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일의 일로써 대간과 대신이 서로 논박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이세인(李世仁)과 지평 김안국(金安國)이, 원종 공신 및 족친에게 가자한 일에 대하여 반복 논계하고, 또 아뢰기를,
"안한영(安漢英)은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며, 최연손(崔連孫)은 반드시 범죄의 실정을 알고 난 후에야 말겠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이 아뢰기를,
"대간이 ‘원종 공신에게 가자한 일은 마땅히 개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옳으나 신 등이 사정을 썼다고 한 것은 그 말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정할 때에 무릇 공로가 있는 사람은 신 등이 실지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어찌 함께 알겠습니까? 대간은 곧 전해 들은 것을 가지고 신 등이 사정을 썼다고 말하니, 어찌 그것이 사정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지극히 우매하지만 국가를 재건하는 때를 당하여 마음을 다해서 협찬, 태평성대를 보려고 한 것이니 결단코 사정을 쓴 것은 아닙니다."
하니, 김안국이 아뢰기를,
"성희안의 말이 옳습니다. 신 등인들 어찌 성희안이 사정을 썼다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다 같이 1등이 되었는데도 그 말석에 있는 사람이 도리어 당상관에 승진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박영문(朴永文)이 장정(張珽)의 위에 있지마는, 박영문의 공로가 어찌 장정보다 나았겠습니까? 그때 창졸간의 일이라 모두 이와 같았는데 어찌 이것으로 사정을 썼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김안국이 아뢰기를,
"임금의 존엄으로도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듣는데, 하물며 대신이겠습니까?"
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유담년(柳聃年)은, 실지는 의거(義擧)를 일으키는 의논에 참여했지마는 마침 충주(忠州)에 있었기 때문에 대공(大功)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원종 공신 첫째에 두어야 하는데도 마침내 3등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어찌 이런 일로써 크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김안국이 아뢰기를,
"성희안이 그 뜻을 말하는 것은 옳지마는, 그러나 불평스러운 얼굴빛이 있는 것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신 등이 자격이 없는 몸으로 대간이 되었지마는, 언사(言事)의 책임이 있으므로 생사(生死)·화복(禍福)을 헤아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은, 전하를 인도하여 도리에 맞도록 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사념(邪念)을 가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희안이 또 아뢰기를,
"신이 비록 우매하지만 어찌 대간의 말을 돌보지 않겠습니까? 옛날 당(唐)나라 때 어떤 무부(武夫)303) 가 말하기를, ‘내가 오원제(吳元濟)를 정벌할 때를 당해서는 마음이 항상 태연자약했는데, 지금 온 어사(溫御史)에게는 담이 떨어질 지경이다.’고 했습니다. 무부도 이러한데 하물며 신이겠습니까?
옛날에 임금이 배 타는 것을 간(諫)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목의 피를 수레바퀴에 뿌리겠다.’하니 황제가 화를 내었고, 한 사람은 말하기를, ‘배 타는 것은 위태롭고 가마 타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니 황제가 기뻐했다고 합니다. 같은 말인데도 희로(喜怒)에 다름이 있는 것은 인성(人性)이 그러한 것입니다. 신은 다만 미충(微衷)을 아뢴 것뿐인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신이 말주변이 없는 까닭입니다.
지난번에 외방 수령(守令)들을 사태(沙汰)304) 할 때에 신이 대신들과 더불어 둘러앉아 함께 의논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의(私意)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후의 언사(言事)하는 사람이 오히려 공평하지 못했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일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신이 또 지난번에 북경(北京)으로부터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조보(朝報)305) 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으로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이 신용개(申用漑)·안팽수(安彭壽)와 더불어 말하기를, ‘폐조(廢朝)의 오습(汚習)이 지금에 와서 혁신이 된 것은 참으로 천년의 큰 경사이다. 다만, 우리 나라 인재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인데, 지금 작산(作散)306) 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어떤 사람으로 빈 자리를 메우겠는가?’ 하고 조정에 돌아와 보니, 파산자(罷散者)307) 가 또 많았습니다. 신은, 대간이 비록 공론을 가지고 했더라도 그 풍문에 들은 것이 만일 모두 상세히 알지 못함이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감히 아뢰었던 것인데, 그 후에 언사하는 사람이 더욱 핍박했습니다.
신이 만일 간관을 배척하려 했다면, 다른 날 나라를 그르치는 마음이 이로부터 싹틀 것이요, 마땅히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함께 먼 곳에 귀양살이를 할 것이니 감히 이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간관의 책임은 중한 것으로 옛날에 절함(折檻)·견거(牽裾)308) 를 한 사람도 있었는데, 하물며 말하는 사이겠습니까? 신이 성종 때 일로 말씀드린다면, 옥체가 미령(未寧)하신 때에 오래 경연을 정지하시면 성종(成宗)께서는 매양 한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홍응(洪應)이라는 사람은 홍상(洪常)의 아비인데 아뢰기를, ‘전하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꼭 경연에 납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더니, 그 때의 경연관들이 공격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였습니다. 또, 김수동(金壽童)이 정언(正言)이었을 때 길에서 매를 팔에 얹은 사냥 갔다 오는 젊은 환관을 만났는데, 그 환관이 길을 비켜 서지 않았음을 논박했으나, 성종께서 특별히 내버려두기를 명하시므로 김수동이 굳이 청했더니, 성종께서 전교하시기를, ‘그 젊은 환관은 집안의 종인데 나의 명으로 급히 돌아왔기 때문에 비켜 서지 않았을 뿐이다.’ 하셨습니다.
이에 서거정(徐居正)이 아뢰기를, ‘지금부터는 왕명으로 출행할 때에는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세마(洗馬)309) 와 같은 의식을 차리면, 정언이 스스로 비켜 설 것입니다.’ 하여, 그 당시 또한 서거정을 공격함이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간관의 언사를 신이 어찌 기피하겠습니까?"
하니, 김안국이 아뢰기를,
"방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고 대신들도 모두 현재(賢才)들이며 신 등도 비록 우매하지마는 또한 마음을 다하려고 합니다. 대신된 사람은 마땅히 강직하게 논란하고, 가부를 서로 도와 훌륭한 교화(敎化)를 이룩해야 하는데, 어찌 서로 버티고 서서 각자 의견을 달리하고 서로 공격한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대신이 아뢰기를, ‘대간이 신 등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니, 이것은 언사하는 사람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여러 현명한 신하들이 서로 삼가고 공경했으나, 범진(范鎭)과 사마광(司馬光)은 서로 가부(可否)를 말하며 논란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안수(晏殊) 같은 사람은 부필(富弼)의 장인이며 명망이 당대에 높았는데도 부필이 오히려 배척하여 간사하다고 했습니다. 옛날 사람은 임금 앞에서는 이와 같이 하면서도 밖으로 나오면 완전히 평상시와 같이 지냈으니, 어찌 감히 혐오하는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성희안은 너그러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도량이 어찌 좁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희안이 인재를 애석하게 여기는 말은 옳지마는, 그러나 폐조의 혼란(昏亂) 뒤에 그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정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간관의 말을 신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전일에 아뢴 것은 신의 소견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간이 논계하기를, ‘중외(中外)가 몹시 놀랐다.’고 한데 대해서는 신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나라의 땅이 비록 작지만 어찌 하루 동안에 중외가 두루 알겠습니까?
대체로, 풍문이라는 것은 그다지 옛날 일도 아닙니다.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부터 시작되어 옛 선비들이 그 잘못을 많이 논했고, 명(明)나라에 이르러 구준(丘濬)이라는 사람은 식견이 매우 높았는데, 《대학연의보유(大學衍義補遺)》를 저술할 때 풍문의 잘못을 충분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은 일찍이 그것을 보고 대단히 옳다고 생각한 까닭으로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이장곤(李長坤)은 아뢰기를,
"근자에 대신이 대간과 화합하지 못하여, 전하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조행(朝行)에서 정사를 하는 사이에서도 역시 서로 부딪치게 되니, 신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때에 사기(士氣)를 배양하고 간쟁(諫諍)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사대부(士大夫)로서 현달하지 못한 사람은 다투어 스스로 격려하여, 무릇 정치에 대한 시비를 온갖 말을 다하여 논의했습니다. 그리하여 시종(侍從)이나 쟁신(諍臣)310) 이 되어서는 곧은 말과 바른 의논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므로, 대신으로서 높은 녹봉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점점 서로 버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무오년311) 에 이르러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난 것인데, 그 때의 대신들이 어찌 다 간사했겠습니까? 처음에는 간관을 두려워하다가, 다음에는 미워하고 나중에는 원수로 대했으니, 슬픔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성희안의 일을 보건대,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으니, 신은 적습(積習)이 만연하여 나랏일이 날로 그릇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성희안이 또 아뢰기를,
"신이 식견이 천박하고 비루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신은 무오312) 의 이야기를 듣고 실로 놀라 마지않았습니다. 무오년에 신은 낭관(郞官)이 되어 몸소 그 일을 보았는데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대간의 말은 신이 실지로 달게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논공(論功)할 때에 대신이 어찌 사정(私情)을 용납했겠으며, 비록 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대신에게 사정을 용납했다고 말했겠는가? 다만, 전례가 없으며 그 수효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뢰었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23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變亂) / 역사-고사(故事)
- [註 303]무부(武夫) :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의 무장(武將) 이우(李祐)를 이름. 그가 ‘칙명을 어기고 마필(馬匹)을 진상하였다.’는 이유로 시어사(侍御史) 온조(溫造)의 탄핵을 받았을 때, ‘내가 밤에 채주(蔡州)에 들어가 오원제(吳元濟)를 잡을 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온 어사(溫御史)에게 담이 떨어졌다.’ 하였다 한다. 《구당서(舊唐書)》 온조전(溫造傳).
- [註 304]
사태(沙汰) : 선악을 가림.- [註 305]
조보(朝報) : 승정원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반포하던 통보.- [註 306]
작산(作散) : 산관으로 됨.- [註 307]
파산자(罷散者) : 파직되거나 산관으로 된 자.- [註 308]
절함(折檻)·견거(牽裾) : 절함(折檻)은 한(漢)나라 주운(朱雲)이 성제(成帝)에게 강간(强諫)하다가 성제의 격노를 사서 전상(殿上)에서 끌어 내릴 때 어전(御殿)의 난간을 붙잡고 버티며 간(諫)하다가 난간이 부러진 고사(故事).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 견거(牽裾)는 위(魏)나라 신비(辛毗)가 문제(文帝)에게 극간(極諫)하니, 문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므로 신비가 문제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간(諫)했다는 고사(故事). 《위지(魏志)》 신비전(辛毗傳).- [註 309]
세마(洗馬) : 익위사(翊衛司)의 종9품 벼슬. 세자 거둥 때 앞에서 인도하는 구실을 맡음.- [註 310]
○辛亥/御朝講。 大司諫李世仁、持平金安國, 將原從族親等加, 反覆論啓。 又曰: "安漢英不可不治其罪, 崔連孫必須得情後已。" 皆不允。 領事成希顔曰: "臺諫謂原從加當改者是也, 謂臣等爲用情, 則臣未知其可也。 當擧義之時, 凡有功勞者, 臣等實知之, 他人豈與知哉? 而臺諫乃以傳聞, 謂臣等用情, 豈其情乎? 臣雖至愚, 當邦家再造之時, 欲盡心協翼, 以觀大平之盛, 決不循私用情也。" 安國曰: "希顔之言當矣。 雖臣等, 豈謂希顔循私用情乎? 但均爲一等, 而其居末者, 反陞堂上, 此何故耶?" 希顔曰: "朴永文在張珽之上, 永文之功, 豈在珽之上乎? 其時倉卒之事, 類皆如是, 豈可以是, 斥人爲私乎?" 安國曰: "以人君之尊, 尙且虛懷聽諫, 況大臣乎?" 希顔曰: "柳聃年實預擧義之議, 適在忠州, 未參大功, 當置原從之首, 而竟錄三等。 此尙如此, 況他人乎? 豈可以是厚責乎?" 安國曰: "希顔言其志則可矣, 然有不平色, 臣實未知焉。 臣等承乏爲臺諫, 言責在矣。 不計其生死禍福, 而敢言者, 欲引君當道, 而使大臣無有邪念, 豈有他哉?" 希顔曰: "臣雖至愚, 豈不顧臺諫之言乎? 昔唐時有武夫云: ‘吾當伐吳元濟時, 心常自若, 今膽落於溫御史。’ 雖武夫如此, 況臣乎? 昔有諫君乘舟者, 一曰: ‘以頸血濺車輪。’ 則帝怒; 一曰: ‘乘舟危、乘轎安。’ 則帝悅。 同是言也, 而有喜怒之異, 人性然也。 臣只白微衷, 而聽之者, 皆以爲非, 是臣無口才故也。 頃者外方守令沙汰時, 臣與大臣, 環坐共議, 豈有一毫私意乎? 後之言者, 尙有不公之議, 爲事之難如此矣。 臣又頃者, 自北京到遼東, 見朝報, 則被駁作散者多矣。 臣與申用漑、安彭壽等言曰: ‘廢朝汚習, 至是惟新, 誠千載大慶。 但本國人材, 可指數也, 今作散如此, 當何以塡差?, 及還朝, 則罷散者又多矣。 臣謂臺諫雖持公論, 其風聞, 若有未悉焉, 則其弊不貲, 故敢啓, 其後言者益迫。 臣若欲排抑諫官, 他日誤國之心, 從此萌矣, 當與柳子光, 偕竄遐裔, 敢有是心哉? 且諫官之任重矣。 古有折檻牽裾者, 況言語間哉? 臣以成宗朝事言之, 當玉體未寧之時, 久停經筵, 成廟每以爲恨。 有洪應者, 常之父也, 啓曰: ‘聖學高明, 不必御經筵也。’ 其時經筵官等, 攻之甚急。 又金壽童爲正言, 道遇臂鷹小宦, 論其不避, 成宗特命棄之。 壽童强請, 成宗敎云: ‘小宦家奴也, 以予命急歸, 故不避耳。’ 徐居正曰: ‘今後若以王命行, 一人前導, 如洗馬之儀, 則正言自避耳。’ 其時亦攻居正甚急。 諫官之言臣何敢忌乎?" 安國曰: "方今聖明當天, 大臣皆賢才, 臣等雖愚, 亦欲盡心。 爲大臣者, 當論難侃侃, 可否相濟, 以致美化, 豈可角立自異, 交相傾危哉? 頃者大臣啓曰: ‘臺諫使臣等不敢言。’ 是忌言者也。 昔宋 仁宗朝群賢穆穆, 范鎭、司馬光交相可否, 論難不已。 以至晏殊, 富弼之舅也, 而名高一時, 富弼猶斥之爲奸邪。 古人於人主前如是, 出則完若平時, 豈敢懷嫌哉? 今希顔不能容受, 其氣量, 寧不窄隘耶, 且希顔愛惜人材之說是矣, 然廢朝昏亂之後, 其無蕩滌之政乎?" 希顔曰: "諫官之言, 臣實甘受, 前日所啓, 以臣所見如是故也。 臺諫論啓以爲中外駭愕, 臣以爲太過。 我國壤地雖小, 豈能一日之內, 中外徧知乎? 夫風聞非古也。 自唐 武后而起, 先儒多論其非。 至大明, 有丘濬者, 識見甚高, 撰《大學衍義補遺》, 極言風聞之非。 臣嘗觀之, 以爲甚是, 故啓之耳。" 侍讀官李長坤曰: "近者大臣, 與臺諫不協, 不特於上前, 於朝行政事間, 亦相牴(悟)〔牾〕 , 臣甚未便。 當成廟朝, 培養士氣, 優容諫諍, 士之未達者, 爭自激勵, 凡朝政是非, 極口論議。 及爲侍從諍臣, 危言讜論, 無所不至, 大臣肉食者, 皆畏惡之, 漸成角立。 侵尋至于戊午, 而禍大慘矣。 其時大臣, 豈盡邪慝哉? 始而畏之, 中而惡之, 終而仇敵之, 可勝悲哉? 臣見希顔之事, 似不容受人言, 臣恐積習蔓延, 而國事日非矣。" 希顔曰: "臣識見淺陋, 乃至於斯, 臺諫之言是也。 臣聞戊午之言, 臣實驚動。 當戊午之年, 臣爲郞官, 親見其事, 不可出諸口矣。 臺諫之言, 臣實甘受。" 上曰: "論功時, 大臣豈容私乎, 雖臺諫, 豈謂大臣容私乎? 第以無前例, 其數又多, 故啓之耳。"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23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變亂) / 역사-고사(故事)
- [註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