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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9권, 중종 4년 8월 23일 계미 5번째기사 1509년 명 정덕(正德) 4년

사간원이 홍문관·대간 죄의 경중에 대해 아뢰다

대사헌 김전·대사간 이세인 등이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 상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 등은 모두 보잘것없는 몸으로 간관(諫官)의 반열에서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몸과 마음을 다바쳐 직분의 만에 하나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더 우악하게 용납하시어, 성조(聖朝)에서 간언(諫言)을 거절한다는 소문이 폐주(廢主) 때와 같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삼가 듣건대, 경전(經傳)에 이르기를, ‘살아서는 예(禮)로 섬기고, 죽어서는 예로써 장사하고, 예로써 제사지내야 효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644) 하였고, 불당(佛堂)에 가서 조종(祖宗)들을 굴욕되게 하고서도 그의 효도를 펴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기신재(忌晨齋)를 논하는 사람들이, ‘불도(佛道)는 허탄하고 망령되어 믿을 것이 못된다.’ 하고, ‘천승(天乘)나라 임금645) 의 영혼을 필부(匹夫)646) 앞에 가서 굴욕시킴은 사람의 아들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신명(神明)은 예(禮)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 법이다.’ 하는데, 전하께서는 이르시기를, ‘사람의 아들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누구나 극진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시고, ‘조종(祖宗)께서 폐하지 않으신 일이라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 하시니 이는 진실로 신 등이 전하께 실망되는 일입니다.

공자 말씀에, ‘만약 그 도리가 아님을 안다면 어찌 3년이나 되도록 기다려야 하리요.’[如知其非道 何待三年]647)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선조들을 굴욕시킴이 옳다고 여기시어 고치시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역시 옳지 못함을 아시면서도 감히 고치시지 않는 것입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경륜(經綸)하시던 초창기에 먼저 승도(僧徒) 금령(禁令)부터 세우셨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는 사사(寺社)의 토전(土田)과 장획(臧獲)을 감하시고 고치시어 군수(軍需)에 충당하게 하시고, 산릉(山陵)의 곁에는 또한 사찰을 짓지 못하도록 하셨으며,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두 성왕(聖王)의 전통을 이어받아 먼저 원당(願堂)을 혁파하고 이어 종문(宗門)을 감하시니, 이에 승도가 자취를 감추어 감히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였는데,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서교(西敎)648) 를 숭상하시기 시작하여 중외(中外)가 그 바람을 따르게 되어 장차 고계 광수(高髻廣袖)649) 보다도 심해질 폐단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중흥(中興)의 한 가지 큰 누덕(累德)으로서, 식견 있는 선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성종 강정 대왕(成宗康靖大王)께서는 요(堯)·순(舜)같으신 성인으로 공(孔)·맹(孟)의 학문을 준행하시어, 말씀하시는 바가 성리(性理) 아닌 것이 없고 행하시는 바가 덕교(德敎) 아닌 것이 없으시므로, 바람이 불매 풀이 쓸리듯 하고 형체에 따라 그림자가 생기듯 하여, 전일 물들었던 버릇이 금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고쳐져, 집집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므로 거리의 아이들과 마을의 부녀자들도 또한 중 이야기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유독 기신재 일 한 가지를 마저 혁파하여 없애지 못한 것은 그 어찌 성종께서 어진 덕이 가리워졌거나 현혹된 데가 있어 그러하셨겠습니까? 백 년이나 되는 뿌리박힌 폐단은 반드시 먼저 그 근본을 뽑아야 했고, 바야흐로 힘써 조심해서 하시려고 뜻을 두셨던 것인데, 신민(臣民)들이 복이 없어서 갑자기 승하(昇遐)하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렇게 하기가 쉽습니다. 양종(兩宗)을 혁파하여 부서(府署)를 만들었고 승도(僧徒)가 시가(市街)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므로, 머리를 기르고 군사에 편입하는 자가 10명이면 8∼9명이나 되었으니 이러한 때에 기신재 같은 작은 일을 고치기는 사세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여러 달을 복합(伏閤)하여 아뢰었어도 오히려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신들의 통분하고 한탄스러워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한(漢)나라 혜제(惠帝)650)원묘(原廟)651) 를 세웠었는데, 후세에 오히려 그 예(禮)가 아님을 기롱하였습니다. 하물며 승도(僧徒)에게 의지하는 것이 선왕들의 예에 맞는 일이겠으며, 전하께서 조상을 받들어 효도하시려고 생각하시는 의리에 합하는 것이겠습니까?

가령 ‘아들 된 사람의 마음에 누구나 극진히 해야 할 바다.’고 한다면, 마땅히 종묘에서 정숙하고 화평하게 제사 모실 때에 있어서, 간간(簡簡)652) 하고 목목(穆穆)653) 하게 그 거처하시던 데를 생각하여 보고, 그 웃고 말씀하시던 모양을 생각하여 보며, 신주 앞에 나아가선 어렴풋이 그 자리에 계시는 듯하고, 주선(周旋)하다 문을 나서려면 그 거동하시는 소리를 듣는 듯이 하실 일이니, 이렇게 한 연후에야 효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효도를 펴실 자리는 종묘도 있고 문소전(文昭殿)도 있으며 여러 능(陵)도 있는데, 예(禮)에 맞게 제사드리는 것이 무슨 옳지 않음이 있어서 유독 좌도(左道)654) 의 말단의 일만을 그렇게 따르고 행하시는 것입니까? 신 등의 의혹은 너무도 심합니다.

신 등은 듣건대, 전(傳)655) 에 이르기를, ‘재물을 모으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이 모여들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도(道)가 있는 때는 부(富)가 백성에게 간직되고 도가 없을 때에는 부가 인군에게 간직되는 것이니, 부라는 것은 원망의 부고(府庫)인 것입니다. 인(仁)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부자 될 일을 하지 않고 의(義)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익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신민(臣民)의 임금으로서 만백성의 위에 계시며 온 나라의 많은 부(富)를 가지고 계시건만, 오히려 어찌 인의(仁義)를 저버리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여 구구하게 사장(私藏)하기를 일삼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내수사(內需司)를 논란(論難)하는 사람들이, ‘임금된 이는 사(私)가 없으므로 사사로이 저축할 수 없는 것인데, 거두어 들이고 흩어 주고 하는 사이에 폐해만 백성에게 미친다.’ 하건만, 전하께서는 ‘이제 시작한 것이 아닌데 어찌 경솔하게 고칠 수 있느냐?’ 하시니, 어찌 신 등을 이와같이 막막(邈邈)하게 한단 말입니까? 선왕(先王)께서 내수사를 설치하실 그 시초에는 어찌 오늘과 같은 극심한 폐단이 생기게 될 줄을 아셨겠습니까?

내수사의 종으로 외방(外方)에 깔려 있는 자가 무려 수만 명인데, 으레 복호(復戶)하여 주고 그 부역을 촌민(村民)에게 옮겨 시키니, 촌민들만이 이미 그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봄에 흩어 줄 때, 공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매우 적고 사사로이 주는 것을 매우 많게 하였다가, 가을에 거둘 때는 공사(公私)의 것을 분간하지 않고 날마다 독촉하여 받아들이되, 단지 우마(牛馬)를 빼앗고 정확(鼎鑊)을 들어 갈 뿐 아니라, 옷을 벗기고 등을 매질하기를 오히려 한없이 합니다. 또한 거기에다가 위차(委差)라고 하는 자가 이리저리 날뛰며 받아내어 거두기를 분별없이 하는데,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닭과 개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이런 말을 들으시고도 억지로 강행하시렵니까?

전하께서는 오랫동안 외방(外方)에서 고생하시며 백성들의 간난과 고초를 갖추 겪으셨건만, 오히려 고집하여 고치지 않으시고, 핑계삼아 조종(祖宗)께서 하신 일이므로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법을 만들 때 박하게 받도록 하여 놓아도 그 폐단은 오히려 탐심을 부리게 된다.’ [作法於涼 其弊猶貪]656) 는 것인데, 내수사의 설치는 박하게 받도록 법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단정코 고쳐야 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굳이 거절하여 고치지 않으시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신 등의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십니까?

근자에 전조(銓曹)에서 제수(除授)하고 주의(注擬)함이 자못 참람한 데에 빠지므로 신 등은 이미 그 불가함을 진달하기를 매우 은근하고도 간곡히 성상께 고려하시기를 바랐으나 조금도 가부간의 말씀이 없으시니, 신 등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과연 그 사람의 쓸 만함을 살피시고 굳이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사방 백성들은 겨우 수화(水火)에서 벗어나 신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여러 번 구제하는 은전(恩典)을 내렸지만 백성들을 괴롭히는 뿌리가 아직도 제거되지 않았으니, 인정(仁政)을 하시기에는 아직도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사 받드는 일을 분명히 하시려 하고 성(誠)과 경(敬)을 독실하게 하시려 하되, 도리어 오랑캐의 교657) 를 준행하여 조종(祖宗)께 굴욕되는 일을 그대로 행하고 고치지 않으시니, 효도를 하시기에는 또한 먼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명한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전도(顚倒)되어 인재의 임용(任用)이 서로 엇갈리되, 굳이 논계(論啓)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절하시니, 관원의 임용을 살펴서 하시기에는 역시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구(長久)하고 원대한 계책을 버리고 살피지 않으시며, 바르고 곧은 말을 거절하고 들어 주지 않으시니,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시기에는 또한 먼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백성들을 안정시키려고 하신다면 내수사의 장리를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요, 조상을 존대하려고 하신다면 기신재를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며, 재질이 좋은 사람을 진출시키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쳐 조정에 구실 못하는 관원이 없게 하려고 하신다면, 곧은 말을 마땅히 받아들이셔야 할 것이요, 잘잘못을 가리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으려고 하신다면 간하는 말을 따르시는 도량을 넓히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자리가 안이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시어, 백성 아끼시기를 실지로써 하시고 조상 받드시기를 효도로써 하시며, 아랫사람 대접을 성의로써 하시어 허심탄회하게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소서."

이어 아뢰기를,

"이사균(李思鈞)·안처성(安處誠) 등을 비록 나와 추고(推考)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나, 사의(私議)로써 공론을 저해하여 억제하였으니, 어떻게 뻔뻔스럽게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죄를 주지는 않더라도 경연관(經筵官)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갈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35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금융-식리(殖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註 644]
    ‘살아서는 예(禮)로 섬기고, 죽어서는 예로써 장사하고, 예로써 제사지내야 효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논어》 위정편(爲政篇)과 《맹자》 등문공편(縢文公篇)에 보임.
  • [註 645]
    천승(天乘)나라 임금 : 우리 나라 임금을 가리킨 말.
  • [註 646]
    필부(匹夫) : 불교의 교조(敎祖)인 석가모니를 지칭한 것임.
  • [註 647]
    공자 말씀에, ‘만약 그 도리가 아님을 안다면 어찌 3년이나 되도록 기다려야 하리요.’[如知其非道 何待三年] : 이 구절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끝에서 여섯째 장(章)인, ‘아버지가 있을 적에는 그 사람의 뜻을 살펴보고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는 그 사람의 행돌을 살펴보는 것이나, 삼년상(三年喪) 동안은 아버지의 법도를 고침이 없어야 효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라고 한 대목의 집주(集註)에 인용된 윤돈(尹焞)의 말인데, 공자의 말이라고 잘못 인용된 것임.
  • [註 648]
    서교(西敎) : 불교를 이름.
  • [註 649]
    고계 광수(高髻廣袖) : 높은 상투와 넓은 소매. 《후한서(後漢書)》 마요전(馬寥傳)에 ‘성중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지방에서도 한 자씩이나 높아졌다.’ [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 한 것과, 백거이(白居易)의 진사책문(進士策問)에 ‘광수 고계의 민요를 들으면 풍속이 부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聞廣袖高髻之謠 則知風俗之奢蕩也] 한 것을 미루어, 대중들이 시속 유행(時俗流行)을 따르다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짐을 뜻하는 말인 듯함.
  • [註 650]
    혜제(惠帝) : 제2대 임금 유영(劉盈)을 말함.
  • [註 651]
    원묘(原廟) : 정묘(正廟), 곧 종묘가 있는 데 다시 중복해서 지은 사당.
  • [註 652]
    간간(簡簡) : 큰 모양을 이름.
  • [註 653]
    목목(穆穆) : 언어와 용모가 아름답고 위의(威儀)가 성(盛)한 모양.
  • [註 654]
    좌도(左道) : 사교(邪敎).
  • [註 655]
    전(傳) : 《대학(大學)》.
  • [註 656]
    [作法於涼 其弊猶貪] : 《좌전(左傳)》 소공(昭公) 2년 조에 보임.
  • [註 657]
    오랑캐의 교 : 불교를 가리킴.

○大司憲金詮、大司諫李世仁等上疏, 略曰

臣等俱以無狀, 待罪諫列, 正鞠躬盡瘁, 以補職分之萬一。 伏惟殿下, 更加優容, 不使聖朝, 有拒諫之名, 如廢主所爲也。 伏聞《傳》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可謂孝矣。" 未聞有就佛宇辱祖宗, 而能申其孝也。 今之論忌齋者, 則曰: "佛道誕妄, 不足信也。" 曰: "屈千乘之靈, 辱於匹夫, 非人子所忍見也。" 曰: "神不享非禮也。" 殿下乃曰: "人子事親之心, 在所自盡也。" 乃曰: "祖宗所不廢之事, 不可輕改也。" 是固臣等缺望於殿下者也。 孔子曰: "如知其非道, 何待三年?" 殿下以先祖屈辱爲是, 而不可改乎? 抑亦知其非, 而不敢改乎? 恭惟太祖康獻大王, 經綸草(眛)〔昧〕 , 首立僧徒之禁, 太宗恭定大王, 減革寺社土田、臧獲, 俾充軍需, 山陵之側, 亦不營刹。 世宗莊憲大王, 承二聖之統, 先革願堂, 仍減宗門, 於是僧徒歛迹, 不敢恣行。 世祖惠莊大王, 始崇西敎, 中外承風, 將有甚於高髻、廣袖之弊, 是乃中興之一大累, 有識之士, 至今永惜。 成宗康靖大王, 以之聖, 遵之學, 所言無非性理, 所行無非德敎, 風行而草偃, 表正而影直, 舊染之習, 不禁而自革, 家立廟, 而宗有祀, 故街童里婦, 亦恥爲談僧之事。 獨有忌齋一事, 未盡革除, 是豈成宗聖德, 有所蔽惑而然耶? 百年根據之弊, 必須先拔其本, 方有意劼毖, 而臣民不祿, 遽爾賓天。 今時則易然也。 革兩宗爲府署, 禁僧徒入市, 長髮而編於行伍者, 十已八九。 如此之時, 革忌齋小事, 勢甚不難, 累月伏奏, 尙未回天, 豈非臣等所大痛恨者乎? 惠帝立原廟, 後世猶譏其非禮, 況(籍)〔藉〕 僧徒, 其得於先王之禮乎, 其合於殿下奉先思孝之義乎? 假曰人子之心, 在所自盡, 當於淸廟肅雝之時, 簡簡穆穆, 思其居處, 思其笑語, 入室僾然見乎其位, 周旋出戶, 肅然聞乎容聲。 如此然後可謂孝矣。 殿下申孝之地, 有宗廟焉, 有文昭殿焉, 有諸陵焉, 祭之以禮, 有何不可? 惟左道之末事, 是遵是行, 臣等之惑滋甚。 臣等伏聞, 《傳》曰: "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以有道之時, 富藏於民, 無道之時, 富藏於君, 富者怨之府也。 欲爲仁者, 不爲富; 欲爲義者, 不言利。 況以臣民之主, 處億兆之上, 富有一國之衆矣, 尙安有捨仁義, 求小利, 區區以私藏爲務哉? 今之論內需者則曰: "王者無私, 不可私蓄。" "歛散之際, 弊及於民也。" 殿下乃曰: "匪今伊始, 豈可輕改?" 是何待臣等, 如此其邈邈耶? 先王內需之設, 其初豈知弊生之極, 以至於今日乎? 內需之奴, 布列於外者, 無慮數萬, 而例復戶役, 則移之於村民, 村民已受其困矣。 春散之際, 公給甚少, 而私分甚多, 秋歛之時, 則不分公私, 逐日督納, 不但奪牛馬遷鼎钁, 而赤其身笞其背, 猶不厭也。 又從而稱爲委差者, 隳突東西, 徵歛無藝, 馬跡所過, 鷄、犬一空。 殿下其忍聞此言而强爲之乎? 殿下久勞於外, 民之艱苦, 備嘗之矣。 猶執而不改, 乃諉之曰: "祖宗所爲, 不可輕革。" (鳴呼)〔嗚呼〕 ! 作法於涼, 其弊猶貪。 內需之役, 不可謂作法於涼, 斷然可改, 而殿下固拒不改, 未審殿下, 以臣等之言, 爲不足信也耶? 近者銓曹除注, 頗失濫冒, 臣等已陳其不可, 勤懃懇懇, 冀回天顧, 而略無可否。 臣等未知殿下, 果能察其人之可用, 而固拒之耶? 今者四方之民, 甫免水火, 呻吟不絶, 而屢下恤典, 病民之根, 尙未除, 其於仁也, 不亦遠乎? 祀事欲明, 誠敬欲篤, 而反遵胡敎, 屈辱祖宗, 忍行而莫之改, 其於孝也, 不亦遠乎? 賢不肖錯亂, 材任相違, 而固拒論者之說, 其於審官, 不亦遠乎? 久大之謀, 棄而不省, 正直之言, 拒而不聽, 其於納諫, 不亦遠乎? 殿下如欲安民, 內需長利, 不得不革, 如欲尊祖, (忌晨)〔忌辰〕 之齋, 不可不革, 如欲進有材退不肖, 使朝廷無曠官, 則讜言在所當納, 如欲考得失正紀綱, 則從諫之量, 不可不恢。 伏願殿下, 念天位之不易, 愛民以實, 奉先以孝, 待下以誠, 虛納諫諍。

仍啓曰: "李思鈞安處誠等, 雖不進來推考, 然以私議, 沮抑公論, 安可靦然在職? 雖不加罪, 不合於經筵官, 請遞之。" 不允。


  •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35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금융-식리(殖利)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