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강관 김철문이 대간의 일을, 영사 성희안이 무오 사화의 일을 아뢰다
조강에 납시었다.
시강관(侍講官) 김철문(金綴文)이 아뢰기를,
"지금 진강하고 있는 ‘성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화리를 증식하지 않는다.’[不邇聲色不殖貨利]는 등의 말은 제왕(帝王)으로서 거울삼아 경계하여야 할 대목입니다. 또 풍속을 개선하는 일은 인군이 어떻게 백성을 인도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린 것입니다. 옛날 요(堯)·순(舜)은 천하 거느리기를 인(仁)으로 하니 백성이 따랐고, 걸(桀)·주(紂)는 천하 거느리기를 포학으로 하니 백성이 역시 그대로 따랐습니다. 폐주(廢主)가 널리 홍준(紅駿)을 뽑으며,159) 남의 처첩을 빼앗고, 마음대로 불의를 행사하였는데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살육(殺戮)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종께서 배양(培養)하신 사기(士氣)가 하루 아침에 꺾여 떨치지 못한 것은 폐주의 포학한 위엄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즉위 초에 심효재(沈孝才)가 곧은 말을 올렸을 때 특별히 포상을 허하시니, 이 점은 간함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뜻이 있는 듯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는 대간의 아뢰는 일을 혹 채납(採納)하지 않는 것도 있으시니, 신은 그윽이 실망을 하였습니다."
하고, 영사 성희안은 아뢰기를,
"성종조에서는 대간으로서 일을 잘 말하는 사람을 특명으로 초천(超遷)하였는데, 이것은 인군으로서 간함을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한결같이 성종을 본받는다면, 선한 정치가 무어 어렵겠습니까? 또 무오년의 일160) 은 신이 항상 아뢰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거니와, 사림(士林)이 지금도 위구(危懼)하고 있으니, 그 전말을 분별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의 추관(推官)161) 은 모두 죽고, 오직 유자광(柳子光)과 소신만이 있습니다. 김종직(金宗直)이 유생(儒生)으로 있을 때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본의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마는, 김일손(金馹孫)의 무리가 그것을 부연(敷衍)한 것은 그 죄가 베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성종조에 이극돈(李克墩)·성준(成俊)이 모두 나라의 대신인데, 극돈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성준(成俊)을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162) 로 삼으니, 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첨정(僉正) 세경(世經)을 억지로 평사(評事)로 삼아 데리고간 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간이 의당 논핵(論劾)하여야 할 일인데, 그 때 대간된 자들이 거개가 용렬하여 간정(諫正)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김일손이 헌납(獻納)이 되고 이주(李胄)가 정언(正言)이 되어 그 일을 추후 논란하고, 차자(箚子)를 올리기까지하면서 논열(論列)하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이에 극돈이 준(俊)과 함께 이 두 사람을 원망하며, ‘지나간 일을 무엇 때문에 추론(推論)하는 것인가.’ 하며, 마음속으로 중상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차자에는 보통 사람으로서 말하지 못할 일도 있기 때문에, 일시 사림이 칭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후, 《성종실록》을 수찬(修撰)하게 되자, 이극돈이 춘추관 감사(春秋館監事)가 되었는데, 김종직의 글이 나오니, 극돈은 곧 봉함하게 하였습니다. 춘추관 감사 어세겸(魚世謙)은 공명 정직한 사람이라, 이에 말하기를, ‘이 글은 다 믿기 어려우니, 사초를 세초(洗草)할 때 이것도 함께 세초하던가 혹은 불태우는 것이 좋겠다. 또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회의하는 날이 되면 여럿이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며, 다시 봉하고 곧 계달(啓達)하지 않던 중, 실록 편찬에 간여하지 않은 한치형(韓致亨)·윤필상(尹弼商)·유자광(柳子光) 등이 이 말을 듣고 상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실록청의 사람이 누설한 것입니다.
김종직이 죄를 받은 것은 옳았고, 그것을 부연한 사람 역시 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 추관(推官)이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연소한 무리들이 사람 공격하기를 심히 하니, 김종직의 문도(門徒)는 다 함께 심문하여 죄주는 것이 가하다.’ 하였는데, 노사신(盧思愼)이 혼자서 말하기를, ‘지금 만일 다 죄준다면, 한(漢)나라 때의 당고(黨錮)의 화163) 가 있을까 의심되니, 죄 있는 사람만 죄주면 된다.’고 하여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승전색(承傳色)이 그 의논을 가지고 폐주에게 아뢰니, 여기서 사신의 의논을 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오년 일의 대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부자 형제간에도 무오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경계하니, 이것이 신의 계달하는 이유며, 또 전하로 하여금 그 근본 원인을 자세히 아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지금 진강(進講)한 바,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군으로서 거울삼아 경계하여야할 일입니다.
순(舜)은 큰 성인인데도 여러 신하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편안한 것을 즐기지 말고 법도를 잃지 말라.’ 하였습니다. 군신간에 계칙(戒飭)하는 일은 원래 이러하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수신 제가(修身齊家)하고 날마다 더 엄숙하시어, 소인들의 작폐가 있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마음을 나라 다스리는 데 옮기신다면 당(唐)·우(虞)164) ·삼대(三代)165) 의 정치를 다시 오늘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윤희손(尹喜孫)이 또 아뢰기를,
"성희안의 아뢴 것이 매우 적절하니 유의하소서. 또 사기(士氣)를 배양함은 나라의 선무(先務)입니다. 신 등은 용렬하여 궐실을 보충하지 못하니, 마음에 항상 미안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생각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을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지평(持平) 송흠(宋欽)은 아뢰기를,
"인군이 경연(經筵)에 나오면 글만 배울 것이 아니라 마땅히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은 ‘성색의 해로움이 불로(佛老)보다도 더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청컨대 다시 더욱 경계하소서. 그리고 경연관(經筵官)이 미처 풀어서 강의하지 못하는 대목은, 상께서 문난하여 서로 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외방 수령으로서 흔히 맡은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이가 있으니, 만일 잘 다스리는 이가 있으면 따로 포상해 권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백성이 폐조의 침탈과 횡포에 시달렸는데, 이번에 공신이 지나치게 많으니 다시 침탈과 횡포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더욱 단속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2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159]홍준(紅駿)을 뽑으며, : 홍은 미인(美人), 준은 준마(駿馬)를 가리키는 말, 연산군(燕山君)이 여색과 놀이를 일삼으면서 그의 11년(서기 1505)에 ‘채홍준사’(採紅駿使)를 삼남 지방에 보내어 민간의 아름다운 여인과 좋은 말을 뽑아 올리게 한 일에서 나온 말이다.
- [註 160]
무오년의 일 : 연산군 4년의 무오 사화.- [註 161]
추관(推官) : 심문관.- [註 162]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 : 북도는 함경도를 말함.- [註 163]
당고(黨錮)의 화 : 문자 그대로 당인(黨人)의 금고(禁錮)를 말하는 것인데, 후한(後漢) 말기부터 비롯된 말이다. 즉 후한 말 환제(桓帝)·영제(靈帝) 때에, 환관(宦官)들의 권세와 횡포가 심하므로 기개 있는 선비 진번(陳蕃)·이응(李膺) 등이 이를 비방 공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몰려, 당인으로 지목되는 동시에 많은 선비들이 종신 금고의 화를 당하였다. 뒤에 당인들이 다시 중신 두무(竇武) 등과 함께 의논, 환관들을 제거하려다가 환관들에 의하여 다수의 당인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전(黨錮傳).- [註 164]
당(唐)·우(虞) : 요(堯)·순(舜) 시대.- [註 165]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庚子/御朝講。 侍講官金綴文曰: "今所進講 ‘不邇聲色、 不殖貨利。’ 等語, 乃帝王所當鑑戒處也。 且移風善俗, 在人君導率之如何耳。 昔堯ㆍ舜率天下以仁, 民從之; 桀ㆍ紂率天下以暴, 民從之。 廢主廣採紅駿, 奪人妻妾, 恣行不義, 而人無敢言者 怵於殺戮也。 成宗培養士氣, 而使一朝摧折不振者, 此廢主虐威之所致也。 今卽位之初, 沈孝才上直言, 而特許褒賞, 此則似有納諫之美意。 而近者臺諫所啓之事, 或不採納, 臣竊缺望。" 領事成希顔曰: "成宗朝臺諫善言事者, 特命超遷, 此人君納諫之美也。 凡事一法成宗, 則何難善治? 且戊午之事, 臣常欲啓之久矣, 士林至今危懼, 不可不辨啓其首末也。 其時推官, 皆己死, 而唯柳子光及小臣在焉。 金宗直爲儒生時, 作《弔義帝文》, 其本意, 不知何所指也, 金馹孫輩敷衍之, 其罪可誅。 然其事之所由起者, 則成宗朝李克墩、成俊, 皆國之大臣也, 克墩爲兵曹判書時, 以成俊爲北道節度使, 俊怒, 以克墩之子僉正世經, 强爲評事, 而帶去。 此臺諫所當論劾, 而其時爲臺諫者, 率皆庸劣, 不能諫正。 厥後金馹孫爲獻納, 李冑爲正言, 追論其事, 至上箚字, 論列不已。 克墩與俊怨此二人曰: ‘已往之事, 何必追論?’ 心欲中傷之。 然其箚字, 有常人所不道之事, 故一時士林, 莫不稱服。 後値《成宗實錄》修撰, 克墩爲監春秋, 金宗直之文出焉, 克墩卽令封之。 監春秋魚世謙, 公明正直之人也, 乃曰: ‘此文難可盡信, 史草洗濯時, 竝此洗濯, 或燒火可也。 且不可與他人漏洩也。’ 或者曰: ‘待會議日僉議可也。’ 更封之, 不卽啓達之際, 不干實錄者韓致亨、尹弼商、柳子光等, 聞此言上達。 此必實錄廳之人漏洩也。 金宗直則罪及其身可也, 其敷衍之人, 亦當罪之。 然一時推官皆曰: ‘近來年少之輩, 駁人已甚, 金宗直門徒, 竝推罪之可也。’ 盧思愼獨曰: ‘今若盡罪之, 則疑有漢時, 黨錮之禍, 只罪有罪可也。’ 以是議論不一, 承傳色以其議, 啓之廢主, 乃從思信之議。 此戊午事之大槪也。 然士林至今疑懼, 雖父子兄弟之間, 以戊午之事相戒, 此臣所以啓達也, 且欲殿下詳知其根因也。 且今所進講 ‘不邇聲色之語,’ 乃人君所當鑑戒也。 舜大聖人也, 而群臣猶戒之曰: ‘罔淫于逸, 罔失法度。’ 君臣之間戒飭, 固當如是也。 今我殿下, 在潛邸時, 修身齊家, 日加嚴肅, 未有奴輩作弊也。 以是心, 移於治國, 則唐、虞、三代之治, 可復見於今日矣。" 大司諫尹喜孫曰: "成希顔所啓, 甚切當, 請留意焉。 且培養士氣, 爲國之先務。 臣等以庸劣, 未得補闕, 心常未安。 古云: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此言所當留意。" 持平宋欽曰: "人君之御經筵, 非但學文而已, 當心自得之, ‘不邇聲色之語’, 可不體念哉? 古人以聲色, 比於佛ㆍ老之害, 而謂尤甚焉, 請更加戒之。 且經筵官未及解講處, 上須問難, 相與講論可也。 且外方守令, 多不用意於職事, 如有善治者, 別爲褒賞勸奬爲當。 且百姓, 困於廢朝橫加侵暴, 今者功臣猥多, 恐復有侵暴之弊。 請加裁禁。"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14책 12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