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율·허굉이 박영문을 징계하고 수령의 불법을 추문할 것을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사간 남율(南慄)과 지평 허굉(許硡)이 아뢰기를,
"어제는 토지와 노비에 관한 일과 박영문(朴永文)에 관한 일 이외에는 모두 윤허하는 명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사무를 폐지하고 와서 아뢰는 것은 전하께 과실이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영문(永文)은 소문의 출처를 캐묻지 않을 수가 없으니, 근거없이 떠도는 말은 국가의 큰 해독인 것입니다. 음직의 가자(加資)는 옛날에 그 전례가 없었으나, 통정(通政) 이상을 어찌 경솔히 제수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진관(特進官)의 직임(職任)이 가볍지 않으니, 안윤덕(安潤德)과 강징(姜澂)도 모두 체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남율(南慄)은 아뢰기를,
"전일에 박상(朴祥)과 신이 아뢴 바 수령(守令)의 불법(不法)한 일은,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반드시 추문(推問)했을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까지 이를 추문하지 않으니 신 등은 실망됩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정자지(鄭子芝)는 본시 음률(音律)을 해득한 까닭으로 발신(發身)했는데, 그가 해주 판관(海州判官)이 되고 후에 채홍준 종사관(採紅駿從事官)043) 이 되었을 때는 불법을 제멋대로 행하였기에 전일에 모두 이를 논계(論啓)하였는데, 그 욕심이 많고 더러움이 이와 같으니, 어찌 능히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정자지(鄭子芝)는 임숭재(任崇載)의 우익(羽翼)이 되어, 나쁜 짓을 유도함이 한이 없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이완(李琬)은 처음 제수될 때 서신(書信)을 부리(府吏)에게 보내어 교군(轎軍) 50명과 피장(皮匠) 5명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들이 도착하자 교군으로는 담[墻垣]을 수리하게 하고, 피장에게는 신을 만들게 해 행장을 차리게 하였습니다. 이 까닭으로 오랫동안 부임하지 않으니, 관찰사 장순손(張順孫)이 파면시키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완(李琬)은 제수된 후 여러 달이 되도록 부임하지 않으니, 감사가 파면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부임한 후에 정사의 성적을 보고서 마땅히 파면해야 할 것이라 하여 이완은 면하게 되었다.】 그 후에 장순손이 병든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이완이 부리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나를 파면시키기를 청한 사람은 마땅히 재앙을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친상(親喪)을 당할 것이다.’ 하면서, 장순손이 그 지경을 지나가도 지공(支供)하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또 관물(官物)을 많이 취한 것도 바로 전일에 아뢴 바와 같습니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장익(張翼)은 늘 술에 취하여 백성의 일을 다스리지 않고 있으며, 연안 부사(延安府使) 임호(任浩)는 그 탐욕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모두 추문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허굉(許硡)은 아뢰기를,
"박영문이 한 말의 출처는 캐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근거없는 말은 능히 국가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송(宋)나라 조정에 있어서도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천하의 일로써 자기 임무로 삼으니, 여러 소인(小人)들이 이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하송(夏竦)은 곧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부정한 사람[憸人]인데, 황제를 폐하고 세운다는 말을 거짓으로 만들어 유언으로 위에 들리게 하니, 인종(仁宗)이 비록 그다지 믿고 미혹(迷惑)하지는 않았지만,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은 이 일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힘써 청하여 서로 잇달아 파면되어 가버렸습니다. 지금 영문(永文)도 또한 유언을 만들어 참소하고 이간시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에 관한 일은 마땅히 관찰사의 포폄(褒貶)044) 을 기다려야 하겠다."
하였다. 허굉(許硡)은 아뢰기를,
"지금 진강(進講)하는 《서경(書經)》에, ‘융복(戎服)과 병기(兵器)를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으니, 무릇 일이란 무사할 때에 싹트게 되므로, 군주가 승평(昇平)에 젖어서 능히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나라의 형세는 쇠약하고 게을러져서 떨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이 태평 무사할 때를 당하여서 술과 여색(女色)에 빠졌으므로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안녹산(安祿山)이 한 번 외치자 멀리서 바라보고 뿔뿔이 헤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조정은 신해년045) 에 북방을 정벌한046) 이후로 20년이나 되었습니다. 변방의 근심이 없게 되니, 변방의 장수가 반드시 게으른 마음이 있을 것이고, 남방에도 또한 변방의 근심이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백 년 동안 잘 다스려져 태평한 적이 없었으니, 변방의 근심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남율(南慄)은 아뢰기를,
"주 선왕(周宣王)은 중흥(中興)한 군주입니다. 방숙(方叔)·소호(召虎)·중산보(仲山甫)·윤길보(尹吉甫)047) 등을 임용하여 능히 내정을 다스리고 외적을 물리쳐서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영토(境土)를 회복하였는데, 39년에 이르러서 왕사(王師)가 강씨(姜氏)048) 의 군사에게 패전하였으니, 《시경(詩經)》의 기보편(祈父篇)에는 군사가 오랫동안 전쟁하는 것을 원망했으며, 백구편(白駒篇)에는 현인(賢人)이 멀리 떠나는 것을 풍자했으며, 황조편 에는 만민(萬民)이 이산(離散)한 것을 풍자했으니, 그 까닭은 괵 문공(虢文公)049) 을 임용한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처음에는 비록 정치에 정신을 썼지마는 종말에는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현인(賢人)을 임용하고 재능(才能)을 부린 후에야 능히 종말까지 잘 마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태평한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북방의 오랑캐[北狄]와 남방의 오랑캐[南蠻]가 만약 함부로 날뛰고 침범해 온다면, 어찌 방어하겠습니까? 입정편(立政篇)050) 의 대지(大旨)는 인재를 임용하는 일로써 선무(先務)로 삼고 소공(蘇公)051) 이 옥사(獄事)를 신중히 처리한 일로써 종결을 지었으니, 청컨대 변방의 일에 유의하시고, 또 인재를 얻는 데 힘쓰고, 옥사(獄事)를 신중히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로부터 변방의 장수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사이(四夷)에 공(功)을 요구하여 변방의 흔단(釁端)을 열게 되니, 또한 인재를 가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 신윤무(辛允武)가, 당상관으로써 훈융 첨사(訓戎僉使)를 임명하자고 청하였는데, 대체 당상관이라 해서 어찌 다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면 당상관으로 승진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굉(許硡)은 아뢰기를,
"훈융(訓戎)이 비록 거진(巨鎭)이지만, 당상관을 차견(差遣)하는 일은 어찌 윤무가 제마음대로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상관 중에서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당하관을 당상관으로 승진시켜서 충원하여 보내면 되겠지만, 훗날의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21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註 043]채홍준 종사관(採紅駿從事官) : 홍(紅)은 여자, 준(駿)은 말을 이름이니, 연산군(燕山君) 때 미녀(美女)와 양마(良馬)를 구하기 위하여 지방으로 파견하던 관원.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註 044]
포폄(褒貶) : 지방 감사가 관하 각 고을 수령의 치적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우열(優劣). 전최(殿最)라고도 하는데, 이 때 성적의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한다.- [註 045]
신해년 : 1491 성종 22년.- [註 046]
북방을 정벌한 : 성종(成宗) 22년 11월,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豆滿江) 건너편의 오랑캐 올적합(兀狄哈)을 정벌한 일.- [註 047]
방숙(方叔)·소호(召虎)·중산보(仲山甫)·윤길보(尹吉甫) : 이 네 사람은 모두 주 선왕(周宣王) 때의 명신(名臣).- [註 048]
강씨(姜氏) : 제(齊)나라.- [註 049]
○甲辰/御朝講。 大司諫南慄、持平許硡曰: "昨日土田、臧獲及朴永文事外, 皆無允命。 臣等廢事來啓者, 欲上無過擧也。 永文言根不可不問, 飛語國家之大害。 蔭加古無其例。 通政以上, 豈可輕授? 特進官之任非輕, 安潤德、姜澂皆可遞也。" 南慄曰: "前日朴祥及臣所啓, 守令不法事, 意謂上必推問, 而今不推之, 臣等之望缺矣。 密陽府使鄭子芝, 本以解音律發跡。 其爲海州判官, 及爲採紅駿從事官時, 恣行不法, 前皆啓之。 其貪汚如此, 安能治民? 【子芝爲任崇載羽翼, 導惡無所不至。】 善山府吏李琬初除授時, 馳書于府吏, 令送轎軍五十名、皮(匹)〔匠〕 五名。 旣至則以其軍葺治墻垣, 以其匠造屨束裝, 以故久不赴任, 觀察使張順孫請罷。 【琬除授後, 累月不赴任, 監司請罷, 朝議以赴任後, 見政迹當罷, 以故琬得免。】 其後順孫以病母相見來京時, 琬語府吏曰: ‘前日請罷我者, 宜受殃, 必遭喪矣。’ 順孫過境, 不送支供之人, 其用心如此。 又多盜取官物, 正如前日所啓。 高山縣監張翼長醉不醒, 不治民事。 延安府使任浩其貪無狀。 請皆推問。" 許硡曰: "朴永文言根, 不可不問。 無根之言, 能害國家。 在宋朝韓琦、富弼盡心竭力, 以天下爲己任, 群小忌之。 夏竦力憸人也, 僞作廢立之語, 飛語上聞。 仁宗雖不甚信惑, 韓、富由是憂懼, 力請補外, 相繼罷去。 今永文亦爲飛語讒間, 不可不懲。" 上曰: "守令之事, 當待觀察使褒貶。" 許硡曰: "今進講《書》曰: ‘其克詰爾戎兵。’ 凡事釁, 萌於無事之時, 人主狃於昇平, 不能自强 則國勢委靡怠惰而不振。 唐 玄宗當太平無事之時, 荒於酒色, 民不知兵, 祿山一呼, 望風瓦解。 我朝自辛亥年北征後, 今將二十年。 無邊患, 邊將必有怠玩之心, 南方亦無邊患久矣。 自古無百年治平者, 邊患不可不慮。" 南慄曰: "周宣王中興之主也。 任用方叔、召虒、仲山甫、尹吉甫能內修外攘, 復文武之境土, 至於三十九年, 王師敗績于姜氏之戎。 《詩》之《祈父》, 軍士怨於久役, 《白駒》賢人遠去, 《黃鳥》萬民離散, 其故在用虢文公之失也。 自古帝王, 始雖勵精, 卒不能善治, 必須任賢使能, 然後能善終。 今昇平日久, 北狄南蠻, 若跳梁充斥, 則何以禦之? 立政大旨, 以用人爲先, 終之以蘇公愼玉之事。 請留意邊事, 而又務得人, 以愼獄事。 自古邊將非人, 則邀功四夷, 以開邊釁, 亦不可不擇。 北道節度使辛允武請以堂上官爲訓戎僉使, 夫堂上官, 豈盡武才者乎? 如此則欲陞堂上者, 必窺覘矣。" 許硡曰: "訓戎雖巨鎭, 差遣堂上官, 豈允武所可擅請乎? 若堂上無可當之人, 則必以堂下, 陞堂上而差充, 後弊亦不可不慮。"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21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註 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