 至許和以來, 謝恩船不卽出來, 恐邊將恃其和好, 而懈弛防禦, 故又分爲二番。 二番則一朔相遞。 軍士所居處相距, 或至七八日程, 則往來之間, 動經旬朔, 來家留七八日, 復往戍所, 因此侵刻奉足, 軍額銷蹙。 今則謝恩船已出來, 姑宜分三番, 以待和好如舊, 然後便分爲四番, 使得蘇息可矣。 各處分防軍士, 遮道訴愍, 故啓之。" 且曰: "右道各浦, 則倭變最緊, 故本有城子, 左道則倭變不甚, 故本無城子。 自庚午倭變之後, 皆築壁堡以爲城。 【壁堡者, 立松木內外以泥塗之如壁, 故謂之壁堡。】 上設蓋覆, 內外皆以泥塗之。 其處土地皆沙石, 故擔泥於遠處而塗之, 一經風雨, 墮毁殆盡。 隨毁隨補, 分戍之軍, 日以爲事。 訴悶曰: ‘築城之軍, 勿別抄發, 而以其留鎭戍軍, 各於其番, 逐日拾石, 今年築一面, 明年築一面, 積至三四年, 可以畢築矣。’ 然則軍士無修補築堡之苦, 而專以防戍爲事, 則軍士可息, 而鎭可完矣。 軍士訴悶, 欲令轉達, 故竝啓之。" 傳曰: "築城分番兩事, 言于該曹。"
-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664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군사(軍事)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