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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47권, 연산 8년 11월 16일 을유 2번째기사 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윤대를 받다

윤대(輪對)를 받았다.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 하한문(河漢文)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날의 제왕(帝王)은 비록 무공(武功)으로써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문덕(文德)으로써 천하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종(世宗)·세조(世祖) 대왕께서는 창업(創業)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수성(守成)702) 의 쉽지 않음을 염려하시어, 예악(禮樂)을 제정하여 보태평(保太平)703) 11장으로써 그 문덕을 상징하고, 정대업(定大業)704) 으로써 그 무공(武功)을 상징하여 종묘(宗廟)에 올리게까지 하였습니다. 보태평은 초헌(初獻)에 연주하고 정대업은 아헌(亞獻)에 연주하여, 선왕(先王)께서 문무(文武)의 음악을 아울러 쓴 것이 지극한데, 이를 거행할 때에 미진한 점이 있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을 때 항상 아악(雅樂)·속악(俗樂)과 문악(文樂)·무악(武樂)을 고열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어전(御前)과 조정의 잔치 때에는 정대업의 춤[定大業之舞]에 비록 창기(娼妓)를 쓰지마는 오히려 육일(六佾)705) 을 갖추어 있고, 방·원·곡·직·예(方圓曲直銳)의 오진(五陣)이 그 변하는 형태에 따라 항상 갖추어 연주됩니다. 그런데 종묘의 대향(大享) 때에는 정대업 10장이 비록 모조리 거행되고 남김이 없지만, 오직 제4장 선위장(宣威章)에서는 오진을 만들지 않고 다만 공덕(功德)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그쳤으니, 선왕(先王)이 오진을 제작함에 예악(禮樂)의 법식이 구비되지 못했는가를 신은 그윽이 의심되옵니다. 그러니 항상 장악원(掌樂院)에서 제사 때의 음악을 익힐 적에는 악보(樂譜)에 의거하여 공인(工人)을 육일로 대(隊)를 만들되, 대마다 오진을 이루어, 절차에 따라 합주(合奏)를 하면, 항오(行伍)706) 와 출입이 서로 생(生)하고 서로 변(變)하여서, 정정(井井)707) 하게 조리가 있고 질질(秩秩)708) 하게 차례가 있어 우리 성조(聖祖)의 문명(文明)의 정치가 찬연하게 빛나서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니 거행하기를 청합니다.

또 제사 때 쓴 포육(脯肉)은 그대로 도로 바칠까 두려우니, 곧 제감(祭監)을 시켜서 고기를 끊고 자르는 것을 몸소 감시하게 하여 다시 쓰는 것을 방지하소서. 그러나 각종 찬물(饌物)은 곧 철거하지 않고 진설한 대로 두는데, 아침까지 가면 냄새가 나게 되어 설만(褻慢)함이 매우 심하게 되니, 예문(禮文)의 ‘철상(撤床)하는 것을 늦추지 않는다.’는 뜻에 참으로 어긋나게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제사 후에는 곧 제감을 시켜 제찬(祭饌)을 철상하는 것을 감시하게 하여, 신어(神御)709) 를 정(正)하게 하소서."

하였다.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영우(金靈雨)는 아뢰기를,

"형조(刑曹)는 백성들의 죄를 판결하고, 한성부(漢城府)는 전답·가옥에 관해 서로 다투는 것을 다스리고, 장례원(掌隷院)에서는 노비(奴婢)에 관해 서로 송사하는 것을 가리는 곳으로, 그 직무가 지극히 중요하여 이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이 혹시 그 적임자가 아니면, 반드시 사정(私情)에 따라 잘못 판결하는 폐단이 있는 까닭에, 국가에서 조종(祖宗) 때부터 적임자를 가려서 그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오직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는 분경(奔競)710) 금지법을 시행하는데, 형조와 한성부에는 시행하지 않으니, 어찌 두 관청이 장례원보다 도리어 가벼움이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형조와 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 집에도 분경 금지법을 시행하여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소서."

하였다. 제용감 정(濟用監正) 한금(韓嶔)은 아뢰기를,

"각 관사(官司)의 지방에 거주하는 노비(奴婢)들의 공포(貢布)를 징수할 때에, 남은 돈을 저화(楮貨)711) 로, 사내 종은 1명에 20장, 계집 종은 1명 10장을 해마다 사섬시(司贍寺)에 상납합니다. 사섬시에 있는 저화는 각 관사의 무명 값 이외에는 쓸 곳이 전혀 없는데, 이 때문에 민간의 저화가 매우 귀하여, 비록 갑절의 값을 주고 사려고 해도 얻을 길이 없으니, 그 폐단이 아주 많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저화를 거두어들여 쓰는 절목(節目)을, 해당 관사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여 그 폐단을 없애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경기 주민들은 부역(賦役)의 번거로움이 다른 도(道)보다 갑절이나 되는데, 게다가 생초(生草)와 곡초(穀草)712) 까지 첨가하여, 흉년도 논하지 않고 사복시(司僕寺)의 마필(馬匹)의 많고 적은 것에 경기(京畿)의 논밭 결수(結數)를 환산하여, 말이 많으면 많은 수량을, 말이 적으면 수량을 줄여서 사복시에 납부하며, 공신전(功臣田)과 직전(職田)713) 의 짚값은 군자감(軍資監)에 납부하니, 이중으로 납부하는 폐단이 다른 도(道)에서 전세(田稅)만 납부하는 것과는 괴로움과 수월함이 고르지 못합니다. 사복시에 바치는 생초와 곡초는 본디 줄이기가 곤란하지만, 군자감에 상납하는 짚값은 줄여 민폐(民弊)를 없애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47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28 면
  • 【분류】
    금융-화폐(貨幣)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예술-음악(音樂)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

  • [註 702]
    수성(守成) : 창업을 이어받아 지킴.
  • [註 703]
    보태평(保太平) : 나라 잔치와 제향 때 연주하던 악장(樂章).
  • [註 704]
    정대업(定大業) : 나라 잔치와 제향 때 연주하던 악장(樂章).
  • [註 705]
    육일(六佾) : 옛날 제후(諸侯)가 쓰던 악무(樂舞)임. 일(佾)은 가로줄[列]과 세로줄[行]의 인원이 같은 춤으로써 천자(天子)는 팔일(八佾), 곧 팔렬 팔행(八列八行)의 64명이며, 제후는 육일(六佾)의 36인이며, 대부는 16인이며, 사(士)는 4인이었음. 《논어(論語)》 팔일(八佾).
  • [註 706]
    항오(行伍) : 행렬.
  • [註 707]
    정정(井井) : 질서 정연한 모습.
  • [註 708]
    질질(秩秩) : 질서 정연한 모습.
  • [註 709]
    신어(神御) : 선왕의 신령이 쓰는 물품.
  • [註 710]
    분경(奔競) : 벼슬을 얻기 위하여, 또는 청탁을 하기 위하여 고관집을 찾아다니는 것.
  • [註 711]
    저화(楮貨) : 고려말 원(元)나라의 보초(寶鈔)를 본떠서 닥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어 쓰던 지전(紙錢)임. 이 종이 한 장을 쌀 한 되에 비기게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까지 쓰이었음. 일명 저폐(楮幣)라고도 함.
  • [註 712]
    곡초(穀草) : 볏짚.
  • [註 713]
    직전(職田) : 사전(私田)의 하나. 벼슬아치에게 반급(頒給)했음.

○受輪對。 通禮院右通禮河漢文曰: "臣聞, 古昔帝王雖以武得天下, 必以文安天下。 故我世宗世祖大王思創業之艱難, 念守成之不易, 制禮、作樂, 以《保太平》十一章, 象其文德; 以《定大業》, 象其武功, 至薦宗廟。 《保太平》奏之初獻, 《定大業》奏之亞獻, 先王竝用文武之樂至矣, 而行之有未盡焉。 臣嘗爲掌樂正, 常閱雅、俗、文、武樂。 伏念, 御前及朝廷宴享時, 《定大業》舞雖用娼妓, 猶具六佾, 方、圓、曲、直、銳五陣, 從其變形, 常行具奏, 而宗廟大享時, 則《定大業》十章雖(眞)〔盡〕 擧無遺, 獨於第四《宣威章》不作五陣, 徒事歌頌而止。 先王爲五陣制作, 禮樂之典未備, 臣竊疑焉。 常於院中祭樂肄習, 依樂譜以工人六佾爲隊, 隊成五陣, 節次合奏, 則行伍出入, 相生相變, 井井有條, 秩秩有序, 我聖朝文明之治, 粲然可觀, 請行之。 且祭用脯肉, 恐其還納, 卽令祭監親監斷折, 以防後用。 然各種饌物未卽撤去, 因仍陳設, 以至日明, 致有臭, 褻慢滋甚。 其於禮文廢撤不遲之義, 實爲違焉。 伏願祭後卽令監祭, 兼監撤膳, 以正神御。" 繕工監正金靈雨曰: "刑曹決生民罪辜, 漢城府治田宅相爭, 掌隷院辨奴婢相訟, 其爲任至重。 居是官者, 或非其人, 必有徇私誤決之弊。 國家自祖宗朝, 擇其人, 以授其任。 然獨於掌隷院判決事, 家設奔競, 刑曹、漢城府, 則不設, 豈兩司反有輕於掌隷院乎? 臣願, 自今以後, 刑曹、漢城府堂上家, 竝設奔競, 以杜私請。" 濟用監正韓嶔曰: "各司外居奴婢收貢時, 餘錢楮貨, 奴一口二十文, 婢一口十文, 每年上納司贍寺。 寺在楮貨, 各司木價外, 用處專無。 以此, 民間楮貨稀貴, 雖倍價貿之, 得之無由, 其弊不貲。 京外楮貨興用節目, 請令該司磨鍊, 以除其弊。 且京畿居民賦役之煩, 倍於他道。 加之以生草穀草, 勿論年凶, 以司僕寺馬匹多寡與京畿田地結數憑考, 馬多則多數, 寡則減數, 納于司僕寺。 功臣田、職田草價則納軍資監, 其疊納之弊, 與他道居民只納田稅者, 苦歇不均。 司僕寺生穀草, 固難蠲減, 請蠲軍資監上納草價, 以除民弊。" 王皆不答。


  • 【태백산사고본】 12책 47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28 면
  • 【분류】
    금융-화폐(貨幣)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예술-음악(音樂)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