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말손이 정송수·신창령 등의 모반을 아뢰다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이 상산령(常山令) 이말손(李末孫)776) 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상변(上變)777) 하였는데, 말손이 아뢰기를,
"신의 집에서 달구(㺚狗)778) 를 기릅니다. 지난 9월쯤에 정송수(貞松守) 이석손(李錫孫)이 종을 시켜, 신의 어미의 속신(贖身)을 청원한 상언(上言)의 초본을 빌어가는데, 종이 달구를 보더니 끌고 가겠다고 청하며 상언의 초본과 함께 돌려보내겠다고 하므로 신이 허락했었습니다. 그런데 석손이 달구를 그대로 두고서 신을 부르기에 신이 갔더니, 우리 달구를 빌어 주기를 청한다고 하므로 신이 허락했었습니다.
이로부터 석손이 날마다 사람을 시켜 신을 불러다가 말하기를, ‘내가 박영문(朴永文)·황맹헌(黃孟獻)·심정(沈貞)·이공우(李公遇)·윤순(尹珣)·황형(黃衡)·강윤희(康允禧)·이이(李峓) 등과 더불어 서산(西山)에서 돼지 사냥을 하기로 언약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너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했느냐?’ 하기에, ‘못했다.’고 했더니, ‘너는 창산(昌山)의 종제(從弟)인데도 참여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창산군(昌山君)779) 은 소원하고 쌀쌀하다고 한다. 사촌(四寸)간에 어찌 그렇게 박정한가?’ 하였습니다.
이달 21일에는 석손이 나에게 꿩 한 마리를 보내고 따라서 신을 부르기로 신이 갔더니, 맹인(盲人) 안팔동(安八同) 및 도자장(刀子匠)이 또한 있었습니다. 석손이 ‘내일 다시 오라.’고 했는데, 22일에는 동지 습의(冬至習儀) 때문에 가지 못하고 23일에는 또한 비가 와서 가지 못하고 24일에야 가니, 석손 및 그의 아들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이다.】 이 같이 있었습니다.
석손이 ‘그믐날 사냥 간다.’ 하므로, 신이 의아스러워 흔(訢)에게 물으니, 흔이 ‘숙질(叔姪)간에 무슨 일을 숨기겠는가? 박영문(朴永文)과 모의하기를, 「동짓날 밤에 활 잘 쏘는 사람 서넛씩으로 짝을 만들어 삼공(三公)의 집에 나누어 보냈다가 예궐하게 될 때에 뒤따르다 쏘도록 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향교동(鄕校洞) 고개에서 봉화를 들고 또한 남산에서 봉화를 올려 서로 호응하여 죽인 것을 알린 뒤에, 같이 대궐 밖에 모여 임금을 폐위(廢位)하고 같이 완원군(完原君)을 세우기로 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박영문에게 미륵(彌勒)·당래(唐來)가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해낼 수 있느냐?’ 하니, 흔이 ‘미륵·당래는 없어도 박영문이 지금 거느리고 있는 효용(驍勇) 중에 미륵·당래 같은 것보다 나은 것이 3∼4인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날 바로 아뢰고 싶었지만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과 같이 못했습니다.
27일에 석손이 또 신을 부르기에 신이 갔더니, 석손이 이미 의산령(義山令) 이윤(李潤)의 집에 갔었습니다. 신이 윤(潤)의 피접(避接)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의산령(義山令)과 정송수(貞松守)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이 ‘영정수(永貞守) 【이름은 이복중(李福重).】 의 집으로 갔는데, 참판(參判) 황맹헌(黃孟獻)·참판 윤순(尹珣) 등 4∼5인이 또한 들어갔으며, 영정수(永貞守)의 집에서 모두 돌려보냈다.’고 했습니다.
신이 복중(福重)의 집으로 가니 문을 잠그고 숨기므로 신이 곧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석손의 집에 보냈더니 회답은 해 보내지 아니하고, 다만 내일 다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오늘 파루(罷漏) 때에 석손의 집으로 가 말하기를, ‘양주(楊州)로 가서 처모(妻母)를 뵙고 싶다.’고 하면서 그의 뜻을 떠보았더니, 석손이 ‘너의 이름을 이미 써 놓았고 날짜가 또한 이미 박두했으니 가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기에, 신이 ‘어제 영정수의 집에 갔었는데 숨기더라.’ 하니, 석손이 ‘본래 손님에게는 숨기던 것으로서, 네가 온 줄을 모르고서 그런 것이다. 네가 만약 내 자식과 같이 왔더라면 네가 모였던 재상들에게 들어가 뵙게 되었을 것이다.’ 하고, 또 ‘헐복(歇福) 【우리 말로 복이 없다는 뜻.】 하여 완원군(完原君)이 이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맏형 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의 집으로 가서 말하였고, 또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의 집으로 가서 같이 우의정 성희안(成希顔)의 집으로 가 드디어 같이 상변(上變)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석손(錫孫)은 어리석고 유치하여 말도 잘 하지 못하고, 흔(訢)은 경솔하고 박덕한 하나의 망령된 사람으로 모두 문자(文字)를 알지 못한다. 모반(謀反)했다는 일은 모두 흔이 거짓으로 꾸미고, 상산령(常山令) 말손(末孫)이 부연(敷衍)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일이 모두 실답지 못하다. 이 옥사(獄事)에 있어서, 흔이 난언(亂言)한 죄목을 받고 말손은 역시 부연(敷衍)한 죄를 받으면 평반(平反)780) 하게 될 것인데, 말손은 성희안과 가까운 족속이기 때문에 그 죄를 모면한 데다가 그야말로 도리어 품계(品階)를 뛰어오르게 되었으니, 또한 외람되지 아니하겠는가?"
전교하기를,
"정송수(貞松守)·신창령(新昌令)·의산령(義山令)·영정수(永貞守) 등을 의금부 낭관(郞官) 및 선전관(宣傳官)과 겸사복(兼司僕)을 보내어 잡아오라."
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이 일은 영의정·좌의정·의금부 당상과 더불어 같이 국문할 것을 주청합니다."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고, 또 전교하기를,
"의금부 낭관 한 사람과 선전관 한 사람이 입직(入直)한 장용대(壯勇隊) 열 사람을 데리고 정송수(貞松守)의 집에 가서 문서(文書)를 수색하여 오고, 신창령(新昌令) 형제도 역시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 이 일이 결국 허사일지 실사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늦출 수 없다."
하였다. 성희안이 안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주서(注書)를 보내어 수색할 것을 계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주서 권벌(權橃)이 명을 받아 가서 수색하였으나, 찾아낸 것이 없었다.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좌의정 유순정(柳順汀)·우의정 성희안·판부사(判府事) 이계남(李季男)·지사(知事) 정광필(鄭光弼)과 박열(朴說)·도승지 송천희(宋千喜) 등이 경회루(慶會樓) 남문에 앉고, 사관(史官) 권벌(權橃)과 반석평(潘碩枰)·문사관 봉상시 정(問事官奉常寺正) 안팽수(安彭壽)가 또한 참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383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민란(民亂) / 역사-편사(編史)
- [註 776]상산령(常山令)이말손(李末孫) : 이귀정(李貴丁)의 서제(庶弟).
- [註 777]
상변(上變) : 급변을 고함.- [註 778]
달구(㺚狗) : 물개.- [註 779]
창산군(昌山君) : 성희안.- [註 780]
평반(平反) : 피의 사실을 거듭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함. 혹은 신중히 조사하여 먼저번보다 죄를 가벼이 함. 《한서(漢書)》 전불의전 주(雋不疑傳註).○丙辰/右議政成希顔、雲水君 孝誠、莞城君 貴丁等, 率常山令 末孫, 【貴丁孽弟】 詣賓廳上變。 末孫啓曰: "臣家畜㺚狗。 去九月間, 貞松守 錫孫伻, 借臣母贖身上言, 草于臣家, 奴見狗請牽而去, 當與上言草俱還, 臣許之。 錫孫因留狗招臣, 臣往焉, 則曰: ‘請借我狗。’ 臣諾之。 自是錫孫。 日使人招臣語之曰: ‘吾與朴永文、黃孟獻、沈貞、李公遇、尹珣、黃衡、康允禧、李峓等, 約與獵猪西山。’ 一日語臣曰: ‘汝參原從乎?’ 曰: ‘未也。’ 曰: ‘汝是昌山從弟而未參, 人稱昌山君 【成希顔】 疏冷。 四寸之間, 何如是薄乎?’ 今月二十一日, 錫孫遺我雉一首, 因招臣, 臣往焉, 則盲人安八同及刀子匠, 亦在焉。 錫孫云: ‘明日更來。’ 二十二日以冬至習儀未往, 三日亦因雨未往, 四日往焉, 錫孫及子 【新昌令 訢也。】 俱在, 錫孫曰: ‘晦日往獵。’ 臣疑之問於訢, 訢曰: ‘叔姪之間, 何事諱之? 與朴永文謀議, 冬至夜, 令善射者三四人爲偶, 分遣三公家, 詣闕時從後射之。 先使人于鄕校洞峴擧火, 又於南山擧火, 相應以報, 剪除後, 共聚闕外, 廢上, 共立完原君。’ 臣曰: ‘朴永文無彌勒 唐來, 何以濟事?’ 訢曰: ‘雖無彌勒 唐來, 而永文今所率驍勇, 勝於彌勒等者三四人矣。’ 臣其日卽欲啓之, 未得細知, 故不果。 二十七日錫孫, 又招臣, 臣往焉, 則錫孫已歸義山令 潤家矣。 臣尋歸潤避接處, 問義山令、貞松守安在, 答曰: ‘歸永貞守家。 【名福重。】 黃參判孟獻、尹參判珣等四五人, 亦入永貞守家, 馬則皆還送。’ 云。 臣到福重家, 閉門諱之。 臣卽還家, 通簡于錫孫家, 則不裁答, 但曰: ‘明日更來。’ 臣今日罷漏時, 往錫孫家言曰: ‘欲歸楊州, 覲妻母。’ 以試其意, 錫孫曰: ‘汝名旣書之。 日亦已迫, 不當往矣。’ 臣曰: ‘昨歸永貞家則諱之。’ 錫孫曰: ‘本諱客, 不知汝來而諱之。 汝若偕吾子而來, 則汝得入謁所會宰相矣。’ 又曰: ‘歇福 【方言無福】 完原君已死矣。’ 臣卽歸嫡兄莞城君 貴丁家告之, 又歸雲水君 孝誠家, 偕進右議政成希顔家, 遂與上變。"
【史臣曰: "錫孫愚騃不能言語。 訢輕佻一妄人也。 皆不識字, 謀反之事, 皆出於訢誣飾, 而常山令 末孫之敷衍也, 事皆不實。 是獄, 訢坐亂言之科, 末孫亦被敷衍之罪, 則平反矣。 末孫以希顔切族, 得免其罪, 而乃反超品, 不亦濫乎?"】
傳曰: "貞松守、新昌令、義山令、永貞守等, 遣義禁府郞官及宣傳官、兼司僕拿來。" 成希顔啓曰: "此事請與領議政、左議政、義禁府堂上, 同鞫之。" 傳曰: "可。" 又傳曰: "義禁府郞官一人、宣傳官一人, 率入直壯勇隊十人, 往貞松守家, 搜探文書, 新昌令兄弟, 亦皆拿來。 此事其終虛實未可知, 然不可緩也。" 希顔曰: "上敎當矣。 請遣注書搜之。" 依允。 注書權橃, 承命往搜, 無得焉。 領議政朴元宗、左議政柳順汀、右議政成希顔、判府事李季男ㆍ知事鄭光弼ㆍ朴說、都承旨宋千喜等, 坐慶會南門, 史官權橃、潘碩評、問事官奉常寺正安彭壽亦與焉。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383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민란(民亂) / 역사-편사(編史)
- [註 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