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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 4월 19일 갑진 1번째기사 1510년 명 정덕(正德) 5년

도원수 유순정이 하직인사를 하니 형세를 잘 보고 군사를 다스리라고 하다

도원수 유순정(柳順汀)이 배사(拜辭)하니, 대략 다음과 같이 교서하였다.

"사나운 것을 금하고 난을 제거하는 것은 진실로 성현이 먼저 힘쓸 일이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帝王)이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조그만 왜노가 멀리 해도(海島)에 있어 그 선대로부터 정성을 바쳤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오랑캐라 하여 차별하지 않고 같이 사랑하니, 그들이 우리 강토에 거처하고 우리 호의로 의식(衣食)하였다. 간인 노수(奸人怒獸)처럼 탐하고 토색하기를 만가지로 하고 화를 즐기고 삶을 가볍게 여기어 방자하고 오만한 것이 점점 심하였다. 뜻있는 선비는 팔뚝을 걷어 붙이며 군사를 말하고, 어진 사람은 탄식하며 함께 분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변방에 흔단이 생기는 것을 중난하게 여겨 교계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용서하는 것을 보이어 함께 살기를 기약하였는데, 어찌 뜻하였는가. 덮어 양육한 은혜를 잊고 여러대의 화호를 버리고 변성을 엄습하여 함락하고 장사를 살해하였으며 가옥을 불태우고 인민을 도륙하였으니, 실로 나의 위엄과 덕이 부합하지 못하여 불쌍하게도 무고한 사람들이 횡액을 입었다. 대신들은 함께 분하여 꾀를 합하고 백료(百僚)는 모두 노하여 정토를 청하였다. 이 퇴곡(推轂)의 중임을 생각건대, 참으로 오랜 물망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다. 경은 기략이 웅위하고 지식과 도량이 굉원(宏遠)하여 충성은 일월을 꾀었으며 종사(宗社)를 포상(苞桑)에 매었고,242) 공훈은 고금에 으뜸이니 생민을 수화에서 건졌고, 재주는 문무를 구비하였으니 일찍이 길보(吉甫)243) 가 법이 된 것을 들었고, 직위는 장상을 아울렀으니 잠깐 배도(裵度)의 출정(出征)하는 것을 번거롭게 하였다. 아! 일을 당하여 잘 결단하여 의심하지 말고 일에 임하여 경솔히 하지 말고 더욱 신중히 하라. 군정은 엄명한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어루만지는 것은 또 반드시 너그럽고 간이하여야 한다. 이 작은 무리를 섬멸하여 위엄의 명성을 멀리 펼치고 우리 변방 백성을 편안히 하여 혜택에 젖게 하고, 깨어진 진을 수축하고 변방을 공고히 하여 나의 남쪽을 염려하는 근심을 풀고 저들의 와서 도둑질하는 환을 끊으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부원수·방어사 이하를 경이 절제하여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마땅히 군률로 처치하라. 아! 내가 급하게 서두니 깊이 선왕(宣王)의 양수(攘修)가 부끄럽고,244) 능히 그 꾀를 장하게 하였으니 방숙(方叔)의 집획(執獲)245) 을 바란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순정을 인견(引見)하니, 순정이 아뢰기를,

"부산포 왜인들의 반란이 이와 같으니, 염포(鹽浦)의 왜인은 지금 먼저 칠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만일 군사를 합하면 그 형세가 또 치성(熾盛)해질 것이니, 염포의 왜인은 후일에 도모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가서 형세를 보아 처치하라."

하고, 상이 친히 옥배(玉盃)를 들어 유순정에게 주니, 순정이 또한 상께 잔을 올리었다.

예가 끝나자 순정이 아뢰기를,

"정토하는 것은 마땅히 형세를 보아서 처리하려니와 적이 이미 험한 곳에 웅거하였기 때문에 대군이 들어갈 수 없는데, 만일 평지로 나온다면 사로잡고 제어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수륙으로 나란히 나아가는 것이 참으로 좋은 계책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병선이 높고 커서 운행하기가 어려우니, 왜선과 승리를 다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마땅히 가 보고 조처하겠습니다. 총을 많이 쏘면 적이 반드시 달아날 것입니다. 외방에는 습숙(習熟)한 자가 없고 지금 뽑아서 거느리고 가는 자도 50명 밖에 안 되니, 적을 막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저 전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사기에 임하여 처치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김수동은 아뢰기를,

"우리 기세가 당당하면 저들이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다시는 삼포(三浦)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양식을 주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기한과 곤고(困苦)를 견디지 못하여 정성을 바치어 와서 빌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통신하는 것을 허락하고 변경 방비를 굳게 지키면 저들이 어떻게 흉계를 내겠습니까."

하고, 순정은 아뢰기를,

"들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왜노 60호를 약속하여 우리 땅에 살도록 허락하였으나, 영구히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어서 왕래하는 것이 관한(關限)이 있고 출입할 때는 변장에게 고하게 되어 있는데, 그뒤에 방금(防禁)이 엄하지 않아서 60호 외에 고기 낚는 것을 칭탁하여 온 자를 곧 몰아내지 않아서 도중(徒衆)이 점점 많아져 비록 교화에 복종하지 않더라도 국가에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식자들이 이미 근심한 것입니다. 또 이 왜노들이 삼포(三浦)의 성 밑에 살면서 우리 나라 백성과 서로 심복이 되었습니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옹저(癰疽)를 따는 것이 아프지만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습니다. 이 흔단을 타서 다시는 삼포에 들여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신이 성희안과 또한 이 일을 의논하였는데, 지금 왜노의 서계를 보니 화친을 하고자 하면서도 그 말이 패만(悖慢)하고, 변장의 회답은 비굴한 말뿐이니 치욕을 당한 것이 큽니다. 정토와 화친이 모두 큰 일인데, 편부(便否)와 이해가 한번 정하여 진 뒤에 처치하면 거의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정토하지 못하고 다시 화친을 의논한다면 그 요구와 토색에 만족이 없어서, 반드시 요(遼)·금(金)이 송(宋)을 무시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방비하는 여러 일을 마땅히 배나 조치를 더하고 연해변의 방어는 양계(兩界)의 사례에 따라 농사철이 아니면 백성을 모여 들어오게 하고, 불과 한 식경[一息頃] 되는 거리라도 백성이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또 중국의 예에 의하여 해물(海物)를 채취하지 못하게 하면, 왜노의 도둑질하는 것이 끊어지고 선군(船軍)이 또한 마병(馬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어를 고쳐 조치하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마땅히 자세히 이해를 헤아려서 정하여야 합니다."

하고, 노공필(盧公弼)은 아뢰기를,

"남방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여 한번 왜변(倭變)을 들으면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니, 태평(太平)에 습관이 되어 군령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사랑이 위엄을 이기면 참으로 공이 없다.’ 하였으니, 모름지기 군법을 엄명(嚴明)히 하여 사졸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한 뒤에라야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 육지는 그래도 방어할 수가 있지마는, 거제(巨濟)·남해(南海)·진도(珍島)·제주(濟州)같은 곳은 수로가 험하고 멀어서 변고가 있더라도 미처 구원할 수가 없으니, 먼저 조치를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불행히 왜노가 이 땅에 몰래 웅거한다면 곧 적의 소굴이 되어서, 국가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토하기로 결정하였으니, 방어하는 조치를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이손(李蓀)이 아뢰기를,

"웅천(熊川)은 용무(用武)할 수 있는 땅이어서 자력으로 적을 막을 수 있는데, 사졸이 기가 죽고 김석철(金錫哲) 또한 구원하지 못하고 물러갔으니, 이것은 군령이 엄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사상자를 감사(監司)가 즉시 치계하지 않으니 또한 어찌 옳겠습니까."

하고, 성희안(成希顔)이 아뢰기를,

"이손이 말한 군령이 엄하지 않다는 것이 매우 옳습니다. 군령이 엄하면 윤효빙(尹孝聘)·이해(李海)가 어찌 감히 도망하여 피하였겠습니까. 마땅히 이 무리로 하여금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자속(自贖)하게 하고 고성 현령(固城縣令)은 순정(順汀)이 그곳에 내려가니, 가당한 자를 가려 차정(差定)한 뒤에 치계하게 하소서. 전에 한명회(韓明澮)가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을 때에 수령으로 합당하지 않은 자를 반드시 먼저 개차(改差)한 뒤에 아뢰었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하는 것이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원수가 가서 형세를 살피어 마땅함에 따라 처치하라."

하자 순정이 빈청(賓廳)에 물러나와 아뢰기를,

"신은 바탕이 본래 노둔하고 또 병이 많은데 지금 큰 책임을 받았으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영광과 은총이 지나치게 더하여지니 마음에 미안합니다. 강머리에서 전별연 베푸시는 일은 신이 이미 사양하였고 대간이 또 아뢰었으니, 행하지 마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중임을 받아 멀리 가는데, 어찌 전송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서 의복과 궁시(弓矢)를 주고 좌승지와 내관(內官)을 보내, 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註 242]
    포상(苞桑)에 매었고, : 국가의 위태로움을 구제하였다는 뜻. 《주역(周易)》에 "곧 망할 것만 같으니, 뽕나무 밑둥에 잡아 매라." 하였다.
  • [註 243]
    길보(吉甫) : 중종 5년 4월 16일 신축조 유월(六月)의 사(師) 역주 참조.
  • [註 244]
    선왕(宣王)의 양수(攘修)가 부끄럽고, : 피폐된 정치를 혁신시켰다는 뜻. 주 선왕이 유왕(幽王)·여왕(厲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내수(內修)를 충실히 하는 한편, 중산보(仲山甫)·윤길보(尹吉甫)·방숙(方叔)·소호(召虎)를 시켜 남정 북벌케 하여 외양(外攘)에 성공하였고, 무왕(武王)의 업을 회복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 [註 245]
    방숙(方叔)의 집획(執獲) : 방숙은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신하. 형만(荊蠻)이 배반하자, 방숙에게 남정(南征)을 명하니, 형만을 사로잡아 큰 공을 세웠다. 《시경(詩經)》 채기(采芑).

○甲辰/都元帥柳順汀拜辭。 敎書略曰:

禁暴除亂, 固聖賢之所先, 動旅興兵, 非帝王之獲已。 蕞爾奴, 邈在海島, 自其先輸誠而納款, 惟我國一視而同仁, 居處于我(彊)〔疆〕 , 衣食於我好。 人怒獸貪, 〔求〕 索萬端, 樂禍輕生, 驕傲比甚。 志士扼腕而言兵, 仁人歎息而共憤, 予重開邊, 不之與較, 尙示含垢, 期于竝生。 豈意忘覆育之恩, 棄累世之好? 襲陷邊城, 戕害將士, 焚蕩廬室, 屠戮人民? 實予威德之不符, 哀此無辜之橫被。 元臣共憤而協謀, 在列咸怒而請討。 念玆推轂之重寄, 諒非宿望則難堪。 卿器略雄奇, 識量宏遠, 忠貫日月, 繫宗社於苞桑, 功冠古今, 拯生民於水火。 文武才全, 夙聞吉甫之爲憲, 將相位竝, 暫煩裵度之出征。 嗚呼, 當機善斷而莫疑, 臨事毋輕而尤愼。 軍政莫過嚴明, 撫循又必寬簡。 殲此小醜, 遠播威聲, 奠我遐氓, 裨霑惠澤, 興修破鎭, 鞏固邊陲。 紓予南顧之憂, 絶彼來寇之患, 豈不偉哉? 副元帥、防禦使以下, 卿其節制, 有不用命, 當以軍律從事。 噫, 我是用急, 深愧宣王之攘修, 克壯其猷, 佇見方叔之執獲。

上引見順汀思政殿順汀曰: "釜山浦倭人等, 叛亂如此, 鹽浦倭人, 今不可先攻。 彼若合兵, 則其勢又熾, 鹽浦倭人, 則可圖後日。" 上曰: "卿其往哉, 度勢善處。" 上親執玉盃, 賜順汀, 順汀亦進爵于上。 禮訖, 順汀曰: "征討當見其形勢而處之。 賊已據險, 故大軍未得入, 若出平地, 擒制何難? 水陸竝擧, 固是良策, 但我國兵船高大, 難於運行, 不可與船爭利。 臣當往見而處之。 多放銃筒, 則賊必走, 外方, 則無能習熟者, 今抄去者, 亦止五十名, 恐難禦敵。 大抵兵難遙度, 當臨機處置。" 金壽童曰: "我勢堂堂, 則彼必投降, 更勿許入三浦, 不給糧餉, 則彼必不耐飢寒困苦, 輸誠來乞。 如此然後, 第許通信, 固守邊備, 則彼焉能發其凶計?" 順汀曰: "聞祖宗朝, 約束奴六十戶, 許居我地。 然非欲恒居, 其往來有關限, 其出入告邊將。 其後防禁不嚴, 六十戶外, 托釣魚來者, 不卽驅除。 以致徒衆寔繁, 雖或梗化, 國家置之度外, 識者已憂之。 且此奴, 處三浦城底, 與我國人民, 相爲心腹。 古人有言曰: "潰癰雖痛, 勝於內食。" 乘此之釁, 勿令還入三浦可也。 臣與成希顔亦議此事。 今見奴書契, 雖欲和親, 其辭悖慢, 邊將之答, 秪是卑辭, 見辱大矣。 征討、和親, 皆是大事, 便否利害, 一定然後處置, 則庶無後悔。 今若不能征討, 而更議和親, 則其求索無厭, 必如之侮。 防備諸事, 固當倍加措置。 沿海防禦, 依兩界之事, 非農時, 則令民疊入, 水邊一息之間, 勿許民居住, 又依中朝例, 毋得採取海錯, 則奴之寇絶, 而船軍亦可爲馬兵。 然(力)〔防〕 禦改措置, 國之大事, 當詳度利害以定之。" 盧公弼曰: "南方之人, 不知兵革, 一聞變, 蒼皇失措, 此狃於昇平, 而不識軍令也。 《書》曰: ‘愛克厥威, 允罔功。’ 須嚴明軍法, 使士卒知懼, 然後事可濟矣。 且陸地則猶可禦也, 若巨濟南海珍島濟州, 則水路阻遠, 雖有變故, 不及救援, 宜先措置。 不幸奴, 竊據此地, 則便爲賊穴, 非國家有也。" 上曰: "征討已定, 防禦措置, 不可不堅固也。" 李蓀曰: "熊川用武之地, 自可以禦敵, 而士卒沮縮, 金錫哲亦不能救援而退去, 此軍令不嚴而然也。 其死傷之人, 監司不卽馳啓, 亦豈可乎?" 成希顔曰: "李蓀軍令不嚴之言, 甚當。 軍令若嚴, 則尹孝聘李海, 豈敢躱避? 宜令此輩, 白衣從征, 立功自贖。 固城縣令, 則順汀下去其處, 宜使擇可當者差之, 然後馳啓。 前者韓明澮, 爲都巡察使時, 守令不合者, 必先改差而後啓, 今亦依此例不妨。" 上曰: "都元帥其往審形勢, 隨宜處置。" 順汀退賓廳啓曰: "臣質本魯鈍, 而且多病, 今受大任, 恐不能當之。 榮寵濫加, 於心未安。 江頭賜餞, 臣已辭, 而臺諫又啓之, 請勿行。" 傳曰: "卿受重任遠去, 何以不餞?" 仍賜衣服弓矢, 遣左右承旨及內官, 餞于江上。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