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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44권, 연산 8년 6월 2일 임인 1번째기사 1502년 명 홍치(弘治) 15년

하성 부원군 정현조가 회암사의 일로 아뢰다

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가 아뢰기를,

"회암사(檜巖寺)의 안거승(安居僧)은 신(臣)이 제 마음대로 한 일이 아니오며, 세조(世祖)·정희 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세조 대왕정희 왕후께서 친히 회암사에 거둥하셨을 적에 공주(公主)도 또한 따라갔는데, 절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다시 짓기로 의논을 정하였으나, 세조께서 미처 성취하지 못하셨으므로 정희 왕후께서 세조의 뜻을 받들어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다시 세우는 일을 도맡도록 하고, 또 신에게 명령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선행(善行)을 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공주(公主)에게 장가들게 되었으니, 네가 힘을 써서 나의 소원을 이루라.’ 하시므로, 신은 명령을 받고 공주와 더불어 재물을 털어 부족을 보충하고 다시 신축하여 원당(願堂)을 삼은 것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으니, 신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공주가 조금 후에 죽으므로 이내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설치하려 하고, 또 공주가 일찍 죽은 것을 슬피 여겨 면포(綿布) 몇 필을 주되 화주(化主)393) 에게 주어 이를 공양(供養)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근래에 중들이 가진 물화(物貨)를 공사(公私)간에 빼앗은 것이 많다 하므로, 그 권문(勸文)394) 에 서명(署名)하고 또 이웃 고을 수령에게 서신을 보내어 원당(願堂)의 화주승(化主僧)을 돌보아 주기 청한 것이요, 전곡(錢穀)을 구걸한 것은 아닙니다. 선후의 유교(遺敎)가 귀에 남아 있으므로 차마 저버리지 못한 것이오니, 이것이 신의 실정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세조께서 불교를 숭상하셨던 까닭으로 전교가 이러하신 것이나 이것은 다만 한때의 일인 것이다. 《여지승람》에 기재된 것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비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있더라도 지금 숭상하는 것이 아니니 거행할 수 없다. 국가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경(卿)이 권문에 서명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한 까닭으로 대간이 논계했던 것이다. 만약 국문한다면 옥사(獄事)가 널리 퍼지겠기에 국문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4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95 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사상-불교(佛敎) / 사법-탄핵(彈劾)

  • [註 393]
    화주(化主) : 거리에 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시주를 받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法綠)을 맺게 하며 절에서 쓰는 비용을 구해들이는 중.
  • [註 394]
    권문(勸文) : 불사(佛寺)의 건립 등에 보시(布施), 즉 기부하기를 권하는 글.

○壬寅/河城府院君 鄭顯祖啓: "檜巖安居, 非臣之自擅, 不忘世祖貞熹王后遺敎耳。 昔世祖大王貞熹王后親幸檜巖寺, 公主亦隨去, 觀寺之頹圮, 定議重創, 世祖未及成就。 貞熹王后世祖之意, 命內需司, 專辦重創, 又命臣曰: ‘爾必有種善之因, 得尙公主, 爾其勉力, 俾遂予願。’ 臣承命, 與公主傾財, 以補其缺, 重新爲願堂, 載在《輿地勝覽》, 非臣之擅爲也。 公主尋卒, 因爲先王、先后, 欲設水陸, 且哀公主早逝, 給綿布若干匹, 授化主以供之。 聞, 近來僧人所齎物貨, 公私多奪之者, 故署其勸文, 且通書傍邑守令, 請恤願堂化主僧耳, 非乞錢穀也。 先后遺敎在耳, 不忍後背, 此臣之情也。" 傳曰: "世祖崇佛, 故傳敎如是, 然此特一時事耳。 《輿地勝覽》所載, 未可詳也。 雖在《大典》, 非今所尙, 則不可擧行。 非關國家利害, 而卿署其勸文, 誘惑愚民, 故臺諫論啓。 若鞫之則恐獄事蔓延, 故勿鞫耳。"


  • 【태백산사고본】 12책 4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95 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사상-불교(佛敎)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