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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4월 8일 정해 3번째기사 1511년 명 정덕(正德) 6년

부안 현감 김개가 군무·어전·번상 등의 일로 상소하니 정원에 내리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김개(金漑)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이번 군적(軍籍)을 고칠 때, 산간 고을의 조졸(漕卒)과 연해 지방(沿海地方)의 육군을 서로 바꾼다고 한 것은, 군정(軍政)을 의논하는 자가 무슨 소견이 있어 이렇게 한 것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최근 수년간에 조운(漕運)이 실패가 많으니, 이는 ‘산간 고을 거주민들이 배를 부릴 줄 몰라서, 많은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하여, 이 계책이 있었는가 합니다. 그러나 구군졸(舊軍卒)은 산간 고을에 살더라도 그 업을 대대로 전하여 실지 조운하는 일에 익숙하고, 신군졸(新軍卒)은 해변에 가까이 살아도 본업이 육군이니, 배에 대한 일에는 결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전혀 알지 못하는 군졸에게 조운선을 맡겨 풍파 위로 몰고 가게 한다면, 취패(臭敗)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근자에 듣건대, 신군졸들이 조선(漕船) 개조하는 일을 모르므로, 재산을 털어 사람을 고용해서 만들어 조선소에서 전세(田稅)를 싣는 곳으로 돌아온다 합니다. 빈 배를 전운(轉運)함이 어려운 일이 아니요, 해로가 멀지 않은데도 자신이 전운하지 못하고 사람을 고용하여 전운하는데, 더구나 창해 풍파에 여러 날을 전운하여 스스로 서울까지 닿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감당하지 못하여 재산을 내어 사람을 사서 전운할 것이니, 그 폐해가 하나입니다.

대저 사람의 재주는 한정이 있으니, 스스로 뛰어나서 문·무과 출신이 되는 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중 좀 재주가 있는 자는 혹 녹사(錄事)·습독(習讀)이 되어 벼슬길에 이르며, 혹은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제몸의 벼슬을 지킵니다. 그런데 조수군(漕水軍) 같은 경우는, 양과(兩科) 외의 모든 잡과(雜科)의 사로(仕路)에 다 통하지 못합니다. 지금 산간 고을 조군의 정원을 바다 가까운 고을에 옮기면 근해 지방의 백성이 태반은 조졸(漕卒)이 될 것이니, 혹 제 스스로 잡직(雜職)의 벼슬아치가 되고 싶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억울이 이보다 더 큼이 없으니, 그 폐해가 둘입니다.

또 조졸이 처음에는 본도의 전세(田稅)를 수운하고, 다시 충청도 전세를 수운하여 1년 동안에 혹 두 번씩 전운하기도 합니다. 또 경창(京倉)에 수납(輸納)할 때에는 거의 다 모감(耗減)되어 그 모자라는 것을 한 배의 군졸이 모두 나누어 바치게 되니, 원근의 일족이나 절린(切隣)이 그 해를 입습니다. 이 번이 그러하니 다음 번도 그리하여, 조졸의 생계는 날로 군색해집니다. 조종조에서 처음 조졸을 설치할 때에, 어찌 다 연해 거민으로 충당하여 조참(漕站)에 나가기에 편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이 군졸이 평민 중에서 제일 괴로운 자들이므로 대개 산간 고을의 백성들도 아울러 충당하여 힘드는 것을 고르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결같이 산간 고을 조졸을 모두 근해 거민으로 바꾼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연해 지방 고을은 3∼4년을 지나지 않아 민생이 궁핍해져서 끝내는 구언할 수 없게 될까 염려되니, 그 폐해가 셋입니다. 대신에게 하유하시어 한결같이 구법을 준수하고 서로 바꾸지 말게 하여, 길이 민폐를 제거하소서.

국가에서 왜적이 변경을 침구한 후로 남쪽 지방 군민 중 무재(武才) 있는 자를 다 추려내어 번을 나누어 방수(防戍)하여, 다시 침구하는 변에 대비하는 것은 생각이 매우 원대합니다. 대저, 군사가 많으나 정밀하지 못하면 적고 정밀함만 못합니다. 적이 오는데 우리 군사가 먼저 지쳐 벌써 노병(老兵)이 된다면 비록 많은들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각진(各鎭)에 번을 나누어 수자리하는 군졸을 본지의 원 군사와 합하면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니, 방비하는 일을 잊지 않고 밤낮으로 정려한다면 또한 도둑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추동 간에 왜노(倭奴)의 거짓말로 인하여, 번(番)을 합하여 방수(防戍)시키고 종군하는 집에서 수개월의 양곡을 준비하게 하니, 능히 스스로 계속 운수할 수 있는 자 몇 사람이겠습니까? 둔병(屯兵)한 곳에 주리고 궁핍함이 문득 이르러, 인마가 엎어지고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니, 주리고 궁핍하고 게으르고 미련한 군졸로 강한 도둑의 불의의 변에 대처한다면 패망하지 않을 자 드물 것입니다. 수자리를 파할 기약이 없으니 해가 지날수록 군사는 더약해져서 도둑을 대적할 수 없고 변방 성지(城地)를 보전할 수 없겠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평시에는 번을 나누어 방수하여 번갈아가며 군마의 힘을 쉬게 하여, 도둑떼가 변방을 침범하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지키다가 힘이 대적할 수 없게 된 뒤에, 또 하번(下番) 군사를 징집하여 제어함이 가할 듯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모신(謀臣)들에게 수의하여 영세 장구한 계책을 도모하소서.

국가가 연해 지방의 백성에게 어전(魚箭)을 세워 고기를 잡아서 그 이를 얻게 하고, 또 세납 고기를 사재감(司宰監)에 바치게 한 것이 옛 규례였는데, 지난 폐조(廢朝) 신유년224) 에는, 각도의 어전세를 모두 포목으로 바꾸어 사섬시(司贍寺)에 바쳐, 국가 경비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어전이 과연 이익이 많은 것이라면, 빈민에게 주어 그 생계로 삼게 함이 마땅합니다. 국가에서는 들어오는 것을 계량하여 비용을 삼고, 또 함부로 쓰지 않는다면 상례로 공납(貢納)하는 수량으로도 경상비에 부족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어전에서 거두어 들여 백성들과 이익을 다툰 후에 쓰기에 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처음 상정(詳定)할 때 황폐한 어전에 절반을 추가 과세하였으니, 세납을 산출하는 잔재주가 심합니다. 대저 백성이 고기를 잡는 데는, 자진하여 나가서 이(利) 얻은 것을 허가하고 거기에 따라 세를 받는 것은 그런대로 가하지만, 힘이 혹 미치지 못하고 혹은 사고로 황폐하게 되었는데도 그대로 그 절반을 세 받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신이 맡은 부안현 서해에 활도(猾島)가 있는데, 옛날부터 청어(靑魚)가 많이 나서 서민(庶民)들 중 전답 없는 자들이 섬을 의지하여 어전을 매고 이를 보는데, 예전에는 15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상정할 때, 이 섬 어전의 이가 다른 곳의 배나 된다 하여 청어의 수량을 많이 정하니 관에 바치는 수량이 많다고 하겠으나 전일 많이 잡힐 때에는 백성들이 그런대로 어전 설치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지난 을축년225) 뒤로는 청어가 나지 않고 세납은 전과 같아, 어전 설치자들의 소득이 바치는 수량을 충당하지 못하니, 지난 정묘년226) 간에 국가에서 그 폐를 분명히 알고, 병인년 이전의 황폐한 어전은 모두 세를 거두지 말게 하며, 정묘년 이후의 황폐한 어전은 자세히 실지를 캐어 세를 면하게 하니, 덕이 지극히 넉넉합니다. 그러나 병인년 이전의 것은 실지 황폐했어도, 경차관(敬差官)227) 이 어전 설치한 준례대로 문서를 만들었으니, 세납 공물의 징수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묘년에 세안을 마련하는 도회관(都會官)이, 수교(受敎)의 본의는 헤아리지 않고 황폐한 어전에 대하여 절반을 더 세로 징수하는 것으로 시행하니, 국가에서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가 지극하지 않음이 아니나 백성으로서 은택을 입지 못함이 이러하니, 역시 통렬히 개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기사년228) 가을 본 임지에 와서 세공(稅貢)의 미납을 상고하니, 그 수가 매우 많았으므로 그 연유를 물으니 ‘전에 어전 설치한 자가 태반이나 도망가고 이웃 백성들도 따라 도망갔으며, 현재 있는 자도 재산이 없어 여러 해를 납입하지 못한 것이다.’ 합니다. 신이 곧 그 세공의 수량을 구획(區劃)하여 인리 족친에게 나누어서, 일시에 독촉 진수하지 않고 수년을 기한하여 준비되는대로 납입하게 하였는데도, 지금까지 3년 동안 징수된 것이 아직 절반이 못 되며, 민생이 궁핍하여 다시 징수할 형편도 되지 못하므로 신이 그윽이 생민을 위해서 매우 아깝게 여깁니다. 두어 고을 백성의 황폐한 어전 세납을 감할 수 있을 때가 없고, 전일 세 받지 말라는 전지(傳旨)는 허문(虛文)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의 구법을 따르시어, 빨리 어전세로 포목을 사서 바치는 것을 없애고 어물만을 거두어서 백성들과 이를 다투지 않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활도같은 데는, 병인년 이후 3년 간의 묵은 어전세를 역시 해조에 명하시어, 그 미납된 수량을 상고해서 우선 임시로 절반을 감하여 고을 인민의 걱정을 풀어주소서.

국가에서 외방에 거주하는 공천(公賤)으로 번을 나누어 선상(選上)229) 하는 것을 형조에서 다 관장합니다. 전에는 번차(番次)가 정액(定額)이 없어서, 분정(分定)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할 때에,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번차의 드물고 잦음이 거의 공평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계해년230) 간에, 국가에서 이런 폐단을 징계하여 여러 곳에서 정하여 올리는 수를 외방에 사는 노자의 수와 대조하여 7번으로 나누었습니다. 법을 마련한 처음에는 선상의 일이 과연 균일하여, 3년을 지나 번을 들게 되니 백성들의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10년이 못 되어 선상하는 번차가 점점 촉박해지니, 신은 적이 미혹합니다. 본 고을 공안(貢案)231) 의 선상하는 수는 8명뿐인데, 지난 경오년232) 춘하등(春夏等)에는 27명이요, 추동등에는 30명이며, 금년 춘하등에는 또 22명에 이릅니다. 더 정하여 행문 이첩하므로 공안의 수에 비하여 혹 2배가 넘고 혹 3배가 넘으니, 한 고을로 미루어 여러 고을의 수를 대개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공천으로서 선상되는 자는 백성 중에서 제일 고역으로, 한번 선상되며 그만 가산을 탕진하고 그래도 지탱하지 못하면 가솔을 이끌고 도망합니다. 분배 받을 각사(各司)가 한결같이 경저(京邸)233) 에 문책하니 경저의 주인은 월리(月利) 돈을 빌려 그 역을 대충하며, 이미 월리를 졌으니 또 그 수량을 배로 받아들입니다. 이러므로 자신이 지탱하지 못하여 또 같은 친족에게 징수하고, 친족이 지탱하지 못하여 또 절린(切隣)에 징수하여, 도로에서 걸식 대차하다가 구학(溝壑)에 떨어져 죽는 자가 자주 있습니다. 선상의 대가(代價) 같은 일은 거듭 법을 세워, 법이 좋지 않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곤궁하여 원망하는 자가 있으니, 법의 죄가 아니라, 해조가 그 법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의 액수가 적었다 많았다 하는 것은, 신의 생각에는 간사한 이속이 농락하고 사정을 부려 그 수를 가감함인가 합니다. 실제로 공안 중 각 고을의 정액(定額)을 상고하면 그 정실과 허위를 분변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또 선상의 공문이 미리 기한을 앞서오지 않고, 혹은 공문이 온 지 4∼5일도 안 되어 독촉해서 길을 떠나게 하니, 이것이 얼마나 영은 태만히 하고 기한은 급하게 하는 것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선상을 이미 나누어 7번으로 하였으면, 마땅히 정해서 번안(番案)을 만들어, 하나는 여러 도 각 고을에 간직하며 하나는 해조에 간직하고, 번을 갈 시기를 당하면 번 이름으로 기일에 앞서 공문을 보내어 가감할 수 없게 한다면, 이속이 사정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며 선상되는 종도 미리 번 차례를 알아 자연 행자(行資)를 마련하고, 대가를 준비하여 기한에 뒤지는 벌을 면하게 되겠습니다. 만일 부득이 정하여 보낼 곳이 증가되어, 선상의 액수가 부족하면 나누어 6번으로 하여도 되겠습니다. 지금 7번으로 나누고도 혹 3∼4배로 행문 이첩하니, 이것은 명목은 7번이지만 실지는 3∼4번으로 나누는 것만도 못합니다. 이것에 비한다면 6번도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대신들에게 내리어 의논하시어 만일 해조에서 이 몇 가지 일을 행할 수 있으면 행하게 하소서. 또 해조에 명하시어 법에 의해서 대가를 거두어 각사로 나누어 보내서, 각사의 관원이 마음대로 침책(侵責)하지 못하게 한다면 공천이 거의 제 자리를 얻게 되고 선상 또한 소생할 수 있겠습니다."

소를 정원(政院)에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

"해사로 하여금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할 것을 행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50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재정-잡세(雜稅) / 수산업-어업(漁業) / 신분-천인(賤人)

  • [註 224]
    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 [註 225]
    을축년 : 1505 연산군 11년.
  • [註 226]
    정묘년 : 1507 중종 2년.
  • [註 227]
    경차관(敬差官) : 지방 민정 등을 살피기 위하여 임금이 파견하는 관원.
  • [註 228]
    기사년 : 1509 중종 4년.
  • [註 229]
    선상(選上) : 시골의 노비를 뽑아 서울로 올리는 일.
  • [註 230]
    계해년 : 1503 연산군 9년.
  • [註 231]
    공안(貢案) : 공납 장부.
  • [註 232]
    경오년 : 1510 중종 5년.
  • [註 233]
    경저(京邸) : 서울에 있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맡아 보던 곳. 소관 지방민에게 침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지방에서 번상(番上)하는 이예(吏隷)나 군인들에 대하여도 책임을 지며, 공납물(貢納物)을 대납(代納)하기도 하였다. 이 일을 맡은 자를 경저리(京邸吏), 혹은 경주인(京主人)·저인(邸人) 등으로 불렀다.

扶安縣監金漑上疏, 其略曰:

今次改軍籍時, 以山郡漕卒, 與沿海居陸軍相換者, 臣不知議軍政者, 有何所見而爲爾也。 意者近數年間, 漕運多敗, 謂山郡居民, 不諳操舟, 致多輸敗, 有是策也。 然舊卒雖居山郡, 世傳其業, 實諳練漕運事, 新卒雖近海邊, 本業陸軍, 其於舟船之事, 斷不曉解。 以是專不曉解之卒, 委授漕船, 驅諸風波, 則其不爲臭敗者無幾。 近聞新卒, 不解漕船改造之事, 傾貲雇人以造之。 自造船所, 回泊於田稅逢載處, 空船轉運, 非是難事, 海路亦非阻遠也, 而尙不能自轉, 且雇人以轉之, 況於滄海風波, 曠日運轉, 其能自達於京師耶? 必不能堪也, 則必出資貲, 雇人以運之, 其弊一也。 大抵人之才性有限, 能自拔出, 爲文武科出身者幾何? 其稍有才性者, 或爲錄事, 爲習讀, 以達於仕路, 或爲甲士、別侍衛, 以衛其身, 如漕水軍, 則兩科外雜凡仕路, 皆不通. 今以山郡漕卒之額, 移之於近海之官, 則近海之民, 太半爲漕卒, 其或欲自爲雜職仕官, 其可得乎? 民之冤抑莫大焉。 其弊二也。 且漕卒, 初運本道田稅, 再運忠淸道田稅, 一年之間, 或再度轉運矣。 京倉輸納之時, 率皆耗減, 一船之卒, 皆被分徵, 遠近一族切隣, 亦蒙其害。 今番如是, 後番亦如是, 以此漕卒之生理日窘。 在祖宗朝, 初設漕卒時, 豈不欲盡以沿海居民充之, 以就漕站之便易也? 必慮此卒, 在平民中最苦者, 而槪以山郡之民, 竝充之, 以均苦歇也。 今者一以近海居民, 換盡山郡漕卒, 臣恐沿海之郡, 不出三四年, 而民生遂窘, 卒至於不可救。 其弊三也。 請下諭大臣, 一遵舊法, 勿令相換, 永除民弊。 國家自賊寇邊之後, 盡刷南方軍民有武才者, 令分番防戌, 以備更入寇抄之變, 慮至遠也。 大抵兵多而不精, 不若少而精。 敵至而我軍先憊, 已爲老兵, 則雖多亦奚以爲? 今者各鎭分番戍卒, 合本鎭元軍,則數非不多。 苟不忘備, 曰夜淬礪, 則亦可以制寇矣。 去年秋冬間, 因奴詐諼之言, 悉令合番防戍, 從軍之家, 備數月之糧, 能自繼運者幾人也? 屯兵之地, 飢窘輒至, 人馬轉踣, 逃散相繼, 以飢窘怠頑之卒, 待强寇不意之變, 則鮮不敗衂。 罷戍無期, 年愈多而兵愈弱, 寇不可敵, 而邊城不可保矣。 臣意謂平時莫如分番防戍, 遞休軍馬之力, 待寇奴犯邊, 且戰且守, 力不能敵, 然後且徵聚下番之軍以制之可也。 伏願殿下, 收議謀臣, 以圖永世久長之策。 國家於沿海, 聽民結箭捉魚, 以資其利, 且令納稅魚于司宰監, 古也。 頃在廢朝辛酉年間, 各道魚箭, 竝收貿布, 納于司贍, 以備國用。 臣謂魚箭, 果曰多利, 當給貧民, 以資其生可也。 國家苟量入爲用, 且無橫費, 則常貢之數, 其於經用, 亦非不足也, 不必收取於魚箭, 與民爭利而後足用也。 其初詳定時, 於陳荒魚箭, 追稅其半, 甚矣算稅之巧也。 夫民之取魚, 聽其自就資利者, 從而征之, 猶可也, 力或不能, 或因事故, 以致陳荒, 而又從以稅其半, 是甚無謂。 臣所守扶安縣西海, 有猾島, 自古靑魚多産, 齊民之無田畓生業者, 依島結箭資利。 舊不下十五餘所, 詳定時, 以此島魚箭, 取利倍他, 多定靑魚之數, 納官之數, 可謂多矣。 而前日興産時, 民猶樂於結箭矣。 自乙丑年以後, 靑魚不産, 而稅貢如前, 結箭者所得, 不能充其所納之數。 去丁卯年間, 國家約知其弊, 丙寅年以上陳荒魚箭, 則竝勿收稅, 丁卯年以後陳荒魚箭, 則詳加覈實免稅, 德至渥也。 然丙寅年以上, 則雖實陳荒, 而敬差官依結箭例, 旣已成案, 則稅貢何得以免徵乎? 丁卯年, 則稅案磨鍊都會官, 不究受敎本意, 於陳荒箭, 以半稅施行。 國家恤民之政, 非不至也, 而民不蒙其澤者, 類如是, 亦不可痛革者耶? 臣於己巳年秋, 到本任, 考其稅貢之未納者, 其數甚多。 詢問其由, 則前之結箭者, 太半逃亡, 隣氓又從而逃之, 見存者又無貲資, 以致累年不納者云云。 臣卽加區畫, 乃以稅貢之數, 分諸隣里族親, 不於一時督徵, 期以數年, 冀得隨備隨納。 而到今三載, 徵之者猶未半。 民生旣窘, 無復有可徵之勢, 臣竊爲生民痛惜焉。 數郡之民, 陳箭之稅, 無時可減, 而前日勿稅之旨, 特虛文耳。 伏願殿下, 遵先王故典, 亟除魚箭貿布, 只收魚物, 以示不與民爭利之義, 至如猾島, 丙寅年以後, 三年陳箭之稅, 亦願命該曹, 考其未納之數, 姑且權減其半, 以解數郡人民之愁怨。 國家以公賤之外居者, 分番選上, 刑曹悉掌之。 先是番次無定額, 分定行移之間, 吏緣爲奸, 番次疎數, 殆不公矣。 去癸亥年間, 國家懲此之弊, 以諸處定送之數, 照得外居奴子之數, 分爲七番。 立法之初, 選上之役, 果均一, 而越三年立番, 民無怨咨矣。 至今未十年, 而選上番次, 漸至於促迫, 臣竊惑焉。 本縣貢案選上之數, 只八名, 去庚午年春夏等二十七名, 秋冬等三十名, 今年春夏等, 又至二十二名, 加定行移。 比貢案數, 或過於二倍,或過於三倍, 由一邑, 而諸邑之數, 槪可見矣。 大抵公賤之爲選上者, 凡民中最苦。 一遭選上, 輒蕩家産, 猶未能支, 則相率而逃之。 定送各司, 一皆責之於京邸, 京邸之主, 貸月利以充其役, 旣負月利, 則又倍徵其數。 是以當身不能支, 又徵於一族, 一族不能支, 又徵於切隣, 丐貸於道路, 轉死於溝壑者, 比比有之。 如選上代價等事, 再再立法, 法非不善, 而猶有困窮之怨者, 非法之罪也, 該曹不能奉行其法耳。 至於番額低昻事, 臣恐奸吏冒弄行私, 以加減其數也。 苟考其貢案內各官定額之數, 則其情僞不難辨矣。 且選上之行移, 曾不先期。 或到文未四五日, 督令登途, 是何慢令致期之甚也? 臣謂選上, 旣分爲七番矣, 則當定爲番案, 一藏於諸道各官, 一藏於該曹, 每當遞番之期, 旣以番名, 先期行移, 毋得加減, 則吏不得行私, 而選上奴子, 亦預知番次, 自可以儲行資備代價, 而亦免後期之罰矣。 若有不得已加定送處, 而選上額數不足, 則分爲六番, 亦可也。 今分爲七番, 而或三倍或四倍行移, 則是名爲七番, 而其實不足, 爲三四番也。 以此而較之, 則六番亦未爲苦也。 臣願下議大臣, 若該曹凡此數事, 可行則行之。 且命該曹, 依法收代價, 分送各司, 無令各司各員, 擅加侵責, 則公賤幾於得所, 選上亦幾於其蘇矣。

下其疏于政院曰: "其令該司, 祛其可祛者, 行其可行者。"


  •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50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재정-잡세(雜稅) / 수산업-어업(漁業) / 신분-천인(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