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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1월 30일 기묘 1번째기사 1501년 명 홍치(弘治) 14년

예조에서 제주도 내섬시의 종 장회이가 일본에 표류하여 보고 겪은 일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평순치(平順治)이라다라(而羅多羅)를 사신으로 하여 표류인을 보냈는데, 그는 제주(濟州)에 사는 내섬시(內贍寺)의 종 장회이(張廻伊)021) 였다. 이야기하기를, ‘지난 기미년022) 정월에 포류해서 일본 해변에 도착했는데, 왜인 11명이 작은 배를 타고 왔고, 또 왜인의 배 30여 척이 와서 포위했습니다. 이라다라(而羅多羅)라고 칭하는 왜인이 내가 탄 배를 그의 배 꼬리에 매어 달고는 동쪽으로 조금 가서 미도(彌島)023) 가에 이르니, 왜인의 집 30여 호가 있었습니다. 데리고 그 집에 가서 10일 동안 머물렀는데, 항상 술과 밥을 먹여 주었습니다. 10일 뒤에 하룻길 거리에 있는 산밑으로 가니, 오질포리(烏叱浦里)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이라다라(而羅多羅)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날 밤에 도주(島主)의 아비 평순치(平順治)의 집에 이르니, 또한 머물러 있기를 허락하고, 생깁 저고리 2벌, 무명 겹옷 2벌, 홑옷 3벌, 속옷 2벌을 만들어 주고 거기서 1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평순치(平順治)가 나에게 하는 말이, ‘네가 이곳에서 살겠다면 마땅히 장가를 들이고 집을 지어서 살게 할 것이고, 만약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면 내어 보내리라.’고 하기에, ‘부모가 그리워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하였더니, 평순치(平順治)서계(書契)024) 를 써서 그 아들 이라다라(而羅多羅)에게 주고는 나에게 길 양식 10석(石)을 주었습니다.

전년 정월 12일에 내보내기에 그 집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서 하룻길을 가서 우기도(于奇島)에 이르러 3일 동안을 묵었습니다. 그곳에 왜인의 집 20호가 있었고, 배 10여 척이 떠 있었는데, 모두 고기잡이 배였습니다. 또 동쪽으로 향해 돛을 달고 이틀 낮 하룻밤 만에 화가대도(化可大島)에 이르러 17일 동안을 머물러 있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배를 타고 온 지 1일만에 일기도(壹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즉시 내보내주지 않으므로 6개월 동안을 머물렀습니다. 전년 7월에 행장(行狀)025) 을 받고 이날 30일에 제포(薺浦)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풍속으로는 도주(島主) 평순치(平順治)가 사냥할 적마다 말을 타고 환도와 화살을 허리 사이 안팎으로 차고, 소도(小刀)도 차며, 활을 보행하는 사람에게 주어 가지게 하고, 살고 있는 곳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노루·사슴·멧돼지·꿩·물개 등 짐승을 몰아 사냥하는데, 노루·사슴을 잡으면 가죽만 벗기고 그 살은 버리며, 멧돼지·꿩·물개를 잡으면 고기를 삶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는 흩어지며, 다음날도 또 이같이 했습니다. 술을 마실 적마다 나를 초대해서 접대하면서, ‘술과 고기를 네가 배부르도록 먹으라.’고 했습니다. 고기잡이로는 해변에 사는 왜인들이 고등어·오징어·방어·도미·대구·청어·상어·전복·해삼·홍어·조기·숭어 등은 철을 따라 잡아서 도주(島主)의 집에 바쳤습니다. 소로 논을 갈아서 볍씨를 물에 담갔다가 싹이 트면 4월에 씨를 뿌려서 싹이 자란 뒤에 5월에 모내기를 하고, 제초(除草)는 하지 않으며, 7월에 수확합니다. 그 곡초(穀草)026) 의 길이는 두 줌쯤 되고, 그 뿌리에 싹이 나서 익으면 9월에 수확하고, 또 그 뿌리에 싹이 나서 익지 않으면 사람은 먹지 않고 베어 들여서 마소를 먹였습니다. 밭곡식은 5월 중에 보리·콩·조·피 등을 같은 때에 씨를 뿌려 소로 갈아서 덮고, 싹이 자란 후에 두 번 제초(除草)해서 수확하며, 다시 갈거나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도주(島主) 평순치(平順治)의 집은 30여 칸이나 되는데, 모두 지붕에 기와를 이고 나무 판자로 벽을 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麾下)의 사람들은 긴 행랑 초가(草家)에 살았는데, 우리 나라 시중(市中)의 좌우 행랑과 같았습니다. 남녀의 혼인은 여자의 부모가 무늬있는 옷감으로 그 딸의 머리를 싸서 말을 태워 먼저 가게 하고, 부모와 노비(奴婢)가 뒤따라 가며, 신랑의 집에서는 혼례 뒤에 밤새도록 잔치를 하며, 이튿날 아침에 신부 부모와 노비들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길을 다니는 사람은 항상 환도와 소도(小刀)를 차고, 만일 존장을 만나면 신발을 벗고 지나가는데, 설령 전부터 서로 모르는 사람이라도 만약 신을 벗지 않고 지나가면, 성을 내어 쫓아가 잡아서 목을 잘라 버리며, 또 사사로이 서로 성이 나서 다투는 사람들도 환도로 서로 쳐서 목을 자르며 도주(島主)가 비록 알더라도 전혀 검찰(檢察)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4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39 면
  • 【분류】
    외교-왜(倭)

  • [註 021]
    장회이(張廻伊) : 원문에 장(棖)으로 되었음.
  • [註 022]
    기미년 : 1499 연산군 5년.
  • [註 023]
    미도(彌島) : 원문에 며도(旀島)로 되어 있음.
  • [註 024]
    서계(書契) : 문서를 뜻함.
  • [註 025]
    행장(行狀) : 외국 사람에게 주는 여행권.
  • [註 026]
    곡초(穀草) : 베어 낸 곡식의 줄기.

○己卯/禮曹啓: "頃者平順治使送而羅多羅率來漂流人濟州居內贍寺奴(棖迴伊)〔張迴伊〕 云: ‘去己未正月, 漂流到日本海邊。 有人十一, 騎小船而來, 又船三十餘隻來圍。 有而羅 多羅稱名倭人以吾所騎之船, 懸結其船之尾, 東行至一息許彌島邊, 有家三十餘戶。 率至其家, 留十日, 常饋酒飯。 十日之後, 東距一日程山底, 有烏叱浦里, 卽而羅多羅所居。 是夕到島主平順治之家, 亦許留。 造給綃襦衣二、布裌衣二、單衣三、裏衣二, 經一年。 平順治謂我曰: 「汝欲居此, 則當娶妻、造家而居, 若欲還本土, 當出送。」 答以思戀父母, 欲還本土。 平順治成書契, 授其子而羅多羅, 給路糧十碩。 前年正月十二日出送, 自其家東向一日程, 到亐奇島留三日。 其處戶二十, 船隻十餘浮泊, 皆釣魚船。 又東向懸帆, 二晝一夜而到化可大島, 十七日留連。 指西行船一日, 到壹歧島留四日。 又東向行船一日, 到對馬島, 島主不卽出送, 留至六朔。 前年七月受行狀, 是月三十日到薺浦。 其處風土, 則島主平順治每出獵時, 騎馬、佩環刀與箭, 腰間內外佩小刀, 而弓子則令步行人齎持, 盡會居處軍士, 打驅獐鹿、猪、雉、水獺等獸。 獵得獐鹿, 則剝皮而棄其肉; 猪、雉、水獺等肉, 則烹熟, 終夜飮酒而散, 明日亦如是。 每飮酒時, 招我饋之曰: 「酒肉汝當飽食。」 水獵則海邊居等, 以古道魚、烏賊魚、魴魚、都音魚、大口魚、靑魚、魦魚、生鮑、海參、洪魚、石首魚、秀魚, 隨節漁取, 獻島主之家。 耕水田以牛, 稻種沈水發苗後, 四月播種, 立苗成長後, 五月移秧, 不除草, 七月收穫, 其穀草長二把。 又其根立苗至熟, 九月收穫; 又其根立苗不熟, 則人不食之, 刈取之以養牛、馬。 田穀則五月之間, 麰麥、豆太、粟稷一時落種, 用牛反耕。 立苗後二除草收穫, 更不耕種。 島主平順治家三十餘間, 皆蓋瓦, 以木板爲壁。 其餘麾下人, 則長行廊草家, 各間入接, 如本國市中左右行廊。 男女婚姻, 則女之父母以斑衣裹其女之頭, 乘馬先行, 父母、奴婢隨之。 夫家交婚之後, 過夜行酒禮, 翌日朝, 父母、奴婢還家。 行路人, 常佩環刀與小刀, 若遇尊長, 脫鞋過行。 雖不曾相知者, 若不脫鞋過行, 則發怒追捕斬頭, 又私相發怒相鬪者, 以環刀相毆斬頭, 島主雖知, 專不檢察。"


  • 【태백산사고본】 11책 40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39 면
  • 【분류】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