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가 견성군의 신원을 청하다. 김경의 해임·사사로이 사직하는 일 등을 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장령 서지(徐祉)가 아뢰기를,
"즉위하신 이후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견성군(甄城君)에게 사사(賜死)한 것입니다. 다만 흉도들이 걸고 넘어진 것뿐이며 견성군은 실로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조정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어도 비호(庇護)한다는 지목을 받을까 혐의쩍어서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옛날 상(象)이 날마다 순(舜)임금 죽기를 일삼았으나, 순임금은 그를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비(有庳)에 봉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이를 칭송하며, 한 문제(漢文帝)는 삼대(三代) 이래의 현주(賢主)로되 회남왕(淮南王)을 촉(蜀)나라에 유폐하여 길에서 죽였으므로,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한 자의 베도 함께 꿰매어 입어야 하고, 한 말의 곡식도 찧어서 나눠 먹어야 하는 것인데,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다니.’ 하여 천추의 비난거리가 되었습니다. 대저 임금은 하나의 죄 없는 사람을 죽여도 인(仁)이 못되거늘, 하물며 형제이겠습니까? 그 때 견성군의 무죄함은 성상께서도 환하게 아시면서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신 것을 신 등도 알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결정하지 못하신 일을 아랫사람이 청하였으니, 한두 대신의 생각이 벌써 틀린 데다가, 대간은 조정의 정론(正論)을 잡고도 또한 조정에 견제되어 그 뜻에 부회(附會)하였으니, 그 실수가 더욱 큽니다. 청컨대, 그 처자를 후대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고, 또 후세로 하여금 이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하고, 또 김경의(金敬義)·이무(李碔)의 일을 논하였으며, 헌납 이번(李蕃)도 또한 김경의의 일을 아뢰었다. 영사(領事) 박원종이 아뢰기를,
"견성군의 일을 계달한 것은 매우 온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때 만약 국가와 인심이 이미 안정되었었다면 먼 지방에 안치한들 무엇이 해로왔겠습니까? 이과(李顆)는 사림(士林)에서 추앙을 받는 자로 추대한다는 명목을 내건 것을 견성군은 사실상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다시 빙자하여 명목을 내걸었기 때문에 변란이 그치지 아니하였고, 견성군의 화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이미 후하게 하였으니, 이제 더욱 은전(恩典)을 베풀도록 하는 것이 온당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성(甄城)의 일을 내가 차마 결단치 못하였는데, 조정에서 다 같이 청하기 때문에 그 대의(大義)에 따라 결단하였다."
하였다. 원종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대의에 따라 부득이 좇아야 할 때에 아래에 있는 자로서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사세가 절박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원종이 또 아뢰기를,
"의주 목사(義州牧使)의 임무는 방어가 긴급한 것이 아니요, 중국 사람과 왕래하는 사신(使臣) 접대와 변방 백성들의 무휼(撫恤)이 중한 일인데, 신은 무신들 중에서 그 임무를 수행할 만한 자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비록 김경의를 해임시킨다 하더라도 마땅히 문신으로서 재상의 물망이 중한 이를 골라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의주의 임무가 이와 같이 중하니, 경의를 해임시키는 것이 가하리라."
하였다. 원종이 아뢰기를,
"신이 중국의 연대(煙臺)와 방어(防禦) 등의 일을 보건대, 지극히 주밀합니다. 변방의 장졸은 비록 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죽었다는 통보가 도착한 후에 갔는데, 근간 회령(會寧)·삭주(朔州) 부사는 모두 친병(親病)으로 진을 버리고 상경하니, 변장(邊將)이 된 자로서 이같이 함은 불가한 일입니다. 중조(中朝)670) 의 신하는 본토에서 8천여 리를 떠나 출사하는 자도 있었으나, 근친(覲親)이나 성묘(省墓)하는 법이 없는데, 근래 우리 나라 조관(朝官)은 근친이나 성묘로써 사직서를 올려 말미를 받는 일이 빈번하니, 관의 일이 어찌 폐이(廢弛)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비록 중국의 법과 같이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또한 금지하여 빈번하게 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중국의 조관(朝官)은 예궐(詣闕)하거나 관부에 들어도 모두 사가(私家)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기 때문에 각사(各司)에 폐단이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관가에서 준비하므로 날로 조잔(凋殘)하여 가므로, 예전에 실로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국속(國俗)이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변경할 수 없는 형세이나, 널리 의논하여 중국의 예에 따라 모두 사비(私備)로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각사에서 공비(公備)한 유래가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그 폐단을 또한 구제해야 되는 것이니, 널리 의논하라."
하였다. 지사(知事)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질정관(質正官)의 파견이 비록 오래 되었으나 아무 하는 일이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질정관을 폐지하고 중국에 주청(奏請)하여,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시키되 연소한 문관을 골라 2∼3년 머물면서 문사(文士)들과 상종하게 하면, 그 배우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며, 한어(漢語)와 이문(吏文)도 저절로 익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원종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자문(咨文)과 점마(點馬)를 보내는 것은 필요치 않다고 여겨집니다. 신이 가지고 있던 진헌마(進獻馬)를 회동관(會同館)에 두었더니 10여 일이나 먹이지 아니하여 죽은 것이 많았으되 이를 묻는 자가 없었고, 또 수의 대소(大小)를 상고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모색(毛色)을 자문(咨文)에서 빙고할 리도 만무하며, 비록 빙고한다 하더라도, 길에서 죽어 다른 말로 대체하였다고 대답한다면 반드시 심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보건대 북경으로 가는 통사(通事)의 복물(卜物)은 다만 한 바리 뿐인데 그 무역한 단자(段子)는 1백여 필에 이르고, 다른 물건도 이와 대등하니, 이는 반드시 은(銀)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중하기 때문에 숨겨서 가지고 가므로 적발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비록 적발코자 하여도 그 죄가 너무 중하기 때문에 차마 적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죄인은 사형(死刑)을 감하여 전가 사변(全家徙邊)671) 에 처하게 하면 혹 적발될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견성군의 죽음은 실로 아무런 까닭이 없다. 만약 위에서 그 도리를 잃는다면 비록 견성군이 없더라도 어찌 견성군 같은 이가 없겠는가? 하물며 추대될 물망이 없었음에랴? 서지의 말이 당연하다.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80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무역(貿易) / 교통-마정(馬政) / 역사-고사(故事) / 어문학-어학(語學)
○壬申/御朝講。 掌令徐祉曰: "卽位以後, 有累聖德事, 賜死甄城是也。 凶徒特(籍)〔藉〕 口耳, 甄城實不知也。 其時朝廷雖有欲言者, 嫌於庇護, 未敢也。 昔象, 日以殺舜爲事, 舜不惟不罪, 封之有庳, 至今稱之。 漢 文三代以下之賢主, 淮南王廢徒於蜀而道死。 百姓歌曰: ‘一尺布尙可縫, 一斗粟尙可舂, 兄弟二人不相容?’ 千載譏之。 大抵人主, 殺一無罪, 非仁, 況兄弟乎? 其時甄城之無罪, 上心洞照, 留難不決, 臣等亦知之。 君上所不決之事, 下人請之, 一二大臣之意, 旣誤矣, 臺諫執朝廷正論, 亦牽制於朝廷, 附會其意, 其失尤大。 請厚其妻子, 以雪其冤, 且使後世, 知事出於不得已也。" (具)〔且〕 論金敬義、李碔事。 獻納李蕃, 亦啓金敬義事。 領事朴元宗曰: "甄城事, 啓之甚當。 然其時若國家已安, 人心已定, 則置之遐方, 何害? 李顆乃見推於士林者, 而以推戴爲名, 甄城果不知之矣。 然兇逆之徒, 復藉以爲名, 則爲變不止, 而甄城之禍。 亦不止此矣。 喪葬諸事, 旣已厚矣, 今益施恩典爲當。" 上曰: "甄城之事, 予不忍決之, 朝廷共請, 故計其大義, 而決之耳。" 元宗曰: "方以大義勉從之時, 群下誰不出涕? 迫於事勢, 而人心未定故耳。" 元宗又曰: "義州牧使任防禦, 則不緊, 接待上國之人往來使臣, 字撫邊氓爲重。 臣不知武臣之中, 有可當其任者。 今雖遞敬義, 當擇其文臣宰相望重者遣之。" 上曰: "義州之任, 如此其重, 敬義遞之可也。" 元宗曰: "臣觀中朝烟臺防禦等事, 至爲周密, 邊方將卒, 雖父母歿, 凶聞至然後乃去。 近間會寧、朔州府使, 皆以親病, 棄鎭上來, 爲邊將者, 不可如此。 中朝之臣, 離本土八千餘里, 而仕者有之, 然無覲親掃墳之法。 近來朝官, 或覲親, 或掃墳, 呈辭受由, 至爲頻數, 官事豈不廢弛? 今縱不得如中朝之法, 亦令禁止, 使不得頻數出入。 而臣觀中朝朝官, 詣闕及入官府, 皆取飮食於私家, 以此各司無弊。 我國則皆令公備, 日就凋殘。 前此固欲議啓, 但國俗已久, 勢不可卒變。 然廣議, 依中朝例, 皆令私備。" 上曰: "各司公備, 其來已久, 然亦宜救弊, 當廣議。" 知事申用漑曰: "質正官之遣雖久, 然無所爲之事。 臣意除質正官, 而奏請遣子弟入學, 擇年少文官, 俾留二三年, 與文士相從, 則其所學必多, 而漢語、吏文, 自可習熟矣。" 元宗曰: "臣意以爲咨文點馬, 不必遣也。 臣所持進獻馬, 置諸會同館, 十餘日不飼, 多致物故, 無有問者。 且不考數之多少, 萬無毛色憑考咨文之理。 雖或憑考, 若對以路死, 代以他馬, 則必不審問也。 又見赴京通事, 卜物只一駄, 而其所貿叚子, 多至百餘匹, 他物稱是, 此必用銀之故也。 然以其罪重而潛持, 故摘發甚難, 雖欲摘發, 其罪甚重, 故亦不忍爲。 臣意以爲減死, 爲全家徙邊, 則或有摘發之理也。"
【史臣曰: "甄城之事, 實出無故。 若上失其道, 則雖無甄城, 豈無甄城? 況無推戴之望乎? 徐祉之言, 當矣。"】
- 【태백산사고본】 4책 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80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군사(軍事) / 외교-명(明) / 인물(人物) / 재정-국용(國用) / 무역(貿易) / 교통-마정(馬政) / 역사-고사(故事) / 어문학-어학(語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