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악의 폐지 여부를 의논하여 내연에만 쓰고 정전에는 쓰지 말 것을 정하다
유순(柳洵)이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 풍속에 기악(妓樂)이란 것이 있어서 안팎에 통용되니 정전(正殿)의 예연(禮宴)에도 사용합니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그대로 따르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아서, 간혹 개혁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마침내 고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제 최숙생(崔淑生) 등의 논계(論啓)를 보니 과연 정론입니다. 무릇 연향(宴享)에서 외정(外庭)에는 오로지 남악(男樂)만을 사용하여도 부족이 없을 것이며, 내정(內庭)에서는 여염에 있는 여자와 광대를 선택하여 명부(名簿)에 올려 두고 사용한다면 가합할 듯합니다."
하였다. 유순정·황맹헌(黃孟獻)의 논의도 이와 비슷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은 의논드리기를,
"여악은 음악의 바른 것이 아니니 폐지하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다만 여악을 폐지하면 마땅히 남악으로 대신해야 할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옛습관에 따라 여악을 사용해 온 것이 이미 오래기 때문에 남자로서 음률을 아는 자가 적을 것이니, 반드시 교습하여 재주를 성취한 뒤라야 쓸 수 있을 것이므로, 사세가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남악의 인원수와 교습 절목과 성재(成材)의 지속(遲速) 정도를 마련 작정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성희안은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는 전조로부터 여악을 사용하였는데, 정치에 손실이 있을 뿐 유익함이 없습니다. 만약 내연(內宴)에만 여악을 사용해야 한다면 정전(正殿)에서는 쓰지 말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안에서만 사용하고 정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울에 있는 수를 또한 참작하여 감할 수 있을 것이며, 작은 고을의 기녀는 더욱 전폐할 수 있을 것이니, 해사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정광필(鄭光弼)·강혼(姜渾)·신용개(申用漑)·성세정(成世貞)·권균(權鈞)·정미수(鄭眉壽)·박열(朴說)·한세환(韓世桓)·김봉(金崶)·성몽정(成夢井)·홍숙(洪淑)의 논의도 이와 비슷하였다. 노공필(盧公弼)은 의논드리기를,
"여악에 대한 일은, 전일의 수의(收議) 때에 신은 개혁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다만 진풍정(進豊呈) 때는 음악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그 수를 줄여서 공용(供用)에 대비하게 하고, 따로 엄중한 금령을 세워서 외간(外間)으로 하여금 빌어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박안성(朴安性)은 의논드리기를,
"신이 두 번이나 명(明)나라에 가서 보니, 잡희가 있을 뿐이고 여악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폐주의 광망함이 실로 여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신의 의견으로는 이 폐해를 단연코 개혁하여 조정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민효증(閔孝曾)은 의논드리기를,
"음탕한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은, 처음에는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고 마침내는 화를 끼치게 하므로 마땅히 멀리 해야 할 것이니, 이제 이 논계는 진실로 지당한 언론입니다. 그러나 조종조에서 무슨 일을 위하여 이 여악이 있었으며, 그뒤에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무슨 일로 버리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초에 이것을 설치한 뜻과 그뒤에 버리지 않은 뜻을 먼저 자세히 살펴서 그 가부를 논하여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폐지할지라도 혹 다른 날 이론이 일어나서 지금의 이 지당한 논의가 결국 중간에 폐지될 염려가 있습니다. 또 내정(內庭)의 곡연(曲宴)324) 이나 외정(外庭)의 연례(宴禮)에 풍악이 없을 수 없으니, 그때에 이 여악을 버리고 따로 베풀어 시행할 방법을 만들어, 먼저 시험하여 힘써 인정에 합치하고 사체(事體)에 마땅하게 한 뒤에 버리는 것이 또한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비록 버릴지라도 다른 날 곡연·예연(禮宴) 때에 혹 다른 의논이 생겨서 지금의 이 지당한 논의가 또한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계남(李季男)·남곤(南衮)은 의논드리기를,
"대간이 여악의 폐해를 아뢴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한편으로 폐조의 실정을 징계하고 한편으로 음란한 풍습을 구제하는 것이니, 그 이해를 비교한다면 폐지함이 마땅한데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초에 설치한 뜻을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습니다. 혹 수졸(戍卒) 중 집 없는 자를 위하여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꼭 그러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본의를 탐구한다면 또한 응당 필요가 있어서 만들었을 것이고, 황음(荒淫)의 기구를 삼고자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처음 창설한 뜻의 근원을 찾지 않고 그 폐해만을 교정하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폐지하였다가, 이미 폐지한 뒤에 음란한 풍습이 오히려 있게 되면 그 폐해가 오늘날보다 더 심하지 않을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정전(正殿)에서 개연(開宴)할 때에 대개 여악을 사용하지만 우러러보기에 매우 미편합니다. 조종(祖宗)의 옛 풍습에 따르는 것이기는 하나 실로 좋은 법[令典]은 아니니, 성세(聖世)에 있어서 단연코 먼저 혁폐하여, 보고 보이는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자전(慈殿)께 상수(上壽)하는 날 풍악을 쓰지 않을 수 없다면, 이 무리를 존치(存置)하여 장락(長樂)325) 의 즐거움에 이바지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만, 그 이름이 악적(樂籍)에 붙여 있는 자의 수가 지나치게 많으니, 마땅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옛인원수를 재량(裁量) 감손해서 약소하게 하여 쓰기에 족할 만하게 하고, 외방은 고을의 잔피(孱疲)하고 번성함을 구분하여, 폐지해야 할 곳은 폐지하고 또 거듭 법금을 명시한다면 거의 폐해가 있기에는 이르지 않고, 또 다시 고치는 소동이 없어서 편당(便當)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손(李蓀)·홍경주(洪景舟)의 의논도 이와 비슷하였다. 김응기(金應箕)는 의논드리기를,
"본조(本朝)에서 여악을 사용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입니다. 세종·성종이 나라를 누린 것이 거의 60년, 모든 예악·문물의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은 다 고쳤는데 이것만은 홀로 옛것에 따르고 변경하지 않았으며 《대전(大典)》에 기재하기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으로 이제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안윤덕(安潤德)의 의논도 이와 비슷하였다. 고형산(高荊山)은 의논드리기를,
"진풍정 때에 여악이 없을 수 없으니, 이제 만약 개혁하고 진풍정 때에 따로 다른 여악을 쓴다면 그 폐해가 기녀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또 옛날에 기녀를 설치한 것은 수졸(戍卒)로서 아내 없는 자를 위하여 만든 제도입니다. 신이 오래도록 변방에 있으면서 장사(將士)들의 고통을 자세히 보았는데,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떠나서 아주 먼 지역에 와서 수자리하면서, 빠른 자도 일주년이 되어야 교대하고 오랜 자는 간혹 3∼4년에 이릅니다. 나그네의 괴로움이 한둘이 아니건만 집을 잊고 굳게 지키는 것은 오로지 이것으로써 스스로 위로할 뿐인데, 하루아침에 혁폐하여 기녀가 각기 남편이 있게 되면, 혹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법을 어기면서 서로 관계하게 되어 작으면 그 지체(肢體)를 상하고 크면 그 생명을 해칠 것이니, 한갓 풍화(風化)에 누가 될 뿐만 아니라 방어(防禦)가 이것으로 인하여 소홀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기녀를 혁폐하는 것이 폐해를 없애기 위한 것인데 다만 피해를 더할 뿐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여악을 권의(權宜)에 따라 예대로 두되 서울에서는 다만 진풍정에만 사용하고 정전(正殿)에는 쓰지 않으며, 지방에서는 큰 고을에는 그대로 두고 잔읍(殘邑)에는 혁폐하며, 또 금령을 세워서 욕정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편당(便當)할 것 같습니다."
하고, 한형윤(韓亨允)은 의논드리기를,
"여악을 설치한 것은 멀리 전조부터여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나, 혁폐하고자 하는 논의 또한 사리에 맞습니다. 다만 진풍정 때에는 여악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양계(兩界)의 변군에도 또한 갑자기 폐지할 수 없습니다. 전조의 일은 논평할 것이 없고, 아조의 세종·성종께서 나라 다스린 햇수의 오램이 거의 60여 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모든 제도와 문물이 법에 어그러짐이 있는 것은 개혁하지 않은 것이 없건마는 홀로 이것만을 예대로 따랐으니 어찌 까닭이 없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백리의 풍속도 다 같기가 어려운 것이니 조종의 옛법을 경솔하게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리가 창기에게서 자는 것을 금하는 법은 거듭 밝혀야 마땅하며, 잔폐(殘幣)함이 가장 심한 곳에는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성희안의 논의를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47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신분-천인(賤人) / 예술-음악(音樂)
○柳洵議: "國俗有妓樂, 中外通用, 雖正殿禮宴, 亦用之。 歷世因循, 不以爲怪, 或有欲革之者, 而終不能革。 今觀崔淑生等論啓, 果正論也。 凡宴享, 外庭專用男樂, 未爲欠闕, 內庭卽用閭閻間所有女伶, 選擇著籍用之, 意或可也。" 柳順汀、黃孟獻議, 類此, 金壽童議: "女樂非樂之正者, 革之甚當。 但革女樂, 當以男樂代之, 我國因循用女樂已久, 男人解音律者蓋寡, 必須敎習成才, 然後可用, 勢難猝改。 令該曹男樂額數與敎習節目, 成才遲速, 磨鍊酌定以啓後, 更議施行何如?" 成希顔議: "我國自前朝, 用女樂, 於爲治, 有損無益。 若內宴當用之, 宜於正殿不用。 只用於內, 而不用於正殿, 則在京之數, 亦可量減。 殘邑之妓, 尤可全除, 令該司磨鍊施行何如?" 鄭光弼、姜渾、申用漑、成世貞、權鈞、鄭眉壽、朴說、韓世桓、金崶、成夢井、洪淑議, 類此。 盧公弼議: "女樂事前日收議時, 臣以爲當革, 今無他議。 但進豐呈時, 不可無樂, 又無可代之人。 臣意宜約留其數, 以備供用, 別立重禁, 使外間無得借用何如?" 朴安性議: "臣再赴上國而觀之, 只有雜戲, 無女樂。 況廢主狂妄, 實由女樂。 臣意以爲, 痛革此弊, 以正朝廷。" 閔孝曾議: "淫聲美色, 始蕩人心, 終至貽禍, 在所當遠, 今此所啓, 誠爲至當之論也。 不知祖宗朝, 爲何事而有此女樂, 其後欲革, 亦何事而不去也。 當初設此之意, 厥後不去之意, 先審之, 論其可否, 而革之爲當。 不然今雖革之, 慮有異論, 或生於他日, 而今此至當之論, 終至中廢也。 且內庭曲宴, 外庭宴禮, 不可無樂, 其去此, 而別爲設施之方, 先試之, 務令合於人情, 宜於事體, 然後去之, 亦可。 不然, 今雖去之, 異日曲宴禮宴之時, 恐有他議, 或生於其間, 今此至當之論, 亦至中廢也。" 李季男、南袞議: "臺諫所啓, 女樂之弊誠當矣。 一以懲廢朝之失, 一以救淫靡之習, 較其利害, 當革何疑? 然當初建置之意, 無文籍可攷。 或云爲戍卒無家者設也。 雖未可的知其必然, 究其本意, 亦應有爲而設, 非欲爲荒淫之具耳。 今不探創意之原, 而欲矯其弊, 一朝革之, 旣革之後, 淫靡之習尙存, 則安知其弊, 不有甚於今日乎? 但於正殿開宴之時, 率用女樂, 甚非(膽)〔瞻〕 視所安, 雖循祖宗之舊, 實非令典, 在聖世當先痛革, 以貞觀示之本。 若慈殿上壽之日, 不可不用樂, 宜存此類, 以供長樂之歡。 第其名隷樂籍者, 厥數猥多, 當令禮官, 裁量舊額, 減損就約, 使足於用。 外方則分邑殘盛, 可革者革之, 又申明法禁, 使士類毋得縱放, 以嚴朝著。 如是則庶幾不至於有弊, 而又無更張之擾, 似爲便當。" 李蓀、洪景舟議, 類此。 金應箕議: "本朝用女樂, 其來已久。 世宗、成宗, 享國幾六十年, 凡禮樂文物, 不合於理者, 盡改之, 此獨因循不變, 至載《大典》, 必有所以, 今不可輕改。" 安潤德議, 類此。 高荊山議: "進豐呈時, 不得無女樂, 今若革改, 而進豐呈, 別用他女樂, 則其弊與有妓之時無異。 且古之設妓、 爲戍卒無妻者而設也。 臣久在邊方, 詳觀將士之苦。 棄父母離妻子, 遠戍絶域, 近者一期而遞, 久者或至三四年。 羈旅之苦非一, 而所以忘家固守者, 專以此自慰耳。 一朝革廢, 妓各有夫, 脫有不勝情, 欲冒法相干, 小則傷其支體, 大則害其性命, 非徒有累風化, 防禦因此疎虞。 若然則革妓所以革弊, 而秪以增弊耳。 臣意女樂, 從權因舊, 京則只用於進豐呈, 而不用於正殿, 外則因置於巨邑, 革之於殘邑。 又立科禁, 使不得縱情恣行, 似爲便當。" 韓(享)亨允議: "女樂之設, 遠自前朝, 其來已久, 而欲革之論, 亦爲有理。 第於進豐呈, 不得不用女樂, 而兩界邊郡, 亦不可遽革。 前朝則有不足論, 我朝世宗、成宗, 歷年之久, 治平幾六十餘年, 其間凡制度文爲, 有乖於禮法者, 無不更張, 而獨此因循, 豈無所以? 臣意百里之俗, 難可盡同, 祖宗舊章, 不宜輕改。 但官吏宿娼之法, 所當申明, 而州郡殘弊最甚者, 似可革除。" 上從成希顔議。
- 【태백산사고본】 6책 12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4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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