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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7권, 중종 7년 11월 25일 을미 2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영의정 유순정이 소릉의 시말을 고찰하여 상소하다

영의정 유순정(柳順汀) 등이 소릉의 시말(始末)을 고찰한 것을 아뢰었는데, 대략에,

"신유년502) 7월 23일에 권씨(權氏)503) 가 훙(薨)하였고, 【이날 노산군(魯山君)이 탄생하였다.】 임신년504) 5월 14일에 문종(文宗)이 훙하셨습니다. 병자년505) 5월 을사(乙巳)에 좌승지 구치관(具致寬)에게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성삼문(成三問)에게 묻기를 ‘상왕(上王)506) 께서도 너희들의 모의를 참여하여 아시는가’ 하니, 성삼문이 ‘아십니다. 권자신(權自愼)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여 상왕께 통하였고, 뒤에 자신윤영손(尹令孫) 등이 누차 나아가 약속하여 기일을 고하였으며, 그날 아침에 자신이 먼저 창덕궁으로 나아가니, 상왕께서 장도자(長刀子)를 주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치관이 또한 자신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삼문과 같았습니다.

정축년 6월에 의정부가 아뢰기를 ‘현덕 왕후(賢德王后) 권씨(權氏)의 어머니 아지(阿只) 및 동생 자신이 모반(謀反)하다가 복주(伏誅)되었고, 그의 아버지 권전(權專)은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이 되었고, 또한 노산군은 종사(宗社)에 죄를 얻어 이미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직 그대로 명호(名號)와 지위를 보존함은 합당하지 못하니, 추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개장(改葬)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성종(成宗)무술년507) 에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였는데, 그 첫 조목에

‘삼가 고찰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하늘이 낸 용맹과 지혜, 일월(日月)같은 총명을 가지셔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으로 큰 변란을 평정하시어 화가위국(化家爲國)하심으로써 종사(宗社)가 위태하게 되었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시 소생하였는데, 뜻밖에도 병자년508) 에 여러 간신들이 난을 선동하다가 잇달아 복주(伏誅)되고, 남은 화가 소릉(昭陵)을 폐하는 데까지 미쳐, 20여 년 동안 원혼(冤魂)이 의지할 데가 없으니,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하늘에 계신 문종(文宗)의 신령이 어찌 홀로 약·사·증·상(禴祀蒸嘗)509) 을 받으려 하시겠습니까! 신은 학술이 없고 문견이 얕아, 진실로 어떤 일이 상서(祥瑞)를 가져오고 어떤 일이 어떤 재앙을 가져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짐작해 보니, 나의 마음이 곧 천지의 마음이요, 나의 기운이 곧 천지의 기운인즉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順)함은 바로 천심(天心)과 천기(天氣)가 순함이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이 순하지 못함은 바로 천심과 천기가 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이 순하지 못하면 재앙이 내리게 되는 것인데, 신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소릉(昭陵)을 폐한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순하지 못하였으니, 천심이 순하지 못할 것은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설사 철훼한 사당의 신주는 다시 종묘(宗廟)에 모실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존호(尊號)를 복구하고 다시 예장(禮葬)하여 한결같이 선후(先后)의 예(禮)처럼 하여, 생민의 여망에 답하고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며, 조종(祖宗)의 뜻에 보답한다면, 심상한 것보다는 몇 만 배나 나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만일 「폐한 지가 3대(代)를 지났으되 조종(祖宗)이 거행하지 않은 일이니, 지금 추복(追復)하고 예장할 수 없다.」 한다면, 세조(世祖)께서 무인년510) 에 하신 훈계로써 밝히겠습니다. 예종(睿宗)께 훈께하시기를 「나는 곤란한 때를 당했었지만 너는 순탄한 때를 당했는데도, 나의 행적(行跡)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른다면 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일이란 거행할 수 없는 때가 있고 거행할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인데, 어찌 의 일에 구애되어 변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대명 황제(大明皇帝)경태(景泰)511) 를 추복한 어진 일이 뚜렷이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의하시어 채택하소서.’

하였는데, 명하여 승정원에 보이게 하시자,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신이 이 상소를 보건대 「소릉을 추복하자」 하였는데, 이는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것을 지금 남효온이 함부로 의논한 것이니, 역시 불가합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소릉을 지금 복구할 수 없다.’ 하셨고, 이튿날 경연(經筵)에서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르시기를 ‘어제 유생(儒生) 남효온의 상소에 소릉 폐한 일을 말하였으나, 선왕(先王) 때의 일이어서 사세가 복구하기 곤란한데, 경 등은 아는가?’ 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주대(奏對)하기를 ‘그 상소한 말을 보건대, 모두 지나치고 절당하지 못한 것이어서 진실로 채택하여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그때의 말을 보건대 지극히 자상하고 세밀하다. 그러나 조종 때의 오랜 일로서 가벼운 일이 아닌 듯하니, 정부(政府)·부원군(府院君)·육조 참판·한성부 전원으로 하여금 의계(議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26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註 502]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 [註 503]
    권씨(權氏) : 문종 비.
  • [註 504]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505]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506]
    상왕(上王) : 단종.
  • [註 507]
    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508]
    병자년 : 1456 세조 2년. 이해 6월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註 509]
    약·사·증·상(禴祀蒸嘗) : 중국 주대(周代)의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의 이름으로, 사는 봄, 약은 여름, 상은 가을, 증은 겨울 제사이다.
  • [註 510]
    무인년 : 1458 세조 4년.
  • [註 511]
    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로, 경제를 가리킨다. 영종(英宗) 때 성왕(郕王)으로 있다가, 영종이 북정(北征)하는 사이 황태후(皇太后)에 의해 제위에 올랐으나 8년 만에 영종에 의해 폐위되었다.

○領議政柳順汀等, 考昭陵首末啓之。 其略曰: "辛酉七月丁巳, 權氏薨, 【是日魯山生。】 壬申五月丙午, 文宗薨。 丙子五月乙巳, 命左承旨具致寬, 往義禁府, 問成三問曰: ‘上王亦與知汝謀乎?’ 三問曰: ‘知之。 權自愼告其母, 通于上王, 後自愼尹令孫等, 累進約告期。 其日朝自愼先詣昌德宮, 上王賜長刀子。’ 致寬又問自愼, 答如三問。 丁丑六月, 議政府啓, 顯德王后 權氏阿只及弟自愼謀反。’ 伏誅, 其父已追廢爲庶人。 且魯山君得罪宗社, 已降封君, 其母不宜尙保名位, 請追廢爲庶人, 改葬, 從之。 成宗戊戌年, 幼學南孝溫上疏, 其一條曰: ‘謹按我世祖惠莊大王, 以天錫勇智, 挾日月之明, 得天人之助, 廓淸大難, 化家爲國。 宗社旣危而復安, 斯民旣死而復生。 不意丙子歲, 群奸煽亂, 相繼伏誅, 餘禍所及, 昭陵見廢, 二十餘年, 冤魂無依, 臣不知文宗在天之靈, 肯獨享禴祀蒸嘗哉? 臣不學無術, 聞見淺鄙, 固不知某事招某祥也, 某事招某災也。 然稽之於事, 酌之於心, 則吾之心卽天地之心, 吾氣卽天地之氣, 人心人氣之順, 乃天心天氣之順也, 人心人氣之不順, 乃天心天氣之不順, 天心天氣之不順, 災之所以降也。 臣愚妄意, 昭陵之廢, 於人心未順, 天心所未順, 從可知矣。 縱曰毁之主, 禮不當復入宗廟, 唯當追復尊號, 改以禮葬, 一如先后之禮, 以答民生, 以答天譴, 以答祖宗之意, 出於尋常萬萬也, 豈不美哉? 若曰: ‘廢之, 更歷三代, 祖宗所未擧行者, 今不可追復禮葬, 則請以世祖戊寅之訓明之。’ 其訓睿宗曰: ‘予當屯而汝當泰。 若局於吾跡, 而不知變通, 則非所以順吾志也。’ 夫事有可行時, 有不可行時, 豈可泥於前, 不用變通哉? 況我大明皇帝追復恭之仁, 昭昭在天地間哉? 伏願殿下, 留神採擇焉。’ 命示承政院, 都承旨任士洪啓曰: ‘臣觀此跡, 其曰追復昭陵, 此臣子不得議。 今孝溫擅議之, 亦不可也。’ 傳曰: ‘昭陵今不可復。’ 翼日經筵, 上顧謂左右曰: ‘昨日儒生南孝溫上疏, 言廢昭陵, 先王朝事, 勢難復之。 卿等知否?" 領事鄭昌孫對曰: ‘見其疏言, 皆過越不切, 固難採行。’ 云。" 傳曰: "今觀其時之言, 至爲詳密。 然祖宗久事, 似不輕易。 令政府、府院君、六曹參判、漢城府, 專數議啓。"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626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