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시 합격자·함경도 무산보·유리민 구호·육진의 인구 문제를 의논하다
조강(朝講)에 납시었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이 아뢰기를,
"지금 별시(別試)에 합격한 유생들이 물려서 식년(式年)167) 에 나가려고 하여 회시(會試)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경서를 숙독하여 강획(講畫)168) 을 많이 얻으려는 것이니, 과거를 물려서 보지 말게 하소서."
하고, 지사(知事) 송일(宋軼)은 아뢰기를,
"사유를 제출하고 물려서 과거보는 것은, 신 역시 온당치 못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강경(講經)169) 은 다만 두 책 뿐이니, 가을 식년 과거를 기다려서 강한다면 반드시 정숙(精熟)한 자가 많을 것입니다. 또 폐조 때에는 유생들이 전혀 학문을 힘쓰지 않고, 부자 형제간에도 학문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물려서 과거보는 것을 허락하여, 학문을 권장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순정이 또 아뢰기를,
"함경도 무산보(茂山堡)는 전토가 본래 척박(瘠薄)한데, 근자에는 또 물에 침손(浸損)되어 모두 모래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거주민이 한 이랑도 갈아 먹을 만한 곳이 없으니, 앞으로 구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무산보 서북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양영만동(梁永萬洞)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여 살 만합니다. 다만 보(堡)가 안에 있고 마을이 밖에 있으면 이를 수호하여 농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무산보를 양영만동으로 옮기고, 풍산보(豐山堡) 역시 그 앞 고개로 옮기며, 회령(會寧) 하보을하(下甫乙下) 땅에 또 한 보를 설치하면, 회령에 하보을하를 경유, 풍산·무산을 지나 왕래하는 새길이 옛길보다 매우 편리하고 빠를 것입니다. 그리고 풍산·무산에는 거민의 경지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건치(建置)하는 연혁(沿革)은 중한 일이니, 멀리 앉아 생각해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관찰사와 절도사가 가을이 되면 함께 편리한가의 여부를 살펴 보고 치계(馳啓)할 것을 고형산(高荊山)이 내려갈 때, 하유(下諭)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상안(祥安)이 또 아뢰기를,
"근래 민간의 피폐함을 모두 다 견감(蠲減)하니 떠돌던 민중이 자연 다시 옛 땅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조(廢朝) 때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을 지금 돌아오더라도, 수령(守令) 등이 반드시 모두 어질지는 못할 것이니, 만일 원주민과 일반으로 부역을 시키면, 떠돌던 백성들을 안집(安集)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는 절목(節目)을 따로이 마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또 떠돌던 백성들이 고향 땅에 돌아오더라도, 탕진한 나머지에 종자가 없어 경작하기 어려울 것이니, 청하옵건대 각도에 유시를 내려 떠돌던 백성들에게 따로이 종자를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유순정(柳順汀)이 아뢰기를,
"떠돌던 백성들에게 따로이 종자를 주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지금 들으니, 각도 창고에 양곡이 부족하다 하니, 두루 나누어 주기는 어렵겠습니다. 원주민이라면 스스로 준비할 수 있겠지만 떠돌던 백성들에게는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하면 잡곡으로라도 충수(充數)하여 적당히 나누어 주어 묵는 밭이 없도록 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순정이 또 아뢰기를,
"육진(六鎭)에는 본래 사람들의 수효가 적었는데 폐조의 학정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많이 강원도로 이주해버렸습니다. 국법에는 원래, 사민(徙民)170) 이 5명이면 그 고을 수령을 파직하고, 받아들인 가까운 이웃도 다 함께 죄를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조(廢朝)의 소친이니 죄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을을 기다려 쇄환(刷還)한 후에도 이런 자가 있으면, 본법에 의하여 논단할 것으로 하유(下諭)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2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농업-전제(田制) / 농업-권농(勸農) / 호구-이동(移動)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67]식년(式年) : 매 3년마다 있는 정기 과거.
- [註 168]
○御朝講。 大司憲閔祥安曰: "今別試入格儒生, 欲退赴式年, 不入會試。 是欲熟讀經書, 多得講畫, 請勿退赴。" 知事宋軼曰: "告狀退赴者, 臣亦以爲未便。 然今此講經, 只二書也, 待秋式年講之, 則必多精熟者。 且在廢朝儒生等, 專不務學, 雖父子兄弟之間, 以文學相戒。 今許退赴, 勸令學問爲當。" 領事柳順汀曰: "宋軼所啓, 當矣。" 上曰: "可。" 順汀又曰: "咸鏡道 茂山堡土田, 本是瘠薄, 而近又爲水所侵損, 盡爲沙石。 居民無一畝可耕, 將無策可救。 茂山堡西北距一十餘里, 有梁楊萬洞, 土地沃饒, 可以耕食。 但堡在內, 而洞在外, 不可無守護, 以衛農人。 臣意以爲, ‘茂山堡, 移於梁楊萬洞, 豐山堡亦移於堡之前峴, 而於會寧 下甫乙下之地, 又置一堡, 則自會寧, 由下甫乙下, 經豐山、茂山往來新路, 比舊路, 其爲便捷,’ 且豐山、茂山, 居民耕食之地, 亦多矣。 然建置沿革重事, 不可遙度爲之。 觀察使與節度使, 待秋同審便否馳啓事, 高荊山下去時, 下諭何如?" 上曰: "可。" 詳安又曰: "近來民間弊瘼, 一皆蠲減, 流民自然還集故土。 然在廢朝, 蕩盡家産, 今雖還來, 而守令等未必皆賢, 若與元居之民, 一般役使, 則必未得安集流民矣。 安業節目, 別爲磨鍊施行何如? 且流民雖還故土, 蕩盡之餘, 無種難耕, 請下諭各道, 流移之民, 別賜種子何如?" 上顧問左右, 順汀曰: "流移之民, 別賜種子, 甚當。 但今聞各道倉穀不足, 難以編分。 如元居之民, 可得自備, 流民等不可不給。 若又不足, 則以雜穀充數, 推移分給, 勿使有荒田。" 上曰: "可。" 順汀又曰: "六鎭人物, 本來數少, 而因廢朝虐政, 流離失業, 多移接江原道。 國法, 徙民逃亡准五名, 則其官守令罷之, 許接切隣, 竝皆治罪。 此則廢朝所致, 不可罪也。 待秋刷還後, 有如是者, 依本法論斷事, 下諭何如?" 上曰: "可。"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2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농업-전제(田制) / 농업-권농(勸農) / 호구-이동(移動)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