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충신 효자 열부의 명단을 속간하여 책을 만들게 하다
앞서 상이 중외에 교유하기를,
"본조(本朝) 충신·효자·열부의 사적이 미처 도사(圖寫)되지 못한 자를 빠짐없이 찾아 내어 속간(續刊)하여 책을 만들라."
하였는데, 예조가 각도에 이를 알려서 절의(節義)로 정표할 만한 사람의 성명·직함을 빠짐없이 적어 올리게 하였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남곤(南袞)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김제군(金堤郡) 향리(鄕吏) 이당(李堂)의 아내 똥금(同叱金)은 이당이 죽은 후 15년 동안 복을 벗지 않고서 침실 곁에 흰 장막을 베풀어 신주를 그 안에 모셔 놓고 조석 때마다 성심으로 전 드리기를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순창군(淳昌郡) 관비(官婢) 강아지(姜阿之)는 연소하여 시집가지 않았을 때, 마침 훈도(訓導) 유문표(柳文豹)가 그를 첩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는 유문표가 갈려간 후 수절하고 있다가 유문표가 죽자 3년 동안 복을 입었고 상을 마친 후 그의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유문표의 형의 집에 숨어 모면하였습니다. 그는 늘 몸치장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몇 해 안 되어 그 부모는 갖은 수단으로 꾀어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즉시 머리를 자르고 유문표의 집으로 도망쳐가서 지금까지 수절하고 있습니다.
부안현(扶安縣) 진사(進士) 송세정(宋世貞)은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아비 웅(雄)이 등창이 나 백약이 무효하자 그는 주야로 등창의 피를 빨아내 근이 아주 빠져 버려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그의 아비가 죽어서는 3년 동안 시묘하면서 오신(五辛)172) 을 먹지 않아 온 고을이 모두 그의 효성을 칭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미 김씨(金氏)가 아직 살아 있는데 대단찮은 병이 있어도 의대(衣帶)를 풀지 않고 몸소 약을 달이며 가세는 비록 빈궁하여도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구하여 봉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흥덕현(興德縣) 향리(鄕吏) 진간(陳侃)의 아비가 임질(淋疾)을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진간은 울부짖으면서 몸소 빨아내 그 병이 곧 나았습니다. 학생(學生) 김응(金膺)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아내 진씨(陳氏)가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곡하면서 전을 드렸으며 상을 벗은 뒤에도 매월 삭망제(朔望祭)를 폐하지 않으면서 조석으로 슬피 울었습니다.
옥구현(沃溝縣) 유학 양성윤(梁成允)은 그 아비 전(甸)이 나이 60이 넘어 풍병(風病)을 앓아 여러 해 동안 병석에 누웠는데 양성윤은 주야로 의대를 풀지 않고 대소변을 볼 때마다 문득 업고 출입하는가 하면, 죽을 임시에는 그 대변을 맛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전이 죽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슬픔을 다하였으며, 그 어미 장씨(張氏) 역시 지병이 있어 10여 년 동안 병석에 누웠으되 아비처럼 한결같이 시봉하였으며, 그 어미가 죽자 역시 시묘하면서 예를 갖추어 조석으로 전을 드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전후 6년 동안 동구 밖을 나가지 않고 자식의 직분을 극진히 하였습니다.
임실현(任實縣) 생원(生員) 박번(朴蕃)은 그 아비가 병으로 고생하자 그 대변을 맛보아 사생(死生)을 징험하였으며, 아비가 오리를 먹고 싶다 하자 그는 형제들을 거느리고 며칠 동안 물가에 가 구하되 얻지 못하자 팔뚝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러자 난데없는 오리가 물에 떠 나오므로 그것을 가져다가 공궤하였으며, 아비가 죽어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강진현(康津縣)에 사는 전 현감(縣監) 고수정(高水精)은 어미의 상을 당해 빈소 앞에 엎드려서 거의 한 달 동안 음식을 조금도 먹지 않았으며, 장례를 치른 뒤에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죽을 먹으면서 3년을 마치되 전물(奠物)은 자신이 손수 지었습니다. 거상을 마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혹 부모의 일을 말하게 되면 일찍이 실성 통곡(失聲慟哭)하지 않는 적이 없다 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8책 15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574면
- 【분류】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출판(出版)
- [註 172]오신(五辛) : 다섯 가지 자극성이 있는 나물, 즉 파·마늘·부추·생강·염교.
○先是, 上敎諭中外曰: "本朝忠臣、孝子、烈婦事績, 未及圖寫者, 竝無遺搜摭, 續印成冊, 禮曹行移各道, 節義可旌人姓名職銜, 使無遺牒報。" 至是, 全羅道觀察使南袞啓: "金堤郡鄕吏李堂妻同叱今, 李堂身死後, 十五年未嘗除服, 設素帳於寢房之側, 置神主其內, 每朝夕, 誠心酹奠, 一如其初。 淳昌郡官婢姜阿之, 年少未適人, 時訓導柳文豹娶爲妾, 及文豹遞去後守信, 文豹身死, 服喪三年。 喪畢, 其父母欲改嫁, 不從, 投匿文豹兄舍得免。 居不事容飾, 不數年, 其父母多方誘之, 又欲改嫁, 卽斷髮, 逃歸于文豹之家, 至今全節寡居。 扶安縣進士宋世貞性至孝。 其父雄得背癰, 百藥無效, 晝夜吮血, 瘡根盡出, 以至得生。 及歿廬墓三年, 不食五辛, 鄕閭稱孝。 其母金氏尙存, 如有小疾, 不解衣帶, 躬自湯藥, 雖家業貧窮, 而必求甘旨, 奉養不懈。 興德縣鄕吏陳侃之父, 得淋疾濱死, 侃涕泣親吮, 其痛遂愈。 學生金膺, 無子而死, 其妻陳氏, 備禮斂葬, 泣奠三年。 終制後每月朔望, 祭祀不撤, 朝夕哀泣。 沃溝縣幼學梁成允, 其父甸年踰六十, 得風疾, 臥床數歲, 成允晝夜不解衣帶, 每當大小便, 輒負以出入, 臨死嘗糞。 旣而甸沒, 廬墓三年盡哀。 母張氏亦以宿疾, 臥床十餘年, 侍奉一如父。 及歿, 又廬于墓側, 朝夕禮奠, 前後六年, 不出洞口, 克盡子職。 任實縣生員朴蕃, 其父病苦, 嘗糞以驗死生。 父欲嘗鴨, 乃率同腹, 行求水邊, 數日不得, 乃拊臂號慟, 忽有鴨浮出水面, 持以饋之。 父歿, 廬墓三年。 康津縣居前縣監高水精, 遭母喪, 俯伏殯前, 勺飮不入口者幾一朔, 及葬廬於墓側, 啜粥終三年, 奠物親自炊(㸑)〔爨〕 。 終制後, 鄕人或有言及父母之事, 未嘗不號慟失聲云。"
- 【태백산사고본】 8책 15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574면
- 【분류】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