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관찰사 고형산이 보을하보의 복립·무산보의 이설에 관한 일로 장계하다
함경도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회령(會寧) 밑에 있었던 보을하(甫乙下) 고보(古堡)의 복립(復立)과 무산보(茂山堡) 이설(移設)에 대한 사실의 전말을 써서 장계(狀啓) 올리기를,
"신이 해조(該曹)의 수교(受敎)를 보건대, 신의 아뢴 바의 뜻을 아시고, 또 조정에서도 이미 그것이 정당한 줄 알아서 지난해에 새로운 보기(堡基)를 심정(審定)한 후에, 양보(兩堡)의 백성들이 스스로 장차 살아나갈 도리를 알고 옮길 뜻이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신행(臣行)하면 신에게 말하기를,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방수(防戍)하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 양보(兩堡)를 설치한 지역은 연달은 수재(水災)로 인하여 모두 수손(水損)되어서 촌토(寸土)·척지(尺地)라도 경작을 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20여 리나 되는 지역에 출경(出耕)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지키느라 왕래하는데 늦게 나가고 일찍 돌아오게 되니, 어찌 스스로 경종(耕種)을 온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수확의 이익이 이 때문에 충실치 못하므로 드디어 생업을 잃고 도망하여 흩어진 자가 반이 넘으니, 지금 이를 이설(移設)하지 아니하면 수 년이 못 되어 실수(失守)하게 될 것이다.’ 합니다. 신이 이 말에 따라 그 형세를 보건대, 과연 백성의 말과 같습니다.
수교(受敎)한 후로 지금 2년이 되었는데, 다시는 살피지 않으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이 주야로 헤아려 보아도 오늘의 거조는 그만두려 해도 그럴 수 없고, 백성의 노력을 가볍게 쓸 수도 없는 것이며, 또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여 변경의 토지를 개척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번병(藩屛)을 공고히 하며, 또 한편으로는 경작도 하고 방수(防戍)도 하면서 민업(民業)을 수행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육진(六鎭)의 설치를 상고하여 보건대, 계축년831) 에 회령진(會寧鎭)을 알목하(斡木河)에 설치하고, 또 그 남쪽 20리 지역에 보을하보(甫乙下堡)를 두어 원진(援鎭)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부령진에 이르기까지 20리 사이에 연대(煙臺)832) 두 곳을 두어, 통행하는 길과 경작하는 전지를 모두 내지(內地)에 두어 지키는데 폐단이 없도록 하였으니, 옛 사람의 설진(設鎭)한 계획이 참으로 그 요체(要諦)를 얻은 것이라, 후인이 이를 고칠 바가 아닙니다.
그 후 경진년833) 에 이르러서는 모신(謀臣)들이 의논을 드려 보을하보(甫乙下堡)를 혁파하고 풍산내지(豐山內地)로 축소 배설[縮排]하여 드디어 조종(祖宗)께서 개척한 땅이 변하여 야인들의 거주하는 마을이 되게 하였습니다. 풍산·무산 두 보(堡)사이에는 다만 하나의 자그마한 산(山)이 막혀 있을 뿐인데, 야인들은 이 산 하나마저 사냥과 방목을 하는 곳이라 하여, 피아(彼我)의 경계도 없이 서로 왕래하고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임술년834) 이전에는 양보(兩堡)의 사람과 가축을 몇 번씩 잡아다 죽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처음 보을하보(甫乙下堡)를 폐지한 것은 적수(賊藪)835) 를 멀리하고 적로(賊路)를 피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도적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내가 갈 수 있는 길이면 도적들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풍산(豐山)을 지키지 못한다면 장차 어느 곳으로 피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건치(建置)와 연혁(沿革)836) 은 국가의 대사이며, 안토중천(安土重遷)837) 은 백성들의 상정(常情)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아야 할 일을 말지 않으면 백성이 원망을 일으키고, 말 수 없는 일을 한다면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잊어 버리거든, 하물며 지금 양보(兩堡)를 이설하는 것과 보을하보(甫乙下堡)를 다시 세우는 일은 민정에서 나온 것이니, 천사(遷徙)의 괴로움은 진실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가지 대의(大義)와 두 가지 큰 이익이 있으니, 선조(先祖)의 옛 경계를 회복하는 것은 하나의 대의(大義)요,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을 배제하게 됨은 첫째 큰 이익이며, 경작과 방수(防戍)의 양편(兩便)을 얻게 됨은 둘째의 큰 이익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이 나라의 기초를 세우신 땅으로서 국가를 위하여는 동·검(潼劍)838) 과 같은 요처이니, 성곽(城廓)의 견고하게, 군수(軍需)를 비축하고, 군사훈련하는 것을 다른 도(道)의 백 배로 한 연후라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군수가 넉넉지 못하고 사마(士馬)가 정예하지 못하며 군기가 단련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세 가지 폐단이 있는데도 때를 놓쳐서 도모하지 아니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욱 대신들이 마땅히 친히 보고 의논을 드려 조치해야 할 때입니다.
신이 듣건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눈으로 보지 않는 일이라면 비록 그것이 작은 일일지라도 합당하게 조처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큰일이겠습니까? 만약 폐조(廢朝)의 잔폐(殘弊)한 나머지 중신(重臣)을 보내어 다시 살피게 한다든가 군인을 동원하여 성을 쌓는 역사가 폐단이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한낱 그 하나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3보(堡)에 성을 쌓는 역사를 비록 일시에 아울러 거행한다 해도 그 역사에 드는 군인은 많아야 8∼9천 여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역사하는 날도 수십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이 올 때 거느리는 군관 5∼6인과 종사관(從事官) 2∼3명을 지공(支供)하는 일은, 일도(一道)의 힘을 기울여 거행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나는 역(驛)과 기숙하는 관사에 지공하는 비용도 1∼2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한두 가지 폐를 염려하여 만세몽리(萬世蒙利)의 대사를 폐지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신은 오래도록 북방(北方)에 있으면서 야인(野人)들의 정상을 익히 보았는데, 그들은 비록 부자(父子) 사이라도 한번 혐의로 틈이 있게 되면, 원수[仇敵]와 다름없이 잔해(殘害)를 가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만약 이(利)로써 결탁을 하였다가 그 이가 다하면 반목(反目)하는 자들이니, 날마다 천금(千金)을 소비한다 해도 그 마음을 복종시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밖으로는 회수(懷綏)839) 의 혜택을 보이면서 안으로는 무비(武備)의 계책을 닦아, 우리 수졸(戍卒)로 하여금 추워하는 자는 옷을 얻고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얻도록 하면, 비록 수역(戍役)의 괴로움이 있다 해도 항상 굳게 지킬 뜻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력은 저절로 강하여져서 저들의 세력이 스스로 굴하도록 하면 변방을 대비하는 일은 거의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이 급급히 성을 옮기고 보을하보(甫乙下堡)를 복구하려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후에 아뢴 바의 뜻을 참작하여, 만약 조정의 의논에 합치하면 명년 봄 이후에 대신을 골라 보내어 다시 이보(移堡)할 땅을 살피고, 또 세 가지 폐되는 일을 구핵(究覈)하여 편부(便否)를 마련해서 시급히 조치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97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외교-왜(倭)
- [註 831]계축년 : 1433 세종 15년.
- [註 832]
연대(煙臺) : 봉수대(烽燧臺).- [註 833]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834]
임술년 : 1502 연산군 8년.- [註 835]
적수(賊藪) : 도적의 소굴.- [註 836]
연혁(沿革) : 사정에 따라 바꿈.- [註 837]
○咸鏡道觀察使高荊山, 以會寧下甫乙下, 古堡復立, 與茂山堡移排形止, 狀啓曰:
臣伏覩該曹受敎, 知臣所啓之意, 朝廷已知其可。 去年新堡基, 審定之後, 兩堡之民, 自知其將有生生之理, 遷徙之望益切。 每於臣行, 語臣曰: "設堡防成, 所以爲民也。 今我兩堡時排之地, 連因水災, 盡爲水損, 無尺寸可耕之地。 不得已出耕于二十餘里之地, 守護往來之際, 晩出早還, 何以自盡其耕種乎? 收穫之利, 因此不敷, 遂至失業, 逃散者過半。 今不移置, 則不數年間, 將爲失守。" 臣以此言, 觀其勢, 果若民言矣。 受敎之後, 今至二歲之久, 更無復審之事, 其故何歟? 臣(書)晝思夜度, 今日之擧, 非可已不已, 而輕用民力也, 亦非好大喜功, 而開拓境土也。 一以控扼賊路, 以固藩屛, 一以且耕且戍, 俾遂民業。 今考六鎭之設, 歲在癸丑, 設會寧鎭于斡木河, 又其南二十里之地, 置甫乙下堡, 以爲援鎭。 又其南至富寧鎭境二十里之間, 置烟臺二處, 所行之路, 所耕之田, 皆在內地, 俾無守護之弊, 其古人設鎭之計, 眞得其要, 非後人之所能改矣。 後至庚辰之歲, 謀臣獻議, 革罷甫乙下之堡, 縮排于豐山內地, 遂使祖宗開拓之地, 變爲彼人所居之里。 其於豐、茂兩堡之間, 只隔一小山耳, 彼人之徒, 唯此一山, 自以爲田獵放牧之所, 無彼(彊)〔疆〕 我界, 更出迭入, 自恣無忌。 去壬戌年前, 兩堡人畜, 再三擄殺。 以是觀之, 則初革甫乙下之堡, 欲其遠賊藪避賊路也, 反爲賊所侵, 此古人所謂 ‘我能往, 寇亦能往也。’ 脫有豐山失守, 則將何地而避乎? 臣聞建置沿革, 國之大事, 安土重遷, 民之常情。 是故事可已而不已, 民起怨謗, 事非得已而爲之, 民忘其勞。 況今兩堡移排甫乙下復立之事, 則事出民情, 遷徙之苦, 固不足慮也。 而又有一大義, 二大利焉。 復先祖之舊(彊)〔疆〕 , 一大義也, 控賊路之要衝, 一大利也, 得耕戍之兩便, 二大利也。 不特此也, 本道乃祖宗肇基之地, 爲國家潼劍之要, 城郭之固, 軍需之儲, 兵甲之鍊, 當百倍於他道, 然後可以守之。 今也不然, 軍需不敷, 士馬不精, 軍器不鍊。 有此三弊, 而失今不圖, 後悔何及? 此尤大臣之所當親見, 而獻議措置之時也。 臣又聞百聞不如一見。 若目所不覩之事, 則雖其小事, 尙未合於措置之宜, 況其大事乎? 若曰廢朝殘弊之餘, 遣重臣復審之事, 發軍人築城之役, 是其弊也, 則是徒知其一, 未知其他也。 臣意以謂三堡築城之役, 雖一時竝擧, 所役之軍, 則多不過八九千餘名, 所役之日, 則亦不過數旬之久。 其重臣之來, 帶率軍官五六人, 從事官二三員, 支供之事, 非盡擧一道而行, 其於所經之驛, 所宿之(官)〔館〕 , 所供之費, 不過一二日而已。 慮此一二小弊, 而廢萬世蒙利之大事可乎? 臣久在北方, 熟觀野人之情。 雖父子之間, 一有嫌隙, 則殘害常加, 無異仇敵, 況其他人乎? 若結之以利, 利盡則反目, 縱使日費千金, 難以服其心。 莫若外示懷綏之惠, 內修武備之策, 使我戍卒, 寒者得衣, 飢者得食, 雖困於戍役之苦, 恒存其固守之志, 我勢自强, 彼勢自屈, 則備邊之事, 庶可得矣。 臣之汲汲於遷城, 欲復甫乙下之堡者, 良以此也。 令該曹酌其前後所啓之意, 若合於朝廷之議, 則明年開春之後, 擇遣大臣, 更審移堡之地, 亦覈三弊之事, 便否磨鍊, 作急措置何如?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97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외교-왜(倭)
- [註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