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제도를 참작하여 예복과 예관을 쓰도록 정하라고 명하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특진관 윤효손(尹孝孫)이 아뢰기를,
"지난 정축년에 신이 예조 정랑이었는데, 그 당시의 초정(初正)·동지·삭망(朔望) 조하(朝賀) 때면 왕세자는 칠장(七章)의 면복(冕服)을 갖추고 문무 백관들은 조복을 입었었습니다."
하고, 판서 이승손(李承孫)은 아뢰기를,
"백관들이 삭망에 상시 조복(朝服)을 입게 되면 반드시 더러워지고 떨어질 것인데 그런 차림으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되면 조정의 광채가 없어질 것이니, 청컨대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삭망(朔望)에는 백관들이 공복(公服)을 입게 하고, 왕세자도 또한 문종(文宗) 세자 시절의 전례에 의거하여 공복을 입는 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게 하소서.
신이 세조 때에 아뢰기를, ‘왕세자가 지금 공복을 입는데 백관들의 공복과 명칭이나 제도가 차등이 없습니다. 또, 《문헌통고(文獻通考)》242) 를 상고해 보건대, 당(唐)나라 제도에 황태자가 원일(元日) 및 동지와 삭망에 입조(入朝)하려면 삼량원유관(三梁遠遊冠)243) 을 썼으니, 원컨대 이 제도에 의거하여 삭망의 조하(朝賀)에 전하께서는 구량 원유관(九梁遠遊冠)을 쓰시고 왕세자께서는 칠량 원유관(七梁遠遊冠)을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더니, 세조께서 좋다 하셨고, 성종 때에 신이 다시 아뢰었더니, 예관(禮官)에게 명령하여 상세히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판서 신숙주(申叔舟)가 옛날의 제도를 널리 상고해보고 ‘삭망의 조하(朝賀)에 전하께서는 구량원유관을 쓰시고 왕세자께서는 칠량원유관을 쓰시는 것이 좋겠으니, 청컨대 다시 중국의 친왕세자(親王世子)가 삭망에 착용하는 관복(冠服)을 물어보고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 후에 듣건대, 중국의 왕세자가, 대조하(大朝賀)에는 면복(冕服)을 갖추고, 삭망에는 피변복(皮弁服)을 갖추고 평상시에는 익선관(翼善冠)을 쓴다고 하였는데, 왕세자께서 삭망의 조하(朝賀)에 오히려 공복(公服)을 입어 백관들과 차등이 없게 한다는 것은 또한 옛날 제도에는 없는 일이니, 원컨대 신숙주(申叔舟)의 아뢰었던 바에 의거하여 전하께서는 구량원유관을 쓰시고 왕세자께서는 칠량원유관을 쓰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제도를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36 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의생활-예복(禮服)
○壬辰/受常參, 御經筵。 特進官尹孝孫曰: "去丁丑年, 臣爲禮曹正郞。 當時, 正至及朔望朝賀, 王世子具七章冕服, 文武百官着朝服。" 判書李承孫啓: "百官朔望常着朝服, 則必至陋破。 以此接待中朝使臣, 朝彩埋沒, 請依中朝制, 朔望百官着公服, 王世子亦依文宗世子之例具公服, 以爲定式。 臣於世祖朝啓: ‘王世子令具公服, 與百官公服, 名制無等。 且按《文獻通考》, 唐制, 皇太子元日及冬至、朔望入朝, 着三梁遠遊冠。 乞依此制, 朔望朝賀, 殿下具九梁遠遊冠, 王世子具七梁遠遊冠爲便。’ 世祖曰: ‘善。’ 成宗朝臣更啓之, 命禮官詳議。 判書申叔舟廣考古制, 請於朔望朝賀, 殿下具九梁遠遊冠, 王世子具七梁遠遊冠爲便。 請更問中朝王世子朔望冠服而定之。’ 其後聞, 中朝王世子, 大朝賀具冕服, 朔望具皮弁服, 常時冠翼善冠, 而王世子朔望朝賀, 猶具公服, 與百官無等, 亦無古制, 乞依叔舟所啓, 殿下具九梁遠遊冠, 王世子具七梁遠遊冠。" 王曰: "參酌古制行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36 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