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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23일 신해 2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성절사 신용개가 북경에 있었던 일을 아뢰다

성절사(聖節使) 신용개(申用漑)북경(北京)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일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399) 을 아울러 치계(馳啓)하기를,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붕서(崩逝)하여 발인(發靷) 전에는 황제가 소관복(素冠服)400) 으로 서각문(西角門)401) 에 앉아서 조참(朝參)을 받고, 발인 후에는 흑포(黑袍)402) 를 입고 조참을 받으며, 삭망(朔望)의 대조회(大朝會)에도 정전(正殿)에 오르지 않고 봉천문(奉天門)에 앉고 고취(鼓吹)403) 를 연주하지 않고 백관(百官)이 모두 오사모(烏紗帽)404) 에 흑단령·품대(黑團領品帶)를 하고, 예부가 주청(奏請)하여 전례에 따라 성지(聖旨)405) 를 내려 성절(聖節)·천추(千秋)406) 의 경하례(慶賀禮)를 행하는 것을 면제하였습니다."

하였다. 자문에 이르기를,

"성지에 ‘복제(服制)는 비록 유고(遺誥)407) 를 지켜야 하나 짐(朕)의 마음이 애통하여 차마 길전(吉典)을 모조리 따르지 못하므로 매월 삭망일에는 잠시 정전에 오르는 것을 면제하니 백관은 상복(常服)으로 봉천문에서 조참하며, 절령(節令)408) 을 맞아 잔치를 면제하니 백관은 홍복(紅服)을 입을 것 없고, 성절(聖節)·천추절(千秋節)에도 경하례(慶賀禮)를 면제한다.’ 하셨습니다."

하였는데, 왕이 승정원 및 정승들에게 묻기를,

"27일의 제도는 본조(本朝)가 다 이미 고전(古典)을 참작하여 행하니 무슨 불가함이 있으랴마는, 이제 중조(中朝)의 제도를 보건대 같지 아니함이 있으니 어째서인가?"

하매, 승정원이 아뢰기를,

"중조의 제도는 곧 황제의 별례(別禮)인데, 날로 달을 갈음하는 제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본조의 상제(喪制)가 중조와 같지 않으니, 변통 없는 사람이 뒤에 망령된 의논을 하지 않겠는가?"

하매, 정원이 아뢰기를,

"27일의 제도도 고전에 따라서 행하여 이미 끝났으므로 길례(吉禮)를 따른 것이며, 중조의 제도로 말하면 곧 황제의 한때의 별례이므로 실상 만세에 통해 쓸 상전(常典)이 아니니, 피차에 혹 같지 않더라도 어찌 논의하는 자가 있으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논의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무엇이 두려우랴마는, 사관이 사책(史冊)에 ‘장사지내기 전에 길례를 썼다.’고 써서 후세에 비방을 끼치지나 않겠는가?"

하매, 정원이 아뢰기를,

"이미 시의(時宜)를 작정(酌定)하여 행한 것이 중도에 맞는 것을 가지고 사관일지라도 어찌 감히 망령되이 의논하리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54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648 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註 399]
    자문(咨文) : 중국의 각부(各部)와 왕래하는 공문. 대등한 지위에서 왕래하는 문서에 그 글의 머리와 끝에 자(咨) 자를 놓음. 당시 중국 각부와 조선 국왕을 대등하게 간주하였음.
  • [註 400]
    소관복(素冠服) : 흰 관복.
  • [註 401]
    서각문(西角門) : 서편 모퉁이의 문.
  • [註 402]
    흑포(黑袍) : 검은 용포(龍袍).
  • [註 403]
    고취(鼓吹) : 북·피리로 연주하는 음악.
  • [註 404]
    오사모(烏紗帽) : 검은 사모.
  • [註 405]
    성지(聖旨) : 황제의 명령.
  • [註 406]
    천추(千秋) : 황세자의 탄일.
  • [註 407]
    유고(遺誥) : 황제·황후 등의 유언(遺言).
  • [註 408]
    절령(節令) : 명절(名節).

○聖節使申用漑北京, 將聞見事, 幷禮部咨文馳啓曰: "太皇太后崩逝發引前, 皇帝素冠服, 坐西角門受朝參, 發引後, 服黑袍受朝。 朔望大朝會, 亦不陞殿, 坐奉天門, 不奏鼓吹, 百官竝爲紗帽、黑團領、品帶。 禮部奏: ‘依前降聖旨, 免行聖節、千秋慶賀禮。’ 咨文曰: ‘聖旨, 服制雖遵遺誥, 朕心哀慟, 未忍盡從吉典。 每月朔望日, 暫免陞殿, 百官常服, 於奉天門朝參。 遇節令免宴, 百官不必穿紅, 聖節、千秋節免行慶賀禮。’" 云云。 王問于承政院及政丞等曰: "二十七日之制, 本朝皆已參酌古典而行之, 有何不可? 今觀中朝之制, 有不同如何?" 承政院啓: "中朝之制, 乃是皇帝別禮, 以日易月之制則無異。" 又問曰: "本朝喪制, 與中朝不同, 得無有不通之人妄議於後耶?" 政院啓: "二十七日之制, 亦依古典, 而行之已畢, 故便從吉爾。 若中朝之制, 則乃是皇帝一時之別禮, 實非通行萬世之常典。 彼此雖或不同, 而豈有議者?" 傳曰: "雖有議者, 何畏焉? 但無奈史官書之史冊曰: ‘未葬而用吉。’ 貽譏後世乎?" 政院啓: "旣以酌定時宜, 而行之得中, 雖史官何敢妄議?"


  • 【태백산사고본】 15책 54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648 면
  •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