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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2권, 중종 2년 4월 15일 무자 3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홍문관 부제학 이윤이 유자광을 탄핵하니 회보하지 않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윤(李胤)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 즉위하신 이래로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펴서 크게 어진 정사를 행하심에 큰 실책이 없으신데, 천도가 편치 않아 재변이 여러번 일어났습니다. 겨울 우레가 소리를 내고, 기후의 따뜻함이 봄과 같으며, 밤에 붉은 기운이 있고 정조(正朝)에 일식이 있으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고 흰 기운이 해를 꿰었습니다. 신 등이 옛 문헌을 상고해 봐도 인군의 즉위 초에 재변 일어난 것이 오늘처럼 심한 때가 없었으니, 하늘이 ‘명철함을 명한 것인지 길흉을 명한 것인지’[命哲命吉凶]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정양(正陽)의 달을 당하여 우박의 재변이 있는데, 우박은 음기(陰氣)입니다. 정양의 달에 재변이 있으니, 이것은 선유(先儒)가 말한 바 ‘음이 양을 위협한다.’ [以陰脅陽]는 것으로서, 소인이 뜻을 얻어 나라를 어지럽히는 형상입니다. 신 등이 삼가 《춘추(春秋)》를 상고하건대, 희공(僖公) 29년 가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때 공자 수(遂)가 권세를 잡고 방자한데도 희공이 깨닫지 못하여 나라에 화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공(昭公) 3년에 크게 우박이 왔는데, 그 때 계씨(季氏)가 권세를 잡고 멋대로 하는데도 소공이 깨닫지 못하여 끝내는 내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후한(後漢)의 화제(和帝)가 가혹한 관리 주우(周紆)를 임용하여 형벌하고 죽이기를 심각하게 하자, 영원(永元) 5년 6월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안제(安帝)가 참소하는 사람을 신임하게 하자, 연광(延光) 원년 4월에 우박이 내렸고, 환제(桓帝)가 소인을 총애하게 하자, 연희(延熹) 4년 6월에 우박이 내렸으며, 영제(靈帝) 때에는 상시 황문(常侍黃門)226) 이 세력을 부리자, 원화(元和) 4년 6월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오(吳)나라 손권(孫權) 때에 소인 여일(呂壹)이 위엄을 부리고 용사(用事)하자, 가화(嘉和) 4년 6월에 우박이 내렸으며, 진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2년 6월에 크게 우박이 내리고 10년 4월과 13년 9월에 모두 우박이 내렸는데, 그 때 선제시흥왕(始興王) 숙릉(叔陵)을 총애하여 마침내 난을 가져왔습니다.

송 고종(宋高宗) 소흥(紹興) 연간에는 13차나 우박이 내렸는데, 이것은 소인 진회(秦檜)가 용사(用事)하며 나라를 그르친 데서 온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의 전대의 징험은 이렇듯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피건대, 유자광은 음흉한 도적의 자질을 가지고 간교한 꾀를 품고 재주와 구변을 써서 간사한 술책을 부리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을 모두 나서서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와 거슬리면 반드시 계교로 모함하고, 또 눈치 빠르게 결탁을 잘하여 무릇 세력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아부를 합니다. 그리하여 기염을 고무 선동하는 바탕을 삼으니, 우익(羽翼)이 이미 많고 이목도 넓어졌습니다. 진신(縉紳)과 사림(士林)으로서 한번이라도 그의 간악한 정상을 지목하거나 배척하면 그만 모함을 받기 때문에, 그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횡포 방자함을 거리낌없이 하는데, 간흉(奸兇)한 것은 임사홍(任士洪)과 같지만 음험하고 교활함은 오히려 더한 데가 있습니다. 사홍이 이미 죄로 처단되었는데 하물며 사홍보다 더한 자이겠습니까?

정국(靖國)의 공은 본래 3대장(大將)에게서 나온 것인데, 자광은 공을 의논할 때 애써 참록(參錄)되기를 구하여 그 공을 2등에 들게 하였으니, 또한 이미 과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대장이, ‘우리 3인은 공을 의논하는 일을 전장(專掌)하였으니 우리의 공을 함께 열거할 수 없다.’ 하니 자광 역시 갑자기 말하기를, ‘나도 그렇다.’ 하여 그만 그 이름을 지웠습니다. 이것은 그의 계교가 대개 거짓 겸양하는 말을 하면서 실은 3대장의 반열에 뛰어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1등에 참여하였으니, 그 술법 또한 간교한 것입니다.

폐조(廢朝) 신유년227) 무렵에 홍문관에서 자광의 간사하게 모해하려는 정상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홍문관이 도리어 모함을 당하였으니, 이 역시 자광이 중상을 잘하는 한 증거입니다. 또 일찍이 자광으로 추관(推官)228) 을 삼자, 대간(臺諫)이 불가함을 논한 일이 있고, 자광이 특별히 헌납하는 것이 있었을 때 역시 대간이 그 인군에게 요구[要君]함을 논박했었습니다. 그리고 근일에 와서 영경연(領經筵)이 되자 대간은 또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자광은 진신(縉紳)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한 번 그 원한을 쾌히 풀려고 하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근일에 와서 비로소 그 술법을 나타낸 것입니다.

본래 공이 없으면서도 제 스스로 공이 있는 체하며, 뻔뻔스럽게도 원훈(元勳)의 반열에 자처하여 조정을 경멸하고 함부로 권력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인군에게 요구하고 위를 속이며 위복(威福)을 제마음대로 하면서 방자한 정상이 현저합니다.

근일에 자광이 이유없이 상소하여, 제 스스로 그 평생 일을 벌여놓으면서 공훈과 재주를 드러내고 거짓으로 물러나기를 구하여 총애를 굳히니, 이것이 인군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홍문관에서 논계(論啓)하면 자광은 문득 비난하기를, ‘여혜경(呂惠卿)229) 의 무리다.’ 하여 죄에 얽어넣으려 합니다. 그리고 자광의 상소의 뜻은, 순전히 조정 진신(縉紳)을 배척하고 음해하여 ‘당파를 만든다.’고 지목하면서 반드시 죄를 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소를 조정 사림에게 두루 보이기를 청하니, 그 계획을 조정으로 하여금 그의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정이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한 뒤라야 제가 하고 싶은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 진(秦)나라의 조고(趙高)와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 등이, 대개 이 술책을 써서 끝내는 천하 국가에 화를 끼쳤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득강(魚得江)의 백성 구휼이나, 김정간(金貞幹)의 불법 징수[橫斂]가 정말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정에서 자연 처리할 일이지 자광이 간여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 내심은 한편으로는 은혜를 보이고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여, 위복(威福)이 오로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로서 복을 내고 위엄을 내며, 네 집을 해롭게 하고 네 나라를 흉하게 한다.’ 하였으니, 어찌 깊이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광이 일찍이 이 술법을 성묘(成廟) 때 시험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거정(徐居正)이 ‘수직편(守職篇)’을 지어 그 사특함을 비난하니, 지금도 이를 명언(名言)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광으로서 그 정상을 덮을 수 있겠습니까? 또 자광은 아들 유방(柳房)에게 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종을 보냄에 있어 제 마음대로 아뢰고 말[馬]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집의 일을 가지고 위를 번거롭게 한 것이니,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짓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습니다. 자광의 심술은 조정의 모든 사대부가 알 뿐만 아니라 길 가는 사람도 역시 다 알고 있습니다. 대체로 온 나라가 다 미워하는데 전하 혼자서 용납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반드시 커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 잡으시어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천견(天譴)에 답하고, 공의에 맞게 하소서."

그러나, 회보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3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註 226]
    상시 황문(常侍黃門) : 임금 곁에 항상 모시는 환관.
  • [註 227]
    신유년 : 1501 연산군 7년.
  • [註 228]
    추관(推官) : 추국할 때에 심문하는 관원.
  • [註 229]
    여혜경(呂惠卿) : 송(宋)나라의 간신. 처음 왕안석(王安石)의 추천으로 관계에 승진하기 시작하고, 또 왕안석의 모든 혁신 정치 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왕안석을 제거하는 데 앞장 서서,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弘文館副提學李胤等上疏, 略曰:

殿下卽位以來, 革舊布新, 誕敷仁政, 無大失擧, 而天道不寧, 災變屢興。 冬雷聲發, 氣暖如春, 夜有赤氣, 正朝日食, 太白晝見, 白氣貫日。 臣等考諸古籍, 人主卽位之初, 災變之作, 未有如今日之甚者, 天之命哲命吉凶, 未可知也。 今當正陽之月, 乃有雨雹之變, 雹陰氣也。 爲災於正陽之月, 先儒謂以陰脅陽, 小人得志亂國之象也。 臣等謹考《春秋》, 僖公二十九年秋雨雹, 時公子, 專權自恣, 而僖公不悟, 至於禍國。 昭公三年大雨雹, 其時季氏專權得志, 而昭公不悟, 卒爲所逐。 後漢 和帝, 任用酷吏周紆, 刑誅深刻, 而永元五年六月雨雹。 安帝信讒人, 而於延光元年四月雨雹, 桓帝寵小人, 而於延熹四年六月雨雹, 靈帝時, 常侍黃門用事, 而元和四年六月雨雹。 孫權時, 小人呂壹作威用事, 而嘉禾四年六月雨雹, 宣帝 太建二年六月大雨雹, 十年四月、十三年九月皆雨雹, 時帝寵始興王 叔陵, 卒致亂。 高宗 紹興中, 凡十三雨雹, 是由小人秦檜用事誤國。 天人之際, 前代之驗, 如此, 不可誣也。 伏見子光挾陰賊之資, 懷奸巧之謀, 濟以才辯, 鼓舞邪術。 凡所以害人利己者, 莫不攘臂而爲之。 少與己忤, 必以計陷, 又善伺候締結, 凡勢之所在, 必傾心阿附。 以爲鼓煽氣焰之資, 羽翼旣多, 耳目斯廣, 縉紳士林, 一有指斥其奸狀, 輒爲所陷, 故其勢益張, 橫恣無忌。 其奸兇與任士洪一體, 而險巧過之。 士洪旣伏其罪, 況浮於士洪者乎? 靖國之功, 本出於三大將, 子光當論功之時, 力求參錄, 列其功於二等, 亦已濫矣。 旣而三大將以爲: "吾三人, 則專掌論功, 不可竝列己功。" 子光亦遽曰: "我亦如是。" 遂抹其名。 其計蓋謬爲謙讓之辭, 而實欲投入於三大將之列也。 以此遂參一等, 其術亦巧矣。 其在廢朝, 辛酉年間, 弘文館論子光奸邪陰賊之狀, 而反爲所陷, 此亦子光善中傷之一驗也。 又嘗以子光爲推官, 而臺諫論其不可, 子光有所別獻, 而臺諫亦駁其要君, 及夫近日, 爲領經筵, 而臺諫又以爲不可。 以此子光嫉搢紳如仇讎, 思欲一快其怨而未得, 乃至近日, 始肆其術。 本無功而自以爲有功, 靦然自處於元勳之列, 輕蔑朝廷, 冒弄權柄。 其要君罔上, 專擅威福, 恣肆無忌之狀著矣。 近日子光, 無故上疏, 自列其平生, 暴其功勳才美, 謬爲求退, 以固其寵, 此非要君乎? 弘文館有所論啓, 子光便詆以爲: "呂惠卿輩。" 而欲置罪罟。 且子光疏意, 專主斥害朝廷縉紳, 指以爲黨, 必欲加罪。 請遍示其疏于朝廷士林, 其計欲使朝廷, 畏其氣焰, 而不敢言也。 朝廷畏己, 而不敢言, 然後惟吾之所欲爲, 無不如意 趙高 李林甫等, 蓋用此術, 卒以禍天下國家, 豈不痛心哉? 且魚得江之恤民, (金貞斡) 〔金貞幹〕 之橫斂, 雖信有是, 朝廷自當處置, 非子光所宜與。 一以示恩, 一以示威, 欲威福專出於己也。 《書》曰: "臣而有作福作威, 害于而家, 凶于而國。" 豈不深可畏哉? 子光曾試此術於成廟而不得, 徐居正《守職篇》, 以詆其邪, 至今以爲名言。 子光其能掩其情狀乎? 且子光聞其子房之病, 而送其奴也, 擅啓給馬。 乃爲一家之事, 而輒瀆於上, 其恣肆無忌, 一至此極。 子光之心術, 非徒滿朝士大夫知之, 雖行路之人, 亦盡知之。 夫擧國盡嫉, 而殿下獨能容之乎? 不去此人, 後禍必大。 伏願殿下, 明正其罪, 使不容於天地之間, 以答天譴, 以副公議。

不報。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36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