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안처선이 경연은 강독뿐 아니라 고금의 치란 득실을 논란하는 것이라고 아뢰다
왕이 경연에 납시었다. 대사헌 성현(成俔)과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이 아뢰기를,
"내수사의 장리(長利)는 국가의 경비에 관계되는 재물이 아니므로 수령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다면 비단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의 대체(大體)에도 적당하지 못합니다. 한위(韓偉)의 일은 하교(下敎)에, 대비(大妃) 때문이라 하셨지만 신 등의 생각에는 한위가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앞당겨 체직(遞職)되어 당상으로 승진된 것만 하여도 또한 이미 족한 것인데, 육조(六曹)의 당상으로 제수(除授)되기까지 하였으니 과람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성명(成命)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고, 지평 성중온(成仲溫)은 아뢰기를,
"성종 때에 이유인(李有仁)이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있으면서 치적(治績)이 누구보다도 현저하므로 성종께서 표창하고 발탁하여 임용하시면서도 오히려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삼는 데 그쳤던 것입니다. 하교에 비록 대비(大妃) 때문이라고 하셨지마는, 어찌 조정의 벼슬자리를 가지고 모후(母后)를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재료를 삼겠습니까."
하고, 성현(成俔)은 아뢰기를,
"신종흡(申從洽)은 탐오(貪汚)에 관계된 일이 있었으니, 한 관사(官司)의 장으로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육조(六曹)의 공사(公事)가 비록 당상(堂上)이 있지만 낭관(郞官)이 주관하고 30개월로 한도를 삼는 것은 그 임무에 오래 있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은 더러 10개월이 못 되기도 하거나 더러는 20개월만에 천직(遷職)시키니, 그 오래 맡겨 임기를 채우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비단 육조(六曹)뿐만 아니라 각 관사(官司)에도 모두 오래 맡기는 법이 있으니 《대전(大典)》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하고, 성중온(成仲溫)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척리(戚里)의 사람을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해서 임용하여 교만한 마음을 조장(助長)시켰다가 실패하게 된 일이 많았는데 교만하고 방종하여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찌 그 사람의 복이 되겠습니까."
하며, 성현(成俔)은 아뢰기를,
"근래에 나이 젊은 문학하는 선비들이 겨우 홍문관(弘文館)에 들어온 지 1개월도 되기 전에 다시 나가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이 되므로, 예비하여 양성(養成)하는 본의가 없게 됩니다. 육조가 비록 중요하지마는 어찌 경연관보다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나라가 이웃 나라와 사귀고 중국을 섬기고 있으므로 국체(國體)를 빛낼 인재를 미리 양성하지 않을 수 없사온데, 지금 시문(詩文)을 잘하는 사람 중에 홍귀달(洪貴達)은 이미 늙었고 조위(曹偉)는 죄를 받았으며, 권건(權健)은 병이 있으므로 신 같은 재주없는 사람으로 외람되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어찌 물망(物望)에 흡족하겠습니까. 지금 나이가 젊은 문사(文士)들이 몇 사람 없는데, 또한 문장을 배우는 일에 뜻을 두지 않으니, 청컨대 다시 정밀히 선발하여, 그 학업에 전심(專心)하도록 하되 신이 전일에 아뢴 권장 절목(勸奬節目)을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승건(李承健)이 아뢰기를,
"신이 함경도에 3년 동안 있었으므로 남북(南北) 방수(防戍)의 폐단을 상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에 새로 어면보(魚面堡)를 설치하고 삼수군(三水郡)에서 어면보까지 새 길을 개통했는데, 그 중간에 5개의 큰 재[嶺]를 넘게 됩니다. 높고 험준하여 발을 붙이기가 어려우므로 군사들이 말을 타거나 짐을 싣고 가려면 살아서 돌아 온 사람이 대개 적으며, 또 어면보에 농사를 지을 땅이 없어 거주하는 백성들이 전연 생활해 갈 수 없으므로 삼수군 백성들이 보(堡)를 옛날의 후주(厚州)에 옮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고형산(高荊山)과 더불어 그 땅을 살펴보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명령이 없는 까닭으로 실현하지 못하였으니, 삼수 사람들의 등장(等狀)에 의거하여 다시 적당하지 않은지를 살펴서 보(堡)를 옮기는 것이 어떠하리까.
또 경성(鏡城)·부령(富寧)·명천(明川) 등의 고을이 지난해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국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또 남도(南道)의 곡식을 옮겨 구제하여야 살아나게 되어 있는데, 부령(富寧)은 금년에 또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식량이 완전히 끊어지게 생겼으니, 만약 그들의 묵은 빚을 징수한다면 반드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하고, 영사(領事) 성준(成俊)은 아뢰기를,
"부령(富寧)은 야인(野人)193) 들이 상시 들락거리는 지역으로서 5진(鎭) 중에서도 가장 고단한 데다가 해마다 실농(失農)하게 되었는데, 그 가난하고 조잔한 백성들이 수령(守令)이 갈려 교대될 즈음에 반드시 더 피폐하게 되어 곤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 부사(府使) 양윤원(楊潤源)을 그대로 더 있게 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이승건(李承健)은 아뢰기를,
"양윤원(楊潤源)이 마음을 다해 흉년을 구제한 것은 신이 눈으로 직접 본 일로서 이와 같은 수령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흉년 구제하는 절목(節目)이 지극히 곡진하였었으니, 만약 이 사람을 그대로 맡겨둔다면 부령(富寧) 백성들이 소생(蘇生)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성중온(成仲溫)이 아뢰기를,
"어제 천변(天變) 때문에 전지(傳旨)를 내려 신하들의 직언(直言)을 구하고 사냥하는 일을 정지하시므로 신민들이 기뻐하고 있는데, 다만 한위(韓偉)의 일과 내수사의 장리(長利) 일을 지금까지 곤란하게 여기고 계시니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는 일이 못됩니다.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는 도리는 경연(經筵)에 부지런히 나오시는 것과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따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찌 한 사람 한위(韓偉)나 내수사의 일 때문에 천변(天變)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성중온(成仲溫)이 아뢰기를,
"천변(天變)이 두 가지 일의 반응이란 것이 아니라 만약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려면 두 가지 일을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될 것입니다."
하고, 시강관(侍講官) 권균(權鈞)은 아뢰기를,
"옛 말에 ‘하늘의 보답은 실지로써 하고 형식으로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신하들의 직언(直言)을 구해 들이고 사냥하는 일을 정지하는 것과 같은 일로서는 하늘에 보답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고 공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풀림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전경(典經) 안처선(安處善)은 아뢰기를,
"이른바 경연이란 것은 비단 강독(講讀)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강론(講論)하되 온화한 안색과 따뜻한 말로 고금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을 되풀이하여 웃고 논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뇌정(雷霆) 같은 임금의 앞에서 누가 감히 할 말을 다할 것입니까. 신이 근일에 여러 번 경연에 시강(侍講)하였는데 진강(進講)한 사람이 비록 논계(論啓)한 것이 있어도 으레 모두 대답하지 않으시고 또한 묻지도 않으시니, 논란(論難)하는 본의에 어긋납니다. 또 봄과 가을에 강무(講武)하는 것은 예부터 전해오는 일이지만, 사냥하는 일[打圍]은 본래부터 다스리는 일에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천변(天變)이 있는 것도 역시 천심(天心)이 전하를 인자하게 사랑하여 먼저 꾸짖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한 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천변이 어찌 사냥하는 일 때문에 초래(招來)되었겠는가."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안성(朴安性)이 아뢰기를,
"내수사의 곡식을 장리(長利)라 명칭한다면 조관(朝官)에게 관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성종(成宗)께서 개혁하여 각 고을에 소속시켰던 것을 지난 번에 다시 설치한 것이나 그러나 수령(守令)의 해유(解由)로 빙고(憑考)하는 것은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성중온(成仲溫)은 아뢰기를,
"임금과 같이 왈가 왈부하는 사람은 대신인 것입니다. 내수사의 일을 대신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강제로 행해야 합니까."
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29 면
- 【분류】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과학-천기(天氣) / 왕실-경연(經筵) / 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 / 재정-상공(上供) / 금융-식리(殖利)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군사-관방(關防)
- [註 193]야인(野人) : 여진족.
○丙戌/御經筵。 大司憲成俔、大司諫李禮堅曰: "內需司長利, 非國家經費之物, 而使守令主之, 則非徒有弊, 亦於事體未便。 韓偉事, 上敎云爲大妃也, 臣等謂, 偉以守令, 徑遞陞堂上, 亦已足矣, 至授六曹堂上, 濫莫甚焉, 請收成命。" 持平成仲溫曰: "成宗朝李有仁爲利川府使, 治效最著, 成宗褒奬擢用, 猶不過爲司僕正而已。 上敎雖云爲大妃, 豈可以朝廷之公器, 爲慰悅母后之資耶?" 俔曰: "申從洽事涉貪汚, 不可使爲一司之長。 且六曹公事, 雖有堂上, 而郞官專主之, 以三十朔爲限者, 欲其久於其任。 今者或未十朔, 或二十朔而遷敍, 其久任箇滿之法安在? 非徒六曹, 各司皆有久任之法, 請依《大典》。" 仲溫曰: "(息)〔自〕 古戚里之人, 不次擢用, 以長驕心, 至於敗者多矣。 使之驕縱不自保, 亦豈其身之福哉?" 俔曰: "近來年少文學之士, 纔入弘文館, 不一月而復出爲六曹郞官, 無儲養意。 六曹雖重, 豈重於經筵官乎? 況我國交隣、事大, 華國之才不可不預養。 今善於詩文者, 洪貴達已老, 曺偉得罪, 權健有病。 臣以不才, 濫居文翰之任, 豈愜物望乎? 今年少文士無幾, 又不致意於學文, 請更加精選, 以專其業。 臣前日所啓勸奬節目, 宜速擧行。" 同知(知)事李承健曰: "臣在咸鏡道三年, 南北防戍之弊, 備嘗知之。 去年新置魚面堡, 自三水郡開通新路于堡。 其間踰五大嶺, 高峻險阻, 難可躡足, 軍士騎駄生還者蓋寡。 且魚面堡無耕食之地, 而居民頓無生理, 三水人民等, 願於古厚州移堡。 臣與高荊山欲審其地, 而以無朝廷之命, 故未果。 依三水人等狀, 更審便否, 移堡何如? 且鏡城、富寧、明川等處, 去年大歉, 盡散國穀於民, 又移南道之穀以賑之, 賴以得生。 富寧則今年亦歉, 民食頓絶。 若徵其宿債, 則必至流離轉死。" 領事成俊曰: "富寧 野人常所出來之地, 而五鎭之中最孤單。 連年失農, 則其貧殘之民, 守令遞任交代之際, 必加疲弊, 困不能支矣。 前府使楊潤源使之仍任何如?" 承健曰: "潤源盡心救荒, 臣所目覩。 如此守令, 不易得也。 其救荒節目, 至爲曲盡。 若仍任此人, 則富寧之民, 得以蘇復矣。" 仲溫曰: "昨以天變, 下傳旨求言, 停打圍, 臣民喜悅。 但韓偉與內需司長利事, 至今留難, 非所以謹天戒也。 謹天戒之道, 不過曰勤御經筵、從諫、愛民而已。" 王曰: "豈可以一韓偉與內需司之故, 有天變也?" 仲溫曰: "天變非謂二事之應, 若謹天戒, 則二事當先祛之也。" 侍講官權鈞曰: "古云: ‘應天以實, 不以文。’ 如求言、停打圍不足以應之。 但願殿下一心誠敬, 終始無倦。" 典經安處善曰: "所謂經筵, 非徒講讀而已, 從容講論, 和顔溫言, 古今治亂得失, 反覆問難。 不然則雷霆之下, 孰敢盡言哉? 臣近者屢侍經筵, 進講者雖有所啓, 例皆不答, 亦不問, 有乖論難之義。 且春秋講武古也, 而打圍則本不關於治道。 今有天變, 此亦天心仁愛殿下, 而先譴告之也。" 王曰: "所言則當矣。 然天變豈可以打圍, 而致之哉?" 特進官朴安性曰: "內需司之穀, 名之曰長利, 則不可使朝官掌之。 成宗革之, 屬于各官, 頃又復設。 然守令解由憑考事, 決不可爲也。" 仲溫曰: "人主相可否者大臣, 而內需司之事, 大臣皆曰不可, 則何必强爲乎?" 不答。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29 면
- 【분류】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과학-천기(天氣) / 왕실-경연(經筵) / 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 / 재정-상공(上供) / 금융-식리(殖利)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