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손의 추안을 정원에 내리다
만손(萬孫)의 추안(推案)을 정원에 내리며 ‘자세히 추핵(推覈)하여 계문(啓聞)하라.’ 하고, 이어 항쇄(項鎖)만 채우고 칼[枷]은 채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그 공초(供招)에,
"금년 15세로, 곧 폐조의 이 숙의(李淑儀) 아들 양평군(陽平君)인데, 남학동(南學洞)에서 생장했습니다. 여섯 살 때 폐조의 난이 일어나자, 가노(家奴) 보동(寶同)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는, 곧 파란 보자기로 나를 덮어서 엎고 수구문(水口門) 길로 해서 도망쳐 서울 근방 산에 있다가, 산이 서울[京都]에 너무 가까와 사세가 거주하기 어려우므로 개골산(皆骨山)으로 가, 보동 등과 함께 우대선(禹大禪)이라고 불리우는 중에게 의탁했었고, 지리산(智異山)으로 가서는 상원사(上院寺)에서 1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묘향산(妙香山)으로 가 보현사(普賢寺)에 이르러 두 해를 머물렀는데, 종 보동이 죽었습니다.
또 안주(安州) 원통사(圓通寺)에 이르러 7일을 머물며 그 절의 중 죽청(竹淸)에게 왕자(王子)인 뜻을 가만히 말해 주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죽청의 말이 ‘겁성(劫成)이라는 자는 바로 본궁(本宮)의 종인데, 지금 황회목(黃灰木)으로 돈 버는 일 때문에 곽산(郭山)에 와 있으니, 찾아가서 같이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나를 데리고 곽산 고을로 갔었는데, 겁성은 보지 못했고, 죽청의 동생인 곽산에 사는 내수사(內需司) 종 가구지(加仇之)의 집으로 가서 쉬는데, 죽청이 왕자인 뜻을 말해 주니, 가구지가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하루를 가구지에게서 머물다가 곧 죽청 등과 함께 정주(定州)에 사는 내수사 종 효문(孝文)의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무는데, 효문이, 내가 왕자라는 말을 전파하니, 그 면(面)의 권농(勸農)과 색장(色掌) 등이 나를 황당(荒唐)한 사람이라고 하여 효문의 매부(妹夫) 만복(萬福)의 집으로 옮겨가 있게 했는데, 효문이 ‘아기씨[阿只氏]가 바로 왕자다.’라고 이웃과 마을에 떠들어대고 ‘만일 서간(書簡)을 고을 목사(牧使)에게 통하면, 아기씨를 반드시 선처할 것이다.’ 하고, 이어 이웃 사는 교생(校生) 홍윤평(洪允平)에게 청하여 서간을 고을 목사에게 올리도록 하니, 목사가 나를 황당한 사람이라 하며 잡아 가두고 곧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그가 얻어 먹으며 떠돈 곳을 일일이 진술(陳述)하매, 사람마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가 참으로 왕자인가 의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35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역사-편사(編史)
○下萬孫推案于政院曰: "其細推覈以聞。" 因命只令項鎖, 勿着枷。" 其招曰: "年今十五, 乃廢朝李淑儀子陽平君也, 生長于南學洞。 年六歲, 廢朝亂作, 家奴寶同, 以名不知年歲相當家兒代見, 因負我, 以靑袱蓋覆, 路由水口門外逃去, 住京山。 以京山逼近京都, 勢難居住, 向皆骨山, 與寶同等禹大禪稱名僧, 向智異山, 住上元寺一年, 遂向香山, 抵普賢寺。 留住二年, 奴寶同身死, 又至安州 圓通寺, 留七日, 與其寺僧竹淸, 潛說王子之意, 且欲歸京家, 則竹淸言: ‘刦成稱名者, 乃本宮奴子也, 今以黃灰木興利事, 來郭山矣, 可推尋同議。’ 乃率我歸郭山官。 刦成則不得見, 而竹淸同生郭山居內需司奴加仇之家止到。 竹淸開說王子之意, 則加仇之待我甚厚。 留一日, 加仇之乃與竹淸等, 到定州居內需司奴孝文家, 留一日。 孝文傳播我王子之言, 其面勸農、色掌等, 以我爲荒唐人, 移居于孝文妹夫萬福家。 孝文言, ‘阿只氏, 乃王子之言, 隣里喧說, 若通書牧官, 則阿只氏行止, 必善處矣。’ 廼請隣居校生洪允平, 使書簡呈于牧官, 則牧使以我爲荒唐人, 囚禁卽報使云。"
【史臣曰: "其乞食流寓之處, 歷歷陳之, 人皆驚怪, 疑其爲眞王子也。"】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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