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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 4월 17일 임인 1번째기사 1510년 명 정덕(正德) 5년

평성부원군 박원종의 졸기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박원종(朴元宗)이 졸하였다.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지금 평성의 죽음을 들으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예전에 대신이 죽으면 친림하여 조상하였는데, 고금이 비록 다르나 원훈 대신(元勳大臣)이니 거애(擧哀)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정부에 물으라."

하자, 영의정 김수동이 아뢰기를,

"원종의 죽음은 신 등도 애통하고 아깝게 여깁니다. 성종조(成宗朝)에 대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거애하고자 하였으나 상전(上殿)이 계시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역시 상전이 계시고 또 출사(出師)하는 때를 당하여 흉사(凶事)를 거행하지 않는 것이 예전 예(例)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이때에는 불가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종조 일은 나도 들었으나, 내뜻이 그러하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하고, 고기 반찬을 들지 않고 무릇 부증(賻贈)하는 은전을 보통 예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원종순천(順川) 사람이며, 무과로 출신(出身)했는데 풍자(風姿)가 아름다웠고, 폐주(廢主)236) 말년에 직품이 정2품에 이르렀다. 원종의 맏누이는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아내로 폐주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의 가자를 주니 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 원종이 국사가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 일찍이 부앙(俯仰)하며 탄식하였는데, 한번 성희안(成希顔)의 말을 듣고 임금을 폐립(廢立)할 결심을 하였다. 거사를 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논을 주장한 이는 반드시 박 영공(朴令公)일 것이다.’ 하였다. 정묘년237) 여름에 조정에서 유자광(柳子光)을 논척(論斥)하니, 자광원종에게 기대어 원조를 얻고자 하여 편지로 공동(恐動)238) 하게 하기를 ‘나와 공은 모두 무인으로서 높은 벼슬에 올랐으므로 문사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것이니 내가 쫓겨나면 다음에는 공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원종이 웃고 대답하기를 ‘조야(朝野)가 이를 간 지가 오래니, 공이 일찍 물러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니 자광의 간담이 부숴졌다. 삼공(三公)이 되자 자기는 무부(武夫)라 하여 간곡히 사양하였고, 병이 급하여지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물으니 원종이 일어나 앉아 사례하기를 ‘주상께서 인재를 아끼시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서 학술이 없고 참소하는 말을 믿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여러 문사들이 공을 논박하려 하고 또 공훈이 있는 사람을 없애려고 꾀한다.’ 하니, 원종이 그 말을 믿고 문사를 모조리 제거하려 하다가 처족(妻族)인 김세필(金世弼)이 힘써 구해(救解)하여 그만두었다. 성질이 또 이기기를 좋아하여 임금 앞에서도 사색(辭色)에 나타내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남에게 주는 것도 마땅함을 지나쳤다. 연산(燕山)이 쫓겨나자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비(婢)를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참람하기가 한도가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1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236]
    폐주(廢主) : 연산군을 가리킨다.
  • [註 237]
    정묘년 : 1507 중종 2년.
  • [註 238]
    공동(恐動) : 두려워서 동요하다.

○壬寅/平城府院君 朴元宗卒。 傳于政院曰: "卽聞平城之卒, 不勝哀慟。 古者大臣之卒, 親臨弔喪。 古今雖異, 然元勳大臣也, 擧哀何如? 問于政府。" 領議政金壽童啓曰: "元宗之卒, 臣等亦爲痛惜。 成宗朝, 因大臣之卒, 欲擧哀, 而有上殿故不行。 今亦有上殿, 而且當出師之時, 不擧凶事, 乃舊例也, 此雖美事, 今時則不可。" 傳曰: "成宗朝事, 予亦聞之。 然予意如此, 故問之耳。 不御肉膳, 凡所以賻贈之典, 倍於常例。" 元宗, 順天人, 由武擧進, 美風姿。 廢主末年, 位至正二品, 元宗之姉, 乃月山大君 妻也, 廢主通焉, 長在宮中。 廢主特授元宗崇政加, 元宗憤之, 語其姉曰: "何爲忍生, 飮藥而死。" 元宗見國事無如之何, 嘗俯仰噓唏, 一聞成希顔之言, 決意廢立。 及擧事, 國人皆曰: "首議者必朴令公。" 丁卯夏, 朝廷論斥柳子光, 子光欲倚元宗爲助, 以書恐動之曰: "吾與公, 竝以武人, 躋崇品, 文士多不悅。 唇亡齒寒, 我黜, 次及公。" 元宗笑答曰: "朝野切齒久矣, 恨公不早退。" 子光破膽。 及爲三公, 自以武夫, 懇辭。 疾革, 上遣承旨, 問所欲言, 元宗起謝曰: "但願主上愛惜人才而已。" 然不學無術, 信聽讒言。 嘗有人告曰: "諸文士將欲駁公, 且謀去有功之人。" 元宗信之, 欲悉除去, 妻族金世弼, 力解而得止。 性又好勝, 雖在上前, 未免形諸辭色。 賄賂輻輳, 施與過當。 燕山旣廢, 多占出宮名娼爲婢, 構別室畜之, 居處飮食, 僭擬無度, 時人非之。 賜諡武烈


  • 【태백산사고본】 6책 1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431면
  • 【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