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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권, 중종 2년 4월 18일 신묘 1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참찬관 이윤 등이 유자광의 중형을 아뢰니 불허하다

조강에 납시었다. 참찬관(參贊官) 이윤(李胤)이 아뢰기를,

"유자광(柳子光)성종조 때 임사홍(任士洪)과 짜고 현석규(玄錫圭)를 음해하였습니다. 석규는 바른 선비인데, 반드시 석규를 모함하려 한 것은 사홍과 결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폐조(廢朝)에 와서는 까닭없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은 모두 큰 죄가 있으니, 중형에 처하고 자손들도 죽이소서.’ 하였으며, 그 때 임사홍(任士洪) 역시 차비문(差備門)241) 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세좌(李世佐)의 죄는 주아부(周亞夫)242) 가 조정의 석차(席次)를 설치하지 않은 데 성낸 것과 같으니 죽이기를 청합니다.’ 했습니다. 곧 자광에게 유시하니, 자광 역시 죽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안팎으로 결탁하여 간악한 술책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오년243) 에는 자광이 명사들을 김종직(金宗直)의 문도라 지목하여 다 없애려 하면서 노사신(盧思愼)의 분간하자는 의논을 힘써 저지하였습니다. 만일 그 술책이 행하게 되었더라면, 글하는 선비는 씨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폐주(廢主)가 일찍이 극균의 집을 찾아간 선비들을 추문(推問)하였는데, 자광사홍도 처음에는 모두 이에 참여하였다가 재빨리 벗어났으니, 이는 폐주에게 아첨하여 잘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간의 말을 쾌히 따르소서."

하고, 장령 한급(韓汲)은 아뢰기를,

"자광의 죄는 사홍보다도 심합니다. 일찍이 어미 복을 벗고 인군의 복 입기를 청하였으며, 함경도 감사가 되었을 때에는 봉진하고 남은 생복(生鰒)을 먹으면서, 이런 특이한 것을 신하로서 차마 목에 넘길 수 없다.’ 하며 곧 봉진(封進)하였습니다. 신하로서 봉진하고 남은 물건을 먹는 것은 예사인데 자광만은 이러하였으니, 그 폐주에게 총애를 구하려 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상소하여, ‘무오 여당(戊午餘黨)이 아직도 있어 정국(靖國) 초에 신의 녹공이 잘못되었다고 의논합니다.’ 하였으니, 그의 음험하고 간교함이 이러합니다.

전일에, 천사(天使)244)한명회(韓明澮)압구정(狎鷗亭)을 구경하려 하니, 명회가 대궐에 들어와서 용봉 차일(龍鳳遮日)을 청구하다가 되지 않자, 명회가 안색을 변하고 일어나니, 성종께서 귀양보냈습니다. 명회성종의 장인이므로 그 세력을 제어하기 어려울 듯하였지만, 그래도 의심치 않고 죄를 주었습니다. 또 신정(申瀞)은 좌리 공신(佐理功臣)이 되고 허혼(許渾) 역시 대신이었지만, 한 번 큰 죄가 있자, 성종께서 모두 중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거울삼아 쾌히 결단하소서."

하고, 기사관(記事官) 정웅(鄭熊)은,

"반정(反正) 후 신이 외방 사람을 만났더니 먼저 전하의 즉위하심을 하례하고, 다음에는 사홍·자광의 존몰(存沒)을 물었습니다. 신이 ‘사홍은 처형되고 자광은 그대로 있다.’ 하였더니, 듣는 사람은 괴이하게 여기며 마음에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으로도 자광의 죄가 큼을 알 수 있습니다. 중형으로 다스리소서."

하고, 영사(領事) 유순정(柳順汀)은,

"자광의 일은 가볍지 않기 때문에 신 등이 파직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공론도 모두 불가하다 하니, 널리 의논하여 처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허집(許輯)은,

"공론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특진관 이계남은,

"성종조에 이칙(李則)이, ‘금일 사홍(士洪)을 등용하면 명일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입니다.’ 하니, 성종께서 ‘금일 등용하면 명일 꼭 나라를 그르치겠는가?’ 하셨는데, 이 ‘꼭 나라를 그르칩니다.’ 하니, 성종께서 ‘네 말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오활(汚闊)한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맞았습니다. 지금 공론이 또 이러하니, 따르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종조에서 자광은 죄를 입었다가 즉시 도로 등용되었으며, 근일에 또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들 ‘파직만 하는 것이 옳다.’ 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한급이 아뢰기를,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성종조에 있으면서, 대궐에 나와 어전(御殿)에 오를 것을 청하고, 사홍의 나라 그르치는 정상을 들어 말하였는데, 성종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심원이 곧 주상 앞에서 통곡하고 나갔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모두 오활하다 하고 사홍의 화가 나중에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고, 이윤은,

"김희수(金希壽)자광의 상소문을 썼습니다. 유생으로서 소행이 매우 비루하니 함께 추문하소서." 【상소는 무오 여당(戊午餘黨)을 논하는 소장인데, 자광이 송일(宋軼)을 빙자하여 쓰기를 청하였으며, 희수는 송일의 명에 핍박되어 썼다. 그러나 그것이 불의임을 안다면 지조 있는 자로서는 힘써 거절했을 것이다.】

하였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자광은 정상은 근일의 소행뿐만 아니라 전에도 소인의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대저 인군은 소인에 대해 한 사람이 먼저 보고 말하더라도 죄를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지금 온 나라가 논계하는 경우겠습니까?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3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註 241]
    차비문(差備門) : 편전의 앞문.
  • [註 242]
    주아부(周亞夫) : 한(漢)나라의 장군으로 정승에 이름.
  • [註 243]
    무오년 : 연산군 4년, 무오 사화가 있었음.
  • [註 244]
    천사(天使) : 중국 사신.

○辛卯/御朝講。 參贊官李胤啓曰: "子光成宗朝, 交結士洪, 陰害玄錫圭錫圭乃正士, 必欲陷錫圭者, 交士洪故也。 至於廢朝, 無緣詣闕, 啓曰: ‘尹弼商李克均, 皆有大罪, 請置重典, 幷誅子孫。’ 其時任士洪, 亦進差備門, 啓曰: ‘李世佐之罪, 與周亞夫發怒於不置著之罪同科, 請誅之。’ 卽論子光, 子光亦以誅之甚當爲對。 其內外締交, 以濟奸術可知。 戊午年, 子光指名流曰: ‘宗直門徒。’ 欲盡滅之, 力止盧思愼分揀之議。 若其術得行, 則文士無孑遺矣。 廢主推問士類, 嘗投刺克均家者, 子光士洪。 初皆與焉, 旋復棄之, 此媚悅廢主之故也。 請快從臺諫之言。" 掌令韓汲曰: "子光之罪, 浮於士洪。 嘗請服君喪, 及爲咸鏡道監司時, 當食封餘生鰒曰: ‘如此異味, 人臣不忍下咽。’ 卽以封進。 人臣之食封餘, 例也。 而獨子光如是, 其欲希恩廢主甚矣。 又上疏稱 ‘戊午餘黨尙在, 而議臣當靖國初, 冒濫錄功。’ 其陰賊奸巧, 類此。 昔天使欲見韓明澮 狎鷗亭, 明澮入請龍鳳遮日, 而不得, 作色以起, 成宗竄之。 明澮, 成宗之舅也, 其勢以難擾, 而猶且罪之不疑。 申瀞爲佐理功臣, 許渾亦大臣, 而一有大罪, 成宗竝置重典。 請殿下監玆而快斷。" 記事官鄭熊曰: "反正之後, 臣見外方人, 則先賀 殿下卽位, 次問士洪子光之存沒。 臣答曰: ‘士洪伏誅, 子光猶在。’ 聞者怪之, 未快於心。 以此可知子光之罪大。 請置重典。" 領事柳順汀曰: "子光之事非輕, 故臣等請罷其職。 今則公論皆曰不可, 請廣議處置。" 同知事許諿曰: "公論不可不從。" 特進官李季男曰: "成宗李則啓曰: ‘若今日用士洪, 則明日必誤國矣。’ 成宗問曰: ‘今日用之, 則明日定誤國乎?’ 曰: ‘誤國矣。’ 成宗曰: ‘爾言似過。’ 以其時言之, 則此言有似迂闊, 到今觀之, 其言果驗也。 今者公論如此, 不可不曲從。" 上曰: "成宗朝, 子光旣被罪, 而旋復見用, 近又議諸大臣, 皆曰: ‘只可罷職。’ 故不允。" 韓汲曰: "朱溪正 深源, 在成宗朝, 詣闕請上御殿, 歷陳士洪誤國之狀, 成宗不允, 深源卽於上前, 痛哭而出。 時人皆爲迂闊, 而莫知士洪之禍, 終至如是也。" 李胤曰: "金希壽子光疏。 以儒生, 其所行甚卑, 請竝推之。" 【疏卽論戊午餘黨之疏, 子光憑宋軼請書, 希壽迫於軼命書之。 然知其不義, 則粗有所守者, 所當力拒。】 政院啓曰: "子光情狀, 非徒近日所爲, 前此多行小人之事。 大抵人君之於小人, 雖一人先見而言之, 猶可罪之, 況今擧國論啓乎? 請快從公論。"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3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