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김선 등이 도승법 등과 경연에 대해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지평(持平) 허지(許遲)가 아뢰기를,
"태양이 하늘에 떠오르면 음사(陰邪)가 자연 소멸되고, 정도(正道)가 유행하면 사설(邪說)이 자연 없어지는 것입니다. 도승의 일은 유난(留難)809) 할 수 없습니다. 박영문은 전에 도총관이 되었을 때, 대신과 틈이 있었는데 그 때에 공이 있다 하여 그 죄를 의논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어찌 6경의 반열에 둘 수 있겠습니까? 공신으로 하여금 몸을 보전하게 하려면 일을 맡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윤장은 성질이 경망 조급하여 중용의 덕이 없으니 어찌 조옥(詔獄)의 관원에 합당하겠습니까? 박이온은 별제(別提)로서 공신에 참여하고, 돈녕 판관(敦寧判官)을 지냈을 뿐인데 어찌 백성 다스리는 방법을 알겠습니까? 남포는 심술이 부정하여, 사족(士族)의 부녀를 사족이 아니라 하고 친구를 속였는데, 이것은 사대부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박담손·권민수는 개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조(吏曹)는 마땅히 추고(推考)하여야 합니다. 남조·박지겸도 속히 파직하소서."
하고, 정언(正言) 김선(金旋)이 또한 도승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설경(說經) 황여헌(黃汝獻)이 아뢰기를,
"근자에 10여 일이나 경연(經筵)을 정지하니, 옛사람이 촌음(寸陰)을 아끼는 뜻과 다릅니다. 더구나 인군은 환관·궁첩(宮妾)과 가까이 하는 날이 항상 많고, 여러 신하와 바른 선비를 접견하는 때는 항상 적은데, 사대부를 접견하는 것은 오직 경연에서만 있을 뿐입니다. 또 경연은 홍문관의 서리(書吏)가 미리 경연이 있고 없음을 알고 경연 입시관(入侍官)을 청하는 것인데, 어제는 갑자기 경연에 나갔기 때문에, 경연관이 모두 차례를 몰라서 밤이 되도록 전도(顚倒)하였으니, 지극히 부당한 일입니다.
신은 항상 전하는 글을 좋아하는 인군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경연에 나가지 않으시니, 신은 학문을 여사(餘事)로 삼으심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대저 덕을 닦는 것이 근본이요, 글을 배우는 것은 말단입니다. 그러나 사장(詞章)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르러서는 지려(智慮)가 증장(增長)되는 것이니, 덕을 닦고 마음을 바로 하는 근본입니다. 근래에는 경연이 있더라도 야대(夜對)810) 에 나가지 않아 경연관은 그저 야직(夜直)이나 하고 있을 뿐이니, 관직을 두어 고문에 대비하게 한 뜻이 없습니다.
신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니 ‘성종조에는 경연을 정지하지 않았다.’ 하니 그 학문을 좋아했다는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야대에 있어서는 경연관이 입시할 뿐만 아니라, 무시 특명으로 부원군(府院君)을 입시 강론하게 하되,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습니다. 대저 학문의 공은 혈기가 강성할 때에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 성상께서 춘추가 한창 왕성하시니, 만일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면 학문이 날마다 증장될 것입니다.
또 《국조보감》을 보면, ‘세종대왕은 모화관(慕華館)에서 환가(還駕)하실 때에, 강목(綱目)을 백 번 읽었다.’ 하며, 또 홍문관에 문종조의 진강하던 《예기(禮記)》가 있는데, 주홍(朱紅)으로 점찍고 쓰기를, ‘모처(某處)에서 모처까지 진강하였다.’ 하였으니, 선왕의 학문을 좋아하는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또 근일, 뇌전(雷電)의 변이 자주 있는데 죄입은 사람이 적으나 모두 종친 소속입니다. 하늘은 헛되게 견책(譴責)하지 않으니, 이것이 천심이 인군을 사랑하는 뜻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죄인을 잡는 것을 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더욱 수성(修省)하소서."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은 아뢰기를,
"성종조에는 항상 경연과 야대(夜對)에 납시었으며, 야대 때에는 승지·홍문관 관원을 입시하게 할 뿐 아니라 또 특명으로 대신들을 입시하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이파(李坡)·손순효(孫舜孝)는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가지고 논란하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811) 가 상체(上體) 미령하실 것을 염려하여 중지시키려 하였는데, 성종이 이르시기를,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므로 병이 나지 않는 있습니다.’ 하니, 정희 왕후가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원컨대, 지금 전하께서도 성종을 본받아 항상 야대에 납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근일, 완원군(完原君)812) 이 졸한 지 오래지 않아서 일을 보기 미안하기 때문에 정지한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38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과학-천기(天氣)
- [註 809]유난(留難) : 보류하고 처리를 뒤로 미룸.
- [註 810]
야대(夜對) : 왕이 밤에 신하를 불러 경연(經筵)을 베풀어 경사(經史)의 고금(古今) 치란(治亂)에 관하여 대강(對講)하는 일.- [註 811]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 왕비.- [註 812]
완원군(完原君) : 성종의 4남, 이름은 수(𢢝).○乙丑/御朝講。 持平許遲曰: "(大陽)〔太陽〕 中天, 陰邪自消, 正道流行, 邪說自息, 度僧之事, 不可留難。 朴永文, 前爲都摠管時, 與大臣有隙, 其時以有功, 不論其罪, 今豈可置於六卿之列乎? 欲使功臣保全, 宜不任以事也。 尹璋, 其性輕躁不中, 豈合於詔獄之官乎? 朴而溫, 以別提得參功臣, 只經敦寧判官, 豈知治民之方乎? 南褒, 用心不正, 以士族婦女, 爲非士族也, 欺其朋友, 此士大夫不可忍爲也。 朴聃孫、權敏手, 不可不改正, 吏曹固當推考。 南祚、朴之謙, 亦宜速罷。" 正言金璇, 亦啓度僧等事, 皆不允。 說經黃汝獻曰: "近者十餘日停經筵, 與古人惜寸陰之意異矣。 況人主親宦官、宮妾之日常多, 接群臣、正士之時, 常少, 接見士大夫, 唯於經筵而已。 且弘文館書吏, 預知經筵有無, 而請經筵入侍官, 昨日卒御經筵, 故經筵官皆未知次第, 犯夜顚倒, 至爲不當。 臣常以殿下爲好文之主, 如此不御經筵, 臣恐以學文爲餘事也。 大抵修德本也, 學文末也。 然詞章則已矣, 至如性理之學, 則智慮增長, 修德正心之本也。 近來雖有經筵, 不御夜對, 經筵官徒爲夜直而已, 無設官備顧問之意。 臣觀《國朝寶鑑》, 成宗朝不停經筵, 其好學之意可見。 至夜對, 非徒經筵官入侍, 無時特命府院君, 入侍講論, 或至夜分乃罷。 夫學問之功, 血氣方强之時, 乃能爲也。 今聖上春秋鼎盛, 若能手不釋卷, 則學問當日益增長矣。 又觀《國朝寶鑑》, 世宗大王, 自慕華館還駕時, 讀《綱目》百遍, 且弘文館, 有文宗朝進講《禮記》, 以朱紅點綴而書曰: ‘自某處至某處, 而進講。’ 先王好學之意至矣。 且近日雷變累至, 而被罪人雖微, 出於宗屬, 天不虛譴, 是乃天心仁愛人君之意也。 伏願殿下, 勿以罪人斯得爲快, 尤加修省焉。" 參贊官李世仁曰: "成宗朝恒御經筵夜對, 夜對時, 非徒承旨, 弘文館入侍, 亦特命大臣入侍, 故李坡、孫舜孝, 以《庸》、《學》論難, 至夜分乃罷。 貞熹王后恐上體未寧, 欲止之, 成宗曰: ‘此吾所好之事, 不爲病也。" 貞熹王后加悅。 願今殿下, 以成宗爲法, 而恒御夜對。" 上曰: "所言至當。 然近日完原君之卒不久, 視事未安, 故停之耳。"
-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38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과학-천기(天氣)
- [註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