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왕대비의 졸기
술시(戌時)에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108) 가 창경궁 경춘전(慶春殿)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좌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허침(許琛), 예조 판서 김감(金勘) 및 육조 당상 들이 모두 빈청(賓廳)에 모여 의계(議啓)하기를,
"옛날 안순 왕후(安順王后)109) 의 상사에는 6일 만에 성복(成服)하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다. 대비께서 춘추가 이미 높으시고, 본래 오랜 병이 계셨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하여야 할 것인가? 인양전(仁陽殿)에 빈소(殯所)를 모시고 3일 만에 성복하되, 상제는 일체 덕종(德宗)의 옛일에 의하여 한다. 평시에 유교(遺敎)가 이러하였다."
하였다. 유순 등이 아뢰기를,
"덕종 때 준례로 상을 입을 것입니까? 또 3일 만에 성복하면 신일(申日)인데, 주상 전하의 본명(本命)을 범하게 되므로 감히 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덕종 때의 상제를 써서 아뢰라. 또 29일은 경신일인데, 병신생(丙申生)인 사람도 꺼려야 하는가?"
하였다. 김감이 아뢰기를,
"대군(大君)은 간지(干支)가 다 범하게 되고, 대전·중궁은 단지(單支)110) 만 범합니다. 옛말에 ‘단지는 꺼리지 않는다.’ 하였으나 대전과 중궁에 다 범하여, 마음에 미안하므로 감히 품합니다. 또 덕종의 상제는 지금 50여 년이나 되어 가므로 그 등록(謄錄)111) 을 상고하여 아뢰지 못할 듯합니다. 다만 덕종께서 세자로 승하하셨기 때문에 백관이 복이 없었고, 대비는 성종께서 중국 조정에 명을 청하여 모비(母妃)로 삼았으니, 백관이 복이 없다면 의리에 어찌되겠습니까?"
하고, 이어 의경왕(懿敬王) 염습(殮襲)·장사 때의 의궤(儀軌)112) 를 상고하여 아뢰었는데, 백관은 흰 옷에 각대(角帶)를 띠고 7일 만에 벗었었다. 전교하기를,
"대행 대비(大行大妃)113) 께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되었지만, 나라에는 별로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다. 안순 왕후(安順王后)에 있어서는 곧 대통(大統)114) 이니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의경 대왕(懿敬大王)보다는 좀 높게 하고, 안순 왕후보다는 좀 낮추어 한다면 정리에 매우 합당할 것이다."
하니, 순(洵)이 아뢰기를,
"전일에 이미 신의 의논을 따라 안순 왕후 상제에 의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안순 왕후의 상사에는 최복(衰服)을 3년 그대로 두고, 대행 대비 상사에는 졸곡(卒哭)115) 전에 최복을 벗는다면 벌써 안순 왕후보다 내린 것입니다. 대범 상제는 예전에 의거하여 의정하는 것인데, 만일 안순 왕후보다 내린다면 예문에 근거가 없으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안순 왕후의 상제에 의하여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29일 경신(庚申)은 대전·중궁에게 금기를 범하고, 30일 신유는 옹주(翁主)에게 금기를 범하니 초사흘에 성복하는 것이 어떤가?"
하니, 김감이 아뢰기를,
"이달이 적기 때문에 오는 초하루가 신유입니다. 그러나 옹주는 신해생(辛亥生)이므로 다만 신(辛) 하나만 범합니다. 단간(單干)은 꺼리지 않는 것이니, 성복함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자, 전교하기를,
"초하룻날 성복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607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108]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 덕종 비 소혜 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
- [註 109]
안순 왕후(安順王后) : 예종 비 한씨(韓氏). 연산군 4년에 훙서하였음.- [註 110]
단지(單支) : 지지(地支).- [註 111]
등록(謄錄) : 선례(先例)의 기록.- [註 112]
의궤(儀軌) : 예식.- [註 113]
대행 대비(大行大妃) : 대행은 제왕이나 후비(后妃)가 승하한 뒤 시호 울리기 전의 존칭.- [註 114]
대통(大統) : 왕위를 계승하는 계통.- [註 115]
졸곡(卒哭) : 사람이 죽은 지 3개월 뒤에 드리는 제사.○戌時, 仁粹王大妃薨于昌慶宮 慶春殿。 左議政柳洵、右議政許琛、禮曹判書金勘及六曹堂上等, 皆會賓廳議啓: "昔安順王后之喪, 第六日成服。 今則何以處之?" 傳曰: "生必有死, 大妃春秋已高, 而素有夙疾。 事至於此, 如之何? 其殯於仁陽殿, 而第三日成服, 喪制一依德宗故事, 平時遺敎如此。" 洵等啓: "以德宗例, 服其喪耶? 且第三日成服, 則乃申日, 犯主上本命, 敢稟。" 傳曰: "德宗時喪制書啓。 且二十九日庚申, 則丙申生人亦可忌耶?" 勘啓: "大君則俱犯支干, 大殿、中宮則只犯單支。 古云: ‘單支不忌。’ 然俱犯大殿與中宮, 未安於心, 故敢稟。 且德宗喪制, 今將五十餘年, 其《謄錄》恐未得考啓。 但德宗以世子昇遐, 故百官無服。 大妃則成宗請命于朝, 尊爲母妃。 百官無服, 於義何如?" 仍考懿敬斂葬時儀軌以啓: "百官白衣角帶, 七日而除。" 傳曰: "大行大妃雖臨朝已久, 於國別無可稱之事, 但以慈親事之而已。 若安順王后則是大統也, 不可與此同, 其令差隆於懿敬大王, 差殺於安順王后則甚合情理。" 洵啓: "前日已從臣議, 依安順王后喪制。 但安順王后之喪, 留衰三年, 而大行大妃之喪, 除衰於卒哭之前, 則已殺於安順王后矣。 大凡喪制據古議定, 若殺於安順王后, 則禮文無據, 難於商議也。" 傳曰: "其依安順王后喪制。" 又傳曰: "二十九日庚申, 犯忌於大殿、中宮, 三十日辛酉, 犯忌於翁主, 其以初三日成服何如?" 勘啓: "今月(少)〔小〕 , 故來初一日乃辛酉也。 然翁主辛亥, 而但犯一辛。 單干不忌, 成服甚當。" 傳曰: "其以初一日成服。"
- 【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607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