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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4권, 중종 2년 11월 15일 갑인 2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사정전에 나아가 유생들의 강을 받고, 내수사 혁파·형결 등의 일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유생들의 강(講)을 받았는데, 영의정 유순정(柳洵汀)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 대신들이 다 모였으니, 《중용(中庸)》구경(九經)768) 으로 정사하는 도(道)를 논란하되, 김응기(金應箕)로 하여금 묻게 하고 안윤덕(安潤德)·이유청(李惟淸)으로 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좋다.’ 하였다. 대사헌 이유청이, ‘재물을 천히 여기고 덕을 귀히 여긴다.’ [賤貨貴德]는 말을 들고 나와 아뢰기를,

"삼대(三代)769) 이상에는 임금에게 사재(私財)가 없었는데, 한(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와 당(唐)의 덕종(德宗)이 처음으로 두었었고, 또 전조770) 때에는 충혜왕(忠惠王)이 후전(後殿)에 사축(私蓄)을 하였었습니다. 전에 대간이 내수사(內需司)의 혁파를 청한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요즈음 기후가 불순한데,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것과 일이 없으니, 경연(經筵)과 정사 보살피심을 쉬지 마소서.

또 들으니, 형조 상복사(刑曹詳覆司)에서 형결(刑決)이 매우 적은 것은 의정부에서 지체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인(舍人)과 검상(檢詳)이 직무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기녀(妓女)를 끼고 풍악이나 일삼으며 술에 취해 있으면서 매양 고풍(古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선왕께서 법을 만드심은 반드시 이러한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이와 같이 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또 즉위하신 후로 불필요한 벼슬아치가 늘어나 녹을 먹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가설(加設)한 선전관(宣傳官), 선공 감역관(繕工監役官), 공조·호조의 가랑관(假郞官)은 모두 혁파하소서. 서총대(瑞葱臺)의 감역(監役)도 따라서 녹을 먹고 있으니, 이것도 혁파하셔야 됩니다. 요즈음 순경(巡更)771) 을 근실히 하지 않아 도둑이 어고(御庫)를 침범하도록 하였으니, 이보다 어 큰 변고가 없습니다. 이는 금병(禁兵)을 맡은 관원이 조심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병조에 명령하시어 주야로 파수를 보고 엄중하게 살피도록 한다면 이런 걱정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대사헌이 아뢴 바가 매우 타당합니다. 내수사(內需司)는 비록 조종조에서 설립한 것이지만, 폐지하는 것이 매우 타당합니다. 앞으로 내수사의 물자가 비록 부족하더라도 더 모아 들이지 마소서."

하고, 박원종은 아뢰기를,

"외방의 장리(長利)를 서제(書題)772) 가 진상할 때 민폐가 심히 많습니다."

하고, 유순박안성(朴安性)은 아뢰기를,

"장리(長利)란 명칭은 성상의 밝으신 덕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고, 노공필(盧公弼)은 아뢰기를,

"국가에서 장리를 두는 것은 백성과 함께 이익을 다투는 것입니다. 수납할 때 억지로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백성의 원성이 많습니다."

하고, 홍숙(洪淑)은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고형산(高荊山)이 내수사 장리를 감해 줄 것을 청하자, 곧 그 문제를 내수사에 내려 별좌(別坐)·서제(書題)를 시켜 계산하게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공사(公事)란 내수사에 맡길 수 없는 것이요, 만약 부득이하다면 유사(有司)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승지(承旨) 1인이 맡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홍경주(洪景舟)는 아뢰기를,

"내수사의 장리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성종(成宗)께서도 혁파하지 못하셨지마는, 대개 국가에서 대법이 있어 때에 따라 개혁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이러한 일이겠습니까? 성종께서 이를 혁파하셨어야 하나, 자손이 많아 갑자기 혁파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조종조에서는 대군(大君)과 왕자군(王子君)의 집·토지·노비가 모두 규정이 있어 그 예에 따라 주었었는데, 성종 때에는 모든 왕족들의 집 제도가 궁궐보다 지나치고 재산 역시 많이 사급(賜給)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사대부들이 지나친 제도라는 말을 했습니다. 요사이 백성들이 유리(流離)되어 아직까지 복구하지 못하고 있으니 금후는 위차(委差)를 보내지 마소서. 비록 영원히 혁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차차 혁파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송일(宋軼)은 아뢰기를,

"홍경주(洪景舟)의 말이 옳습니다. 신이 직접 살피건대, 성종 때는 왕자군(王子君)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혁파(革罷)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성종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유순은 아뢰기를,

"대사헌이 말한 바대로, 형결(刑決)은 검상(檢詳)이 맡았는데, 과연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원종은 아뢰기를,

"검상이 자주 갈리기 때문에 판결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政府)에서 정원(政院)으로 이첩하면 정원에서 아뢰는데, 세 번 심리한 뒤에 판결을 하므로 오랫동안 지체하게 됩니다."

하고, 유청(惟淸)은 아뢰기를,

"금후는 사인사(舍人司)를 헌부로 하여금 조사[摘奸]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사인(舍人)은 특별히 하는 일은 없으나, 그들이 칭하는 고풍(古風)은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하고, 유청은 아뢰기를,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시키는 일은 입시 대신(入侍大臣)으로 하여금 의정(議定)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원종은 아뢰기를,

"강무(講武)를 자주한다면 선전관(宣傳官)이 많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가설(加設)한 선전관은 폐하는 것이 편리하고, 감역(監役) 및 가랑관(假郞官)도 아울러 폐지하소서.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군직(軍職)의 인원을 차출했다가 일이 끝난 뒤 도로 교체하셔도 될 것입니다."

하고, 유순은 아뢰기를,

"서총대 감역(瑞葱臺監役)이 지금은 없지만, 있을 때에는 갑자기 폐할 수 없기 때문에 봉록(俸祿)이 없는 데 붙여 두었습니다."

하고, 경주는 아뢰기를,

"녹(祿) 있는 체아(遞兒)773) 는 없고, 녹 없는 체아는 과연 있습니다. 선전관은 제자(子弟)로 차하(差下)하라는 하교가 계셨기 때문에 가설한 것입니다. 선전관의 소임은 무재(武才)가 있고 용맹스러운 자를 시켜야 되는데, 지금은 강무(講武)하는 사실이 없으니, 선전관은 무신 선전관이라도 족합니다. 그래서 원훈(元勳)의 자제로 가설한 것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낙심할 것이니, 그대로 서반직(西班職)에 두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유청은 아뢰기를,

"내수사 장리(長利) 혁파의 일은 원종의 말이 매우 타당하고 경주(景舟)의 말은 부당하니, 속히 혁파하소서. 조종조에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세조 때에 처음 설치한 것이니,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수사의 장리는 성종 때 혁파하셨는데, 대비전(大妃殿)께서 다시 설치하신 것이니, 지금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 사인(舍人) 등이 과오가 있다면 정승이 감독하고 규명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는데, 유순은 아뢰기를,

"사인 등의 일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갑자기 혁파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청은 아뢰기를,

"정청(政廳)에 사관(史官)이 없어 매우 불편합니다. 전교(傳敎) 및 정사 등의 일을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유순 등은 아뢰기를,

"고례(古例)는 없지만 들어와서 참여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03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정론-정론(政論) / 금융-식리(殖利)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사법-치안(治安) / 군사-중앙군(中央軍)

  • [註 768]
    구경(九經) :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상경(常經)으로서,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한 이를 친하는 것[親親],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군신(群臣)을 몸받는 것[體群臣], 서민을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데 사람을 잊지 않는 것[柔遠人], 제후(諸侯)를 복종케 하는 것[懷諸侯]. 《중용(中庸)》.
  • [註 769]
    삼대(三代) : 하(夏)·상(商)·주(周).
  • [註 770]
    전조 : 고려.
  • [註 771]
    순경(巡更) : 밤에 순찰하는 일.
  • [註 772]
    서제(書題) : 서리(書吏) 서리(胥吏).
  • [註 773]
    체아(遞兒) : 현직을 떠난 문무관에서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해 만든 벼슬. 문무 당상관 이상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임기가 끝난 후 적당한 자리가 없으면 일시적으로 실무가 없는 중추부(中樞府) 벼슬자리에 보냈는데, 이런 경우가 대표적인 것임.

○上御思政殿, 講儒生, 領議政柳洵曰: "今朝廷大臣畢會, 以《中庸》九經, 論難治道, 使金應箕問之, 安潤德李惟淸答之。" 上曰: "可。" 大司憲李惟淸, 因賤貨貴德之語, 進啓曰: "三代以上人, 君無私貨, 德宗, 始有之。 在前朝, 則忠惠王聚儲於後殿, 前者臺諫請, 革內需司, 此言甚當。 近日時令不順, 莫如謹天戒, 宜不輟經筵視事。 且聞刑曹詳覆司刑決甚少, 議政府留滯故也。 舍人、檢詳不顧職事, 日以率妓張樂爲事, 長醉不醒, 每以古風爲言。 先王設法, 不必如此, 今後勿令如是。 且卽位以後, 冗官數多, 食祿者衆。 加設宣傳官、繕工監役官、工曹、戶曹假郞官, 幷可革之。 瑞葱臺監役, 因在受祿, 此亦可革。 近日巡更不勤, 致令盜犯御庫, 變莫大焉。 此任禁兵之官, 不謹所致也。 令兵曹晝夜把直, 嚴加考察, 則無此患也。" 柳洵曰: "大司憲所啓甚當。 且內需司, 雖祖宗朝所設, 革廢甚當。 今後內需之財, 雖不足, 勿令加聚。" 朴元宗曰: "外方長利, 書題進上, 病民甚多。" 柳洵朴安性曰: "長利之名, 非聖明美事也。" 盧公弼曰: "國之有長利, 與民爭利也。 收納之時, 抑勒之事甚多, 由是民怨實多。" 洪淑曰: "咸鏡監司高荊山請減內需司長利, 卽下內需司, 令別坐書題計之, 臣意以謂公事不可付內需司, 若不得已則付之有司可也。" 柳洵曰: "承旨一員掌之何如?" 洪景舟曰: "內需長利, 其來已久, 成宗不能革矣, 大抵國有大法, 因時沿革, 況此事乎? 成宗可革此事, 而螽斯繁衍, 不能遽革。 祖宗朝大君、王子君, 家舍、田民, 皆有規模例給, 成宗朝, 諸宮家制, 踰於宮掖, 凡財産亦多賜給。 以此士大夫, 謂之過制。 近日百姓流離, 尙未蘇復, 今後勿遣委差。 雖未永革, 姑革似可。" 宋軼曰: "景舟之言然矣。 臣親見, 成宗朝王子君數多, 故不得革之, 然非成宗之意也。" 柳洵曰: "大司憲所言刑決, 檢詳掌之, 而果未畢矣。" 元宗曰: "檢詳數遞, 故未得決之。 政府移政院, 政院啓之, 三覆乃決, 由是久滯。" 惟淸曰: "今後舍人司, 令憲府摘奸何如?" 柳洵等曰: "舍人別無所爲之事, 然其稱古風, 不可遽改。" 惟淸曰: "汰冗官事, 令入侍大臣議定, 何如?" 元宗曰: "講武數, 則宣傳官不得不多, 今則不然, 加設宣傳官, 革之爲便, 監役及假郞官竝革之。 若有不得已事, 則以軍職人員差之, 畢後還遞可也。" 柳順汀曰: "瑞葱臺監役, 今則無之, 如有之, 不可遽革, 故付於無祿耳。" 景舟曰: "有祿遞兒則無之, 無祿遞兒則果有之。 宣傳官, 以子弟差下事有敎, 故加設矣。 若宣傳官之任, 則有武才驍勇者差之, 今無講武之事實, 宣傳官及文臣宣傳官足矣。 以元勳子弟加設, 而一朝遽革, 則彼必失心, 仍差西班職何如?" 惟淸曰: "內需司長利革廢事, 元宗之言甚當, 景舟之言甚非, 請速革之。 非祖宗所立, 始於世祖, 永革甚當。" 上曰: "內需司長利, 成宗朝革之, 而爲大妃殿還設, 今不可遽革。 舍人等若有過誤, 則政丞當糾擧。" 柳洵曰: "舍人等事, 其來久矣。 不可遽革。" 惟淸曰: "政廳無史官, 甚不便。 若傳敎及政事間事, 不可不記。" 柳洵等曰: "雖無古例, 入參何害?"


  •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14책 203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정론-정론(政論) / 금융-식리(殖利)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사법-치안(治安) / 군사-중앙군(中央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