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 도주에게 책유하는 서계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다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유(責諭)하는 서계(書契)에 관한 일을 예조(禮曹)가 아뢴 것에 대하여 의정부·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윤필상·한치형·성준·이극균·이극돈 등이 아뢰기를,
"예조 계목(禮曹啓目)의 사연(辭緣)은 대개 사의(事宜)에 합당한 듯합니다. 다만 예조가 의아스럽게 여기는 본도(本島) 3조(條)내에 ‘진실로 얻기 어려운 청을 함은 우리 나라를 엿보려는 의사입니다.’ 한 것은 아마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견식과 계략이 깊고 원대하며 성질이 사납고 오만한 호걸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인(倭人)이 성질이 아무리 간사하고 교활하더라도 그 계략은 반드시 이에 미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도주(島主)가 나이 젊고 성질이 또한 전도(顚倒)096) 된 것이거나 도중(島中)의 나이 많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 신진(新進)들이 그 조부(祖父)가 대국(大國)097) 을 섬기던 관례를 알지 못하므로 매양 청구하는 것으로써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포화(布貨) 1천 필을 청구했다가 수백 필을 얻게 되고, 은 1천 냥을 청구했다가 또 포화(布貨) 1백 필을 얻게 되니, 그 얻은 이익이 이와 같은 까닭으로 그들의 청구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매양 이러한 특송사(特送使)가 온다 해도 하사(下賜)한 물품은 많아야 수십필에 불과하고, 혹은 5, 6필 혹은 3, 4필 뿐이었으니, 만약 그전에 하사한 1백 필로써 계산한다면 이것은 전일에 왔던 10명의 특송사가 왕래하여 얻은 것입니다.
가령 저들이 흔단(釁端)을 일으키려고 고의로 얻기 어려운 청을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는 당연히 거짓으로 모른 체하고 우리의 있고 없는 형편을 헤아려서 그들에게 응해야 될 것인데, 어찌 저장된 물품을 다 없애가면서 그들의 한정 없는 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비록 이 일로 인하여 흔단이 일어나더라도 마땅히 처치할 것을 생각해야지, 어찌 고식(姑息)의 계책을 써서 욕을 초래하겠습니까. 고식 정책은 국가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당(唐)나라에서 번진(藩鎭)098) 을 대하는데 모두 고식 정책을 썼으므로 마침내 그들이 발호(跋扈)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외이(外夷)의 참람한 행동을 하는 징조는 미리 방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외이를 대우함을 보건대, 늘 일정한 규정을 따라 행하고 일찍이 가감(加減)하지 않으므로 외이들은 바라는 일이 없었으며, 중국에서도 함부로 상주는 은전이 없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혹 때로는 줄이거나 늘림이 있었으므로 그 폐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특송사(特送使)가 온 데 대해서는, 예조로 하여금 전일에 유고(諭告)한 서계(書契)의 사연을 가지고 되풀이하여 개유(開諭)하게 하되, 혹은 엄한 말로 무례한 데 대한 책망을 은근히 보여서 그들의 의사를 시험해 보고, 그 후에 이 뜻으로써 서계를 만들어 답서(答書)하고 그들에게 하사(下賜)하는 물건도 그때에 가서 간략하게 상주(上奏)하여 재가를 얻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박건(朴楗)은 의논드리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근래에 청구하는 것은 그 형세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저장한 물건은 한도가 있는데 저들의 구렁 같은 욕심은 한이 없으니, 인자(仁慈)한 은덕을 펴서 그들의 청구를 다 따르려 하다가는 비록 국고를 다 턴다 하더라도 그들의 청구를 잇대어 주기가 어렵겠으니, 청컨대 호조와 예조로 하여금 그 중간을 참작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상주하여 재가를 얻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즙(李諿)·한사문(韓斯文)·김수동(金壽童)·송질(宋軼)·홍자아(洪自阿)·노공유(盧公裕)·민효증(閔孝曾) 등이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대우하는 데 은사(恩賜)하는 물품이 매우 후한데도 도주(島主)는 오히려 감사할 줄을 모르고 청구가 한정이 없어, 심지어는 따를 수 없는 일로써 두세 번 청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수량을 줄였다 하여 또 가져가지 않는다면 공손하지 못한 듯하오나 저들을 어찌 예의로써 책망하겠으며, 또 어찌 경솔히 관계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청구하는 백저포(白苧布) 2천 필 내에서 우선 줄여서 10분의 1만을 주어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은혜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유순(柳洵)·신준(申浚)·홍귀달(洪貴達)·강귀손(姜龜孫)·윤효손(尹孝孫)·박숭질(朴崇質)은 의논드리기를,
"대체로 저들과 우리 나라 사이에는 청구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연유가 있었으니 연유 없이 청구한 것이 있음을 듣지 못했으며, 또한 연유가 없는데 증여(贈與)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이미 은 1천 냥을 청구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 이유로써 면포(綿布) 1백 필만 허가했는데, 사자가 이것을 그냥 두고 갔다가 얼마 안 가서 또 저포(苧布) 1천 필을 청구하니, 앞뒤의 청구가 모두 연유가 없는 것이므로 그들의 의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도이(島夷)를 대우할 적에 무릇 청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 청구에 따른 것이 많았으니, 그들의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서가 아니고, 다만 그들을 회유(懷綏)하는 도리로써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그들의 청구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은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면포를 주어 그들의 청구에 답해주고, 저포는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아주 끊고서 주지 않아 그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되니, 1백 필 이하로 적절히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실망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윤필상(尹弼商) 등의 의논을 좇았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4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65 면
- 【분류】외교-왜(倭)
- [註 096]
○對馬島主處責諭書契事, 因禮曹之啓, 命議于議政府、六曹、漢城府堂上。 弼商、致亨、成俊、克均、克墩等議: "禮曹啓目辭緣, 大槪似合事宜。 但禮曹所訝本島三條內: ‘固爲難得之請, 窺覘國家之意。’ 則恐未必然也。 如此之謀, 非識計深遠, 桀鷔豪傑者不能也。 倭人性雖奸黠, 其計必不及此。 是不過島主年少, 性又顚倒, 島中年老用事者皆死, 而新進者不知祖父事大之例, 每以求請爲事, 請布貨千匹, 得數百匹; 請銀一千兩, 又得布貨百匹, 其得利如是, 故其求請不止。 每此特送之來, 所賜之物多不過數十匹, 或五六匹, 三四匹而已。 若以曾所賜百匹計之, 是前來十特送往來所得也。 假使彼欲起釁端, 故爲難得之請, 國家當佯若不知, 量度我有無, 應之耳, 豈可罄(謁)〔竭〕 所儲, 以充無窮之慾乎? 且雖因此起釁端, 當思有以處置, 豈可爲姑息之計, 以取辱哉? 姑息國家所忌, 唐之待藩鎭, 皆用姑息, 終至跋扈, 外夷濫溢之漸, 不可不預爲之防也。 今見中朝待外夷, 常遵恒規, 不曾加減。 故外夷無希望之事, 中國無濫賞之恩。 我朝則或有時損益, 故其弊乃至如此。 今特送之來, 令禮曹將前諭書契辭緣, 反覆開諭, 或嚴辭微示無禮之責, 以試其意, 然後因以此意, 書契修答, 其賜物件, 臨時從略取稟何如?" 朴楗議: "對馬島主邇來求請, 勢不可當。 我國之儲有限, 彼虜溪壑之慾無窮, 欲布仁恩, 盡從其請, 則雖罄(謁)〔竭〕 府庫, 難以繼之。 請令戶曹、禮曹, 斟酌其間, 量宜取稟何如?" 李諿、韓斯文、金 壽童、宋軼、洪自阿、盧公裕、閔孝曾等議: "我國待對馬島, 恩賜甚厚, 而島主猶不知感, 求請無厭。 至以不可從之事, 再三請之, 若減損其數, 又不齎去, 似若不遜。 然彼豈可以禮義責之, 又豈可以輕絶之哉? 今次所求白苧布二千匹內, 姑減給十分之一, 以敦字小之恩何如?" 柳洵、申浚、洪貴達、姜龜孫、尹孝孫、朴崇質議: "大凡彼我之間, 有所求請, 必有所因, 未聞有無因而請之者, 亦不可無因而與之。 對馬島主旣請銀一千兩, 以非我國所産, 只許緜布百匹, 而使者置之而去。 未幾又請苧布一千匹, 前後之請皆無因, 其意不可知。 然我國之待島夷, 凡有所求, 從之者多, 非嘉其忠誠也, 特以懷綏之道, 不得不爾。 今若不從其請, 是絶物也。 銀非所産, 猶給緜布, 以塞其請。 苧布是我國之産, 不可絶無所與, 以孤其心, 量給百數以下, 使無缺望何如?" 從弼商等議。
- 【태백산사고본】 11책 4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65 면
- 【분류】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