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김수동의 졸기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이 졸(卒)하였다. 김수동은 성품이 단중(端重)하고 온아(溫雅)하며,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또 정사에 숙달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우의정이 되었는데 갑자 사화(甲子士禍)를 당하여 사류(士類)가 거의 다 주륙을 당하게 되었을 때 김수동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온전히 살아나게 된 사람이 또한 많았다. 반정(反正)한 뒤에 또한 수상이 되었으나, 병이 있으므로 청하여 그 녹봉(祿俸)을 사양하였으니, 그의 근신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기절(氣節)이 모자라고 일을 드러내서 밝힌 것이 없다.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는데, 일을 하여 사리에 맞는[施而中理] 것이 문(文)이요, 낮이나 밤이나 경계한[夙夜警戒] 것이 경(敬)이다.
사신은 논한다. 김수동이 연산군 말년에 어머니의 상사를 당하여, 단상(短喪)356) 하는 제도에 따라 길복(吉服)357) 으로 벼슬하였고, 반전한 뒤에도 안연(安然)히 조정에 나와 나라 일을 의논하고, 담소(談笑)하기를 전과 같이하여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고, 열흘이 되어도 사직하지 않았었다. 이미 훈적(勳籍)에 참예하여서는 또 제 아제비 김무(金珷)와 아우 김수경(金壽卿)을 위하여 청하여 훈적에 기록되게 하고서야 비로소 사직을 청하였다. 대신들이 김수동의 뜻을 알아차리고 기복(起復)358) 하기를 청하였는데, 유자광(柳子光)이 홀로 ‘전쟁이 있지 않은데 기복함은 불가하다.’고 하여, 상이 유자광의 의논을 따르므로, 김수동이 부득이하여 물러갔다. 아아, 장정(張珽)359) 은 무관으로서 비록 억지로 당시의 제도를 따랐으나, 반정하는 날에 즉시 집으로 물러가 거상(居喪)하였는데, 김수동은 한 때의 명망(名望)을 다소 지녔던 자로서 대절(大節)에 있어서 이러하였으니, 어찌 무관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8책 1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598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註 356]단상(短喪) : 삼년상의 기간을 24일로 단축한 것.
- [註 357]
○領議政金壽童卒。 壽童性端重溫雅。 少有文名, 工隷書, 又練達政事。 燕山朝, 爲右議政, 當甲子之禍, 士類誅夷殆盡, 壽童周旋其間, 賴以全活者亦多。 反正後, 又爲首相, 有病請辭其祿, 其謹愼如此。 然少氣節, 無所建明。 諡曰文敬, 施而中理曰文, 夙夜警戒曰敬。
【史臣曰: "壽童當燕山之末, 遭母喪, 從短喪之制, 吉服從仕。 及反正之後, 安然隨班, 同議國事, 談笑自若, 略無戚容, 浹旬不去。 旣參勳籍, 又爲其叔金珷、弟壽卿, 求得參錄。 始請辭職, 大臣揣知壽童之意, 請起復, 柳子光獨以爲, 非有金革之變, 而起復不可, 上從子光之議, 壽童不得已退去。 噫, 張珽武夫也, 雖勉從時制, 反正之日, 卽退家居憂, 壽童稍有一時名望, 而大節如此, 寧不爲武夫之罪人哉?"】
- 【태백산사고본】 8책 1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598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 [註 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