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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10일 무술 5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영의정 유순 등이 성균관동 안의 인가 철거를 살펴보다

영의정 유순(柳洵), 좌찬성 강귀손(姜龜孫), 우찬성 이계동(李季仝), 병조 판서 임사홍(任士洪), 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 공조 판서 한사문(韓斯文), 승지 박열(朴說)권균(權鈞)이계맹(李繼孟) 및 내관 김자원(金子猿)에게 명하여 성균관동(成均館洞) 안의 철거할 인가를 살펴보게 하고,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으로서 때에 따라 도읍을 옮긴 이가 있어, 중조(中朝)는 처음에 남경(南京)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북으로 옮겼거니와, 우리 국초(國初)에는 경복궁(景福宮)을 세워 담 밖 백 척(尺) 안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고, 창덕궁(昌德宮)은 처음에 이궁(離宮)이었으므로 좁아서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이어서 오래 거처하매 이미 정궐(正闕)이 되었거늘, 성균관이 궁장(宮墻)에 다가 가까우니, 국가의 체모가 온편치 못하다. 세조(世祖)의 본의(本意)를 마음대로 헤아릴 수는 없으나 원각사(圓覺寺)를 창설함에 어찌 만세에 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셨으랴. 그 도(道)가 아닌 것 같은 것은 어찌 3년을 기다리랴. 구장(舊章)374) 은 비록 중하나 또한 고칠 때가 있으며, 제왕의 즐겨 숭상함이 같지 아니하여 부처를 숭상하기도 하고 부처를 배척하기도 한다. 이제 원각사부처가 외람되어 향사(享祀)를 받은 지 오래이거니와, 원각사부처를 내쳐 버리고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거기에 옮겨 모시고, 그런 뒤에 성균관을 철거함이 어떠한가? 젊은 유생(儒生)들이 누가 감히 반궁(泮宮)375) 의 철거를 시비하랴? 후세 사람으로서 비록 사도(邪道)가 있던 곳에 우리 정도(正道)를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평의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도를 내쳐버리고 정도를 끌어들임이니 무슨 안 될 것이 있으랴?"

하매, 승지 박열·권균·이계맹·강징(姜澂)·이충순(李忠純)이 아뢰기를,

"절과 반궁은 제도가 같지 않으니, 원각사를 철거하고 성균관의 옛 재목을 써서 옮겨 세워도 무방합니다. 더구나 중조의 사신이 오면 으레 다들 알성(謁聖)376) 하니, 제도는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하라. 아직 꾸미기 전에는 모옥(茅屋)을 가설(假設)하여 공자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이 어떠한가? 이제 도감(都監)을 따로 설치하고 재상(宰相)을 차출하여 제조(提調)를 삼고 성균관의 관원으로 낭청(郞廳)을 삼아서 제목을 날라다가 고쳐 지음이 마땅하리라."

하매, 유순·허침(許琛)·박숭질(朴崇質)·강귀손·이계동·김수동(金壽童)·이계남·김감(金勘)·임사홍·송질(宋軼)·한사문·민휘(閔暉)·성세순(成世純)이 아뢰기를,

"성균관을 원각사 터에 옮겨 지으면 그 신위는 우선 태평관(太平館)에 옮겨 모시소서."

하였다. 전교하기를,

"개성부(開城府)에도 반수(泮水)377) 가 있는가? 유자(儒子)의 학업은 장차 임금을 섬기기 위함이거늘, 성종조(成宗朝)에 유생들이 반수를 설치하여 목욕(沐浴)하는 곳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니, 이 또한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다."

하매, 등이 아뢰기를,

"옛 제도의 반수는 못[澤]으로 고리처럼 둘러서 천자(天子)는 벽옹(辟雍)378) 이고 제후(諸侯)는 반궁(泮宮)이었으나, 이제의 반수는 깊은 물이 아니고 반이 벽(壁)이라 곧 마른 내[川]이거늘, 반수를 설치하기를 청한 것은 그릅니다. 개성부의 관(館) 곁에도 작은 물이 있을 뿐이니, 반수가 없더라도 무방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균관을 철거한다면 사섬시(司贍寺)와 흥덕사(興德寺)도 철거하여야 마땅하리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대저 궁궐은 그윽하여야만 한다. 옛사람이 ‘난(亂)이 규중(閨中)에서 생긴다.’ 하였으나, 안으로부터의 난은 늘 적고 밖에서 말미암은 난은 늘 많다. 이에 앞서 이점(梨岾)에 광경문(廣慶門)을 만들라고 명하였으나, 여기에 문을 만들면 대내에 가깝지나 않은가? 성종(成宗) 때에 후원(後苑)에서 관사(觀射)하시거늘 조지(趙祉)가 집에서 바라보므로 죄를 얻으매, 따라서 그 고개를 이름하여 조지점(趙祉岾)이라 하니, 이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함춘원(含春苑)부터 사섬시(司贍寺) 건너편을 걸쳐 동소문(東小門)까지 담을 쌓고, 사섬시 석교(石橋)에 문을 만들어서 대내가 그윽하게 하며, 홍계원(洪繼元)의 집부터 북으로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집 북쪽까지 표(標)를 세워 한계를 지어서 사람의 출입을 금하라. 또 집을 헐 때에는 매양 집 임자에게 스스로 헐게 하되, 곧 헐지 않는 자가 있거든 수리 도감(修理都監)이 독촉하여 헐라."

하고, 전교하기를,

"질병가(疾病家)379) 뒤부터 소경전(昭敬殿)까지 터의 한계를 설치하여 길을 통하지 못하게 하되, 제사 때만은 문을 열어서 출입시키라."

하고, 전교하기를,

"원각사부처세조께서 만드신 것이니 예조(禮曹)가 맡아 처리하여 옮겨 두게 하고, 성균관을 원각사에 옮겨 설치하라. 또 그 곁에 가까운 민가를 헐고 양현고(養賢庫)를 지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5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44 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주생활-택지(宅地)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행정(行政)

  • [註 374]
    구장(舊章) : 오랜 법.
  • [註 375]
    반궁(泮宮) : 제후(諸侯)나라의 중앙의 학교. 본디 주대(周代)의 것으로서, 그 동문에서부터 서문에 이르는 남쪽 반둘레를 물로 두르고 북쪽은 담을 쌓는 까닭에 반(泮)이라 칭함. 우리 나라에서 반궁이라 함은 곧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키는 말.
  • [註 376]
    알성(謁聖) : 공자의 사당에 참배(參拜)함.
  • [註 377]
    반수(泮水) : 반궁(泮宮)의 남쪽을 두른 물.
  • [註 378]
    벽옹(辟雍) : 천자(天子)의 중앙의 학교. 주대(周代)에 남에 성균(成均), 북에 상상(上庠), 동에 동서(東序), 서에 고종(瞽宗), 중앙에 벽옹을 둠. 벽은 밝힌다는 뜻, 옹은 화(和)한다는 뜻임. 일설에 벽은 벽(壁:환옥(環玉)), 옹은 옹(壅:못[澤])의 뜻으로 둘레를 고리처럼 못으로 두른다는 뜻이라 함.
  • [註 379]
    질병가(疾病家) : 궁인 등이 병들면 수용하는 집.

○命領議政柳洵、左贊成姜龜孫、右贊成李季仝、兵曹判書任士洪、戶曹判書李季男、工曹判書韓斯文、承旨朴說權鈞李繼孟及內官金子猿, 審視成均館洞內可撤人家。 傳于承政院曰: "自古帝王因時遷都者有之。 中朝始都南京, 後遷于北。 我國初建景福宮, 墻外百尺內不得造家。 昌德宮初爲離宮, 故淺狹無制, 今因循久御, 已爲正闕, 而成均館逼近宮墻, 國體未便。 世祖本意不可揣度, 然創設圓覺寺, 豈以爲可傳萬世哉? 如其非道, 何待三年? 舊章雖重, 亦有更張之時。 帝王好尙不同, 或崇佛, 或闢佛。 今圓覺之佛, 濫受享祀者久矣。 黜去圓覺寺佛, 移安孔子神位於此然後, 撤去成均館何如? 少儒輩誰敢有言泮宮撤去之是非乎? 後人雖有議以邪道所在之地, 不可容吾正道者, 黜去邪道, 引入正道, 何不可之有?" 承旨朴說權鈞李繼孟姜澂李忠純啓: "佛宇與泮宮, 制度不同。 撤去圓覺寺, 用成均館舊材, 移建無妨。 況中朝使臣之來, 例皆謁聖, 制度不可不改也。" 傳曰: "可。 其未構之前, 假設茅屋, 移安孔子神位何如? 今宜別設都監, 差宰相爲提調, 以成均館員爲郞廳, 輸材改造。" 柳洵許琛朴崇質姜龜孫李季仝金壽童李季男金勘任士洪宋軼韓斯文閔暉成世純啓曰: "移構成均館于圓覺寺基, 其神位姑安太平館。" 傳曰: "開城府亦有泮水乎? 儒者學業, 將以事君。 成宗朝儒生等, 請設泮水, 以爲沐浴之所, 此亦陵上之風。" 等啓: "古制, 泮水環似澤, 天子辟雍, 諸侯泮宮。 今之泮水, 非深水半壁也, 乃乾川也, 請設泮水非矣。 開城府館傍, 亦有小水而已, 雖無泮水不妨。" 傳曰: "若撤成均館, 則司贍寺、興德寺亦當撤。" 傳曰: "大抵宮闕要當深邃。 古人云: ‘亂生閨中。’ 者有之。 然自內之亂常少, 而由外之亂常多。 前此命作廣慶門於梨岾, 若作門於此, 無乃近大內乎? 成宗時觀射後苑, 趙祉在家望見得罪, 因名其岾曰趙祉岾, 此非美事。 自含春苑跨司贍越邊, 抵東小門築墻, 於司贍寺石橋作門, 使大內深邃, 自洪繼元家北, 至齊安大君家北, 立標作限, 禁人出入。 且撤家時, 每令家主自撤, 有不卽撤者, 修理都監督撤。" 傳曰: "自疾病家後, 至於昭敬殿, 設基限, 毋得通路, 但祭時開門出入。" 傳曰: "圓覺寺之佛, 世祖所成。 令禮曹區處移置, 成均館移設于圓覺寺。 又撤傍近民家, 搆養賢庫。"


  • 【태백산사고본】 15책 5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44 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주생활-택지(宅地)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행정(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