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원위 임숭재의 졸기
풍원위(豐原尉) 임숭재(任崇載)가 죽었다.
숭재는 임사홍(任士洪)의 아들로서 성종(成宗)의 딸 혜신 옹주(惠愼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간흉하고 교활하기가 그 아비보다 심하여, 곡진히 위를 섬기어 사랑을 받으려고 왕의 행동을 엿보아 살펴서 상(上)이 마음 먹고 있는 것을 다 알았다. 그리하여 여러번 미녀(美女)를 바치니, 왕이 이로부터 매우 총애(寵愛)하고 신임하여, 숭재의 집 사면에 있는 인가 40여 채를 헐어내고 담을 쌓아 창덕궁(昌德宮)과 맞닿게 하였다. 그리고 매양 거기에 가서 마시고 노래하면서 밤을 새웠는데, 숭재는 그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李湘)의 처를 시침(侍寢)하게 하였으며, 왕은 옹주까지 아울러 간통하였다. 하루는 왕이 숭재의 집 작은 정자에 앉아 이르기를,
‘이 정자가 매우 맑고 깨끗하도다.’
하니, 숭재가 꿇어앉아서 아뢰기를, ‘신이 이 정자를 열어 놓고 봉연(鳳輦)551) 을 기다린 지 오래이옵니다.’
하였다. 숭재는 노래와 춤이 능하여 춤출 때에 혹 몸을 움츠리면 아이들처럼 온 몸의 지절(肢節)이 재롱을 떨어 기변(機變)의 교(巧)와 같았으며, 더욱 처용무(處容舞)에 능하고 또 활쏘기에 말타기도 약간 알았으므로, 왕이 기뻐하여 혹 노래도 하고 혹 춤도 추고 혹 활도 쏘고 혹 말도 달리는데, 날마다 숭재와 짝이 되었다. 숭재도 스스로 은총만을 믿고 그 아비와 더불어 날마다 흉모를 꾸며, 평일에 혐의 있는 자는 보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비록 비천한 무리라도 반드시 천거하여 쓰게 하였으므로, 조정을 흐리게 하고 왕의 악을 점점 더 자라게 하는 데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가 병들어 괴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중사(中使)552) 를 보내서 할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 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몹시 슬퍼하여, 승지 윤순(尹珣)을 보내 조문하게 하고 부의를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빈소를 차린 후에 왕은 그 처를 간통한 일이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관(棺)을 열고 무쇠 조각으로 시체의 입에 물려 진압(鎭壓)시켰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6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4 책 26 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豐原尉、任崇載死。 崇載, 士洪子, 尙成宗女惠愼翁主。 凶狡甚於其父, 曲事上嬖幸, 伺察動止, 備知上懷抱間事。 屢以美女獻之, 王由是甚寵信, 撤崇載家四面人家四十餘區, 築墻垣, 連昌德宮。 每臨幸, 酣歌達曙, 崇載以其妹文城正、湘妻侍寢, 王幷通翁主。 一日王坐崇載小亭曰: "亭甚蕭灑。" 崇載跪曰: "臣開此亭, 以待鳳輦久矣。" 崇載能爲歌舞, 舞時或縮身如童子, 一身肢節, 弄之如機變之巧, 尤工於處容舞。 且粗知射御, 王悅之, 或歌或舞, 或射或御, 日與崇載爲耦。 崇載自恃恩寵, 與其父, 日構兇謀, 平生嫌惡, 無不報, 其附己者, 雖賤流必皆薦用, 以溷朝班, 逢長王惡, 無所不至。 王聞其病苦, 遣中使問所欲言, 對曰: "死無遺恨, 但未進艶色爲恨。" 及其死也, 王悼甚, 命承旨尹珣往弔之, 祭賻特厚。 旣殯, 王以嘗通其妻, 恐其爲(崇)〔祟〕 , 遣中使開棺, 用水鐵片, 含其口以鎭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6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14 책 26 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