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일기57권, 연산 11년 1월 25일 신해 1번째기사
1505년 명 홍치(弘治) 18년
문묘 도감 당상 허침 등이 문묘 공역에 인력을 추가하기를 아뢰다
문묘 도감 당상(文廟都監堂上) 허침(許琛)·신수근(愼守勤)·이손(李蓀)이 아뢰기를,
"문묘를 지난해부터 다시 지으라는 명이 계셨으되 그 터를 정하지 못하더니, 이제는 전생서동(典牲署洞)에 터가 정해졌고 일기가 온화(溫和)해 가니 공역(功役)을 시작하려는데, 병조(兵曹)에서 군인 8백 명을 매겨 주었으되, 입역(立役)에 빠지는 자가 많이 있으므로 공역은 크고 인력은 적어서 공역을 성취할 길이 없으니, 병조로 하여금 변동하여 더 정하여 부리게 함이 어떠하리까?"
하니, 그대로 좇았다.
문묘가 금표(禁標) 안에 들었으므로, 선성(先聖)의 위판(位板)이 처음에는 태평관(太平館)에 옮겨졌다가 다시 의정부(議政府)에 옮겨지고 종학(宗學)에 옮겨지고 장악원에 옮겨지고 서학(西學)에 옮겨지니,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성(孔聖)은 죽어서도 또한 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57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686 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건설(建設)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