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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 4월 22일 정미 6번째기사 1510년 명 정덕(正德) 5년

왜노가 노략질한 물건을 가덕도에 옮겨 두었으니 도원수에게 조처하게 하다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아뢰기를,

"제주(濟州) 방어소(防禦所)가 본래 7개 처로 지금 권관(權管)을 둔다면 하인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양료가 부족하여 군민(軍民)에게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만일 군관 5명을 더 세운다면 두 사람은 방어하는 곳에 나누어 보내고, 또 정의(旌義)·대정(大靜)제주에서 가깝지 않으니, 군관 각 한 사람을 더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에 경상도 절도사가 아뢰기를 ‘왜노웅천·제포 창고의 물건을 가덕도(加德島)절영도(絶影島) 등지에 옮겨 두었다.’ 하였는데, 절영도는 신 등이 알지 못하지마는 가덕도안골포(安骨浦)에 가까우니, 왜구가 여기에 은거한다면 쫓아내는 것이 가합니다. 또 조정 의논이 혹 병선을 모아 수색하여 잡아서 위엄을 보이자 하고, 혹은 수전은 우리의 장기가 아니니, 불행히 배 한척이라도 실패를 당하면 싸움 이긴 뒤에 위엄이 꺾이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라 하니, 도원수로 하여금 형세를 보아 조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포의 왜노가 점점 만연하여 날이 오래 되자, 교만하고 사나와 제어하기 어려워서 평시에 진장(鎭將)이 조금만 제뜻에 거슬리면 능멸하기를 백 가지로 하여, 심지어는 칼을 목에 들이대기까지 하였으니, 사람마다 불칙한 환이 있을 것을 알았다. 부산포 첨사 이우증(李友曾)은 경솔하고 무모하여 거왜(居倭)를 어거하는데 절도가 없어 한결같이 위력으로만 겁박하고자 하여, 혹 노끈으로 왜인의 머리털을 나무 끝에 매달고 활을 당기어 매단 끈을 쏘기도 하였는데, 절도사 유계종(柳繼宗)이 치계하여 칭찬하니 여러 진이 다투어 본받아서 크게 오랑캐의 마음을 잃었고, 수사(水使) 이종의(李宗義)도 공을 바라 거왜로서 바다에서 해물 채취하는 자 10여 인을 베어 원망을 돋우고 화를 청하였다. 도둑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왜선이 많이 해변을 범하여 포(浦) 사람들이 초탐(哨探)하여 보고했는데도 우증(友曾)이 꾸짖어 보냈고, 초나흗날 새벽에 왜적이 제포·부산포를 나누어 쳐서 적이 장막 밑에 이르러서야 주장(主將)이 바야흐로 깨달았다. 첨사 김세균(金世鈞)은 기어서 성을 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죽이지는 않았고, 우증은 스스로 몸을 초둔(草芚) 가운데에 숨겼다가 적이 찾아내어 난도질을 하였고, 그 아우 우안(友顔)도 아울러 해를 입었고, 두 성의 노소와 진의 군사를 도륙하여 죽이고 드디어 전진하여 웅천·동래 두 고을을 포위하였다. 적의 무리가 수천에 불과한데 틈틈이 나와 약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넘치니 아전과 군사는 뒤질세라 도망하여 달아나고, 절도사 김석철(金錫哲)은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려다가 군사가 겨우 수백인 것을 보고 중과 부적(衆寡不敵)이라 하여 두려워서 전진하지 못하고 물러가 창원(昌原)에 보전하였다. 초이레날 웅천 현감(熊天縣監) 한윤(韓倫)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거진(巨鎭)으로 웅부(雄富)하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적의 차지가 되니, 적이 성에 들어가 고을 사람을 겁박하여 창고에 쌓인 것을 배 위로 나르고 날마다 술자리를 크게 베풀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는데도 석철은 본래 담략이 없어 난에 임하여 계책이 없고, 오직 날마다 조정에 군사를 청할 뿐이었으며, 조정 또한 승산이 없어 조당(朝堂)에서 회의할 적에 재상 중에는 화친을 정하여 적을 늦추고자 하는 자도 있었으나, 마침내는 정토하여 제거하자는 의논을 따라 황형·유담년을 경상 좌·우도의 제치사(制置使)로 삼았다. 황형은 탐혹으로 실직하고 집에 있는데 문에 나와 팔뚝을 걷어 붙이며 큰소리하기를 ‘나는 가물 때의 나막신 같아서 장마철이나 당해야 쓰일 뿐이다.’ 하였다. 금군(禁軍)으로 종정(從征)하는 자가 대낮에 겁탈을 행하고, 서울의 나쁜 무리가 기세를 타서 간악한 짓을 하는 자가 또한 많았으나 유사가 금하지 못하였다. 또 안윤덕(安潤德)에게 자헌의 가자(加資)를 주어 경상도 체찰사로 삼았다. 안윤덕이 경박 과장[浮誇]하여 본래 장재(將才)가 없는데, 명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날짜를 끌며 출발하지 않다가, 앞에 간 군사의 이둔(利鈍)을 기다려서 10일이 지난 뒤에 출발하였다. 또 유순정(柳順汀)을 명하여 도원수로 삼아서 군사(軍事)를 전제(專制)하게 하니, 순정이 가기를 꺼리어 아뢰기를 ‘성희안(成希顔)이 꾀를 좋아하고 결단을 잘합니다.’ 하고, 희안은 또 말하기를 ‘순정이 군사 일을 잘 알고 익히어서 그보다 나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 또한 그 일에 임하여 서로 미루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어 마침내 순정을 명하여 가게 하였다. 적이 이미 깨어지자, 안윤덕이 그때 밀양(密陽)에 있었는데 이겼다는 말을 듣고 치계하여 승첩을 고하였다. 성희안이 경연청(經筵廳)에 앉아있다가 첩서(捷書)가 마침 이르자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첩서에 적을 죽인 것이 대단히 많아서 제포 앞 물이 다 붉게 되었다는 말이 있자 희안이 웃으며 ‘이것은 반드시 김근사(金謹思)가 쓴 것일 것이다.’ 했다. 근사가 큰소리하기를 ‘적을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정옥(頂玉)이 족히 쾌할 것이 없다.’ 하고, 또 박영문(朴永文)에게 비단옷을 구하며 말하기를 ‘아침저녁으로 이것을 입을 것이니 마땅히 일찍 준비하여야 한다.’ 하였지만, 조정에서 마침내 논공하여 산계(散階)를 주니, 당시 사람들이 ‘김공이 장만한 옷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겠군.’ 하였다. 싸움이 끝나자 왜적의 시체가 낭자했는데, 혹 명이 끊어지지 않은 자도 있었다. 무장 소기파(蘇起坡)가 찬 칼을 빼어 그 가슴을 찌르고 손으로 그 쓸개를 따내어 먹고 손과 얼굴에 피를 바르고 술 마시기를 자약하게 하니, 사람들이 ‘소야차(蘇夜叉)’라 하였다. 왜노의 변을 당하여 성희안이 대단히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성공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어, 김석철(金錫哲)완구(玩寇)246) 한 것과 한윤(韓倫)의 도망하여 패한 것 같은 일을 모두 덮어 주어 말감(末減)하였고, 뒤에 미쳐서 경솔히 화친을 허락하여 경멸하는 단서를 열어 놓았다. 대마도에 있는 왜노가 본래 이것을 가지고 통화(通和)의 자료를 삼자는 것인데 조정에서 경솔히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

  • [註 246]
    완구(玩寇) : 적을 보고만 있는 것.

○領議政金壽童ㆍ右議玫成希顔啓曰: "濟州防禦所, 本七處, 今若設立權管, 則當率下人而去, 恐糧料不足, 貽弊軍民。 若加設軍官五人, 二人分遣防禦處, 且旌義大靜, 距濟州不邇, 又加軍官各一人何如?" 傳曰: "可。" 又啓曰: "前日慶尙道節度使啓曰: "奴移置熊川薺浦倉庫之物於加德島絶影等島。 絶影則臣等所不知, 加德島則近於安骨浦寇若隱伏於此, 則驅逐之可也。 且廷議, 或云聚兵船搜捕, 以示其威, 或云水戰, 非我長技, 幸一船見敗, 則戰勝之後, 挫威不小。 令都元帥, 見勢措置何如?" 傳曰: "可。"

【史臣曰: "三浦奴, 滋蔓日久, 驕驁難制。 平時鎭將, 少忤其意, 陵侮百端, 至以刃加頸, 人人知有不測之患。 釜山浦僉使李友曾, 狂率無謀, 禦居無節。 一欲以威刦之, 或以繩, 懸髮髻於木末, 彎弓射其懸索。 節度使柳繼宗, 馳啓褒美, 諸鎭爭慕效之, 大失蠻心。 水使李宗義, 亦邀功, 斬居海採者十餘人, 挑怨速禍。 寇起前一日, 船多犯海邊, 浦人哨報, 友曾罵遣之。 初四日黎明, 賊分攻薺浦釜山浦賊至帳下, 主將方覺。 僉使金世鈞, 匍匐踰城, 爲賊所執不殺。 友曾自以身, 自裏草芚中, 賊索出臠之。 其弟友顔, 幷被害。 屠殺兩城老少及鎭軍, 遂進圍熊川東萊兩縣。 賊衆不過數千, 間出刦掠, 烟焰漲天。 吏士奔竄恐後。 節度使金錫哲, 領兵欲援, 見兵纔數百, 自以衆寡不敵, 畏㤼不能前進, 退保昌原。 初七日, 熊川縣監韓倫, 棄城遁去, 城遂陷, 【巨鎭雄富】 一朝爲賊所有。 賊入城, 刦縣人輸府庫之積于船上, 日置酒高會, 不復設備。 錫哲本無膽略, 臨難無策, 唯日請師于朝廷而已, 朝廷亦無勝算。 會議朝堂, 宰相有欲定和緩寇者, 卒從討除之議, 以黃衡柳聃年, 爲慶尙左右道制置使。 以貪酷失職, 家居出門, 攘臂大言曰: ‘如我旱天木屐, 當雨便用。’ 爾禁軍從征者, 白晝行刦, 京師惡少, 乘勢爲奸者亦多, 有司不能禁。 又授安潤德資憲加, 爲慶尙道體察使, 潤德浮誇, 本無將才, 聞命驚惶, 遷延不發, 以待前師利鈍, 遂過十日乃發。 又命柳順汀爲都元帥, 專制軍事, 順汀憚行, 啓曰: ‘成希顔好謀善斷, 可委大事。’ 希顔又曰: ‘順汀諳習軍事, 無出其右。’ 上亦鄙其臨事推托, 竟命順汀往。 賊旣破, 安潤德, 時在密陽, 聞捷馳啓告捷。 成希顔坐經筵廳, 捷書適至, 不覺踴躍。 書有 ‘殺賊甚多, 薺浦前水盡赤’ 之語, 希顔笑曰: ‘此必金謹思之筆也。’ 謹思大言曰: ‘平賊有大功, (項)〔頂〕 玉不足快也。’ 又求叚衣於朴永文曰: ‘朝夕服此, 宜早備之。’ 朝廷竟論功狀, 只給散階。 時人云: ‘金公辦衣, 輸與他人。’ 戰罷屍(狠藉)〔狼藉〕 , 或有命未盡者。 武將蘇起坡, 引佩刀剌其胸, 以手摘出其膽而食之, 手面塗血, 飮酒自若, 人以爲: ‘蘇夜叉。’ 當奴之變, 成希顔憂惴過常, 幸其成功, 如金錫哲之玩寇, 韓倫之遁敗, 皆掩覆而末減之。 及後輕許和親, 以開輕侮之端。 在對馬島 奴, 本欲持此, 以爲通和立資, 而朝廷輕許之。"】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