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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39권, 연산 6년 9월 26일 정축 1번째기사 1500년 명 홍치(弘治) 13년

영의정 한치형 등이 홍문관의 인원을 충원하고 대우하여 학문을 닦을 것을 청하다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대제학 성현(成俔)이 함께 홍문 관원 권장 절목(弘文館員勸奬節目)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삼가 상고해 보건대,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선비를 선발하여 금마문(金馬門)에서 대조(待詔)하게 하였고, 선제(宣帝)장제(章帝)는 또한 유생(儒生)들을 석거각(石渠閣)백호관(白虎觀)에 모여 오경(五經)의 틀린 데를 강론하게 하였으며, 당(唐)나라의 홍문관(弘文館)과 송(宋)나라이영각(邇英閣)은 모두 궁궐과 가깝고 밀접한 곳에 설치하여, 거기서 경연(經筵)을 열어 고문(顧問)에 대비(對備)하고 조고(詔誥)를 짓게 하고 더러는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그 임무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 세종께서도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임용한 사람이 모두 한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로서 우대하는 예절이 지극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마다 모두 권면되고 노력하여 예절을 극진히 하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현명한 인재의 진출이 먼 옛날보다도 나았던 것입니다. 세조께서 비록 집현전(集賢殿)을 혁파(革罷)하였지만 다시 겸예문관(兼藝文館)을 설치하여 매양 신하들로 하여금 입시(入侍)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도록 하므로 육예(六藝)183) 중의 한 가지라도 있는 사람이면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성종께서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경연에 나오시고 또 야대(野對)184) 까지 하여 그들과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고 치도(治道)를 자문(諮問)하였는데, 대체로 오늘날 유명한 문사(文士)가 있는 것은 모두 그 당시에 교양하여 성취시켜 놓은 소치입니다.

전하께서도 즉위하신 이래로 더욱 이 직책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더러는 벼슬의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하여 임용하고 더러는 계급을 뛰어 승진시키며 더러는 주찬(酒饌)을 자주 내려 주기도 하고 더러는 전정(殿庭)에서 재주를 시험하기도 하며 더러는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게 하기도 하여, 그 은총(恩寵)이 융숭(隆崇)하셨으나 일찍이 위의 성의를 본받는 마음이 없어 학문을 힘쓰지도 않고 임무에도 부지런하지 않아 태만한 마음이 점차로 습관이 되므로, 비록 뜻 있는 선비가 있더라도 자기의 본색을 감추고 세속과 합류하고 남 따라 나가거나 물러가거나 하며 구차하게 세월만 연장해가고 있어 한림원(翰林院)같은 귀한 관서(官署)가 도리어 미소(微小)한 각 관사(官司)보다 못하게 되니, 사문(斯文)의 폐해가 이보다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체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도 오히려 배양(培養)하여 후일의 효과를 거두려고 하거던, 하물며 문원(文苑)185) 에 뽑혀 들어온 사람들을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고 단속할 줄을 모른다면 되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마음이 아프기로 삼가 그 폐해를 후면에 열거하옵니다.

1. 세종께서 집현전을 소중하게 여기시어 오직 대간이나 승지 및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관직에는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관사(官司)를 자기 집처럼 여겨 감히 요동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은총을 받아 쉽사리 옮겨 가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먹을 것 없이 냉랭한 것을 싫어하여 다른 관직으로 옮겨가기를 꾀하여 서로 잇달아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이 되는데, 이조(吏曹)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예사로 여겨 전주(銓注)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이 결원이 많은데도 능히 보충하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세종 때의 전례에 의하여 지금부터 이후로는 홍문관의 관원을 경솔히 옮기지 못하게 하소서.

1. 세종께서 집현전 관원들을 일찍이 출사하고 늦게 퇴근하게 하여 일관(日官)이 시각을 아뢴 후에야 나가게 하고 때로는 내시(內侍)를 보내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게 하였으며, 승정원에서는 날마다 그들의 이름을 써서 아뢰게 하였으니, 청컨대 이런 전례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1. 월과(月課)의 법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려 있어 그 유래(由來)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세종·세조·성종께서 모두 이것에 유의하여 일찍이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았으니 매우 훌륭한 법인 것인데, 근래에 와서는 선비들이 모두 등한시하고 소홀히 여겨 전혀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글을 짓는 사람이 적어져 짓지 않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 되며, 비록 글을 짓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혹은 다른 사람에게 차작(借作)하여 구차하게 그 수효만 채우게 되니, 저속하여 쓸 수가 없어 아이들의 장난과 같습니다. 또 지방관들도 문명(文名)이 있는 사람은 모두 글을 짓게 하는 것이 이미 법령이 되어 있지만, 체직(遞職)될 때에 거개 빠뜨려 버리고 작자(作者)의 반열(班列)에 있지 않아 문학을 목적을 달성하는 방편[筌蹄]으로 여겨 살피지도 않습니다. 청컨대 제술(製述)하는 인원을 다시 더 정밀하게 선택하게 하고 입춘(立春)이나 단오(端午)에 첩자(帖子)를 짓던 때의 예(例)에 의거하여 매달 세 번씩 대궐 안에 모이게 하고, 홍문관·예문관의 당상관으로 하여금 과차(科次)를 전담(專擔) 관장하게 하여 그 합격과 불합격 및 짓지 않은 사람을 빠짐없이 써서 아뢰게 하소서.

1. 전적(典籍)은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큰 것입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진(秦)나라의 전적을 거둬들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무제(武帝)는 장서각(藏書閣)을 세우고 서사(書寫)하는 관원을 두었으며, 성제(成帝)는 알자(謁者) 진농(陳農)을 보내어 흩어진 서적을 천하에서 구해 들이고, 유향(劉向)에게 명령하여 여러 경전(經傳)을 교정(校正)하여 모두 비부(秘府)에 간수하게 하였으며, 광무제(光武帝)는 유학(儒學)의 서적을 널리 모아 난대(蘭臺)와 석실(石室)에 가득 채웠으며, 수(隋)나라 문제(文帝) 때에는 우홍(牛弘)문제에게 청하여 사신을 사방에 보내어 특이한 서적을 구해 드리게 하되, 책 1권마다 견(絹) 1필씩을 상 주도록 하였으며,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는 위징(魏徵)·우세남(虞世南)·안사고(顔師古) 등이 태종에게 청하여 천하의 책을 구입해 들이고 5품 이상의 자손(子孫)들 중에 글씨 잘 쓰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정서(淨書)하여 내고(內庫)와 비서성(秘書省)에 간수하였으며, 현종(玄宗)마회소(馬懷素)에게 명령하여 도서(圖書)를 손질하게 하고 동도(東都)와 서도(西都)에 모두 집현원(集賢院)을 설치하고는 책을 4부(部)로 모으되 갑·을·병·정으로써 번호를 하였으며, 송(宋)나라 태종(太宗)인종(仁宗)은 중앙과 지방의 사서인(士庶人)에게 명령하되, 모두 관각(館閣)에 없는 서적을 진상하게 하여 혹 포(布)를 주기도 하고 혹은 벼슬을 주기도 하였으니,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서적을 소중하게 여긴 것은 국가의 규모·제도·생용(笙鏞)186) ·치도(治道)가 서적이 아니면 의뢰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종께서도 더욱 서적을 소중히 여기시어 혹은 구입하기도 하고, 혹은 인쇄하기도 하여 집현전에 간수하게 하였는데, 동방의 서적이 이때보다도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서적이 홍문관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었고 옮기거나 열람할 즈음에 혹시 파손되고 산실되어 옛날과 같이 완전하지 못한지 염려됩니다. 청컨대 대신을 시켜 다시 고열(考閱)하게 하되, 역대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없어진 것은 구입하고 파손된 것은 손질하여 엄중하고 조심스럽게 보관하여 그 시대의 전적을 온전하게 하소서.

1. 세종께서는 나이 젊고 명망이 있는 유신(儒臣)들을 선발하여 산방(山房)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하게 하였고, 성종 때에도 독서당(讀書堂)을 한강(漢江)가에 설치하고 번(番)을 나누어 글을 읽게 하였으니, 그 예비하여 양성하는 방법이 지극하였습니다. 근년에는 연사의 흉년으로 인하여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으니 실로 성상의 시절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청컨대 다시 인원을 정밀하게 선발하여 부지런히 학문을 닦게 하되 질병이나 대고(大故)187) 이외에는 사고를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27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

  • [註 183]
    육예(六藝) : 선비로서 배워야 할 여섯 가지 과목, 즉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 [註 184]
    야대(野對) : 왕이 밤에 신하를 불러 경연(經筵)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는 일.
  • [註 185]
    문원(文苑) : 홍문관.
  • [註 186]
    생용(笙鏞) : 음악.
  • [註 187]
    대고(大故) : 부모의 상사.

○丁丑/領議政韓致亨、左議政成俊、右議政李克均、大提學成俔同議弘文館員勸奬節目以啓曰: "謹按, 武帝選士, 待詔金馬門; 宣帝章帝又聚儒於石渠閣白虎觀, 講五經同異。 之弘文館, 邇英閣皆在宮閫近密之地, 以之侍經筵、備顧問、製詔誥, 或得參與朝政, 其任重矣。 我世宗倣故事, 設集賢殿, 所用皆一時妙選, 優待之禮極至。 故人皆勉勵, 思盡其禮。 由是, 賢材之出, 夐古無比。 世祖雖革集賢殿, 更設兼藝文館, 每令入侍, 講論經史, 名一藝者無不庸。 成宗設弘文館, 一日之內, 三御經筵。 又有夜對, 相與切磋學問, 咨訪治道。 大抵今之有名文士, 皆當時敎養成就之所致也。 殿下自卽位以來, 尤重此職, 或不次擢用, 或超遷資級, 或頻賜酒饌, 或令試藝於殿庭, 或令參預朝政, 其宸眷隆矣, 而曾無體上之意, 不力學、不勸仕, 懶慢之心漸至成習, 雖有志士, 和光同塵, 旅進旅退, 苟延歲月, 鑾坡貴署, 反不如微小各司, 斯文之弊, 孰大於是? 夫成均館、四學儒生, 尙且務令培養, 以收後效, 況選入文苑者, 其可任其所爲, 而不知檢乎? 臣竊痛心, 謹陳其弊于後。 一, 世宗重集賢殿, 惟於臺諫、承旨及特旨外, 不得他敍。 故人皆視其司如己家, 不敢有搖動之心。 今則不然, 高官承恩而易遷, 卑官惡其淸冷, 謀遷他職, 相繼爲六曹郞官。 銓曹不深思之, 視爲例事, 而銓注之, 館員多缺, 而不能補, 抑不知何故。 請依世宗朝例, 自今以後, 弘文館員不許輕遷。 一, 世宗令集賢殿員, 早仕晩罷, 日官奏時, 然後許出。 有時遣內竪, 察其有無, 承政院每日書名以啓, 請依此例施行。 一, 月課之法, 載在《大典》, 其來已久。 世宗世祖成宗皆留意於斯, 未嘗少弛, 至今不廢, 甚盛典也。 近來士皆怠忽, 專不留意, 作者少, 而不作者過半。 縱有作者, 或借述於人, 苟充其數, 鄙俚無用, 有同兒戲。 且外官有文名者, 竝使製之, 已有著令, 然遞職之際, 多所遺漏, 不在作者之列, 以文學爲筌蹄, 不之省, 請令製述人員, 更加精擇, 依立春、端午帖子時例, 每月三聚闕內, 令弘文館、藝文館堂上, 專掌科次, 其入格、不入格及不作者, 無遺書啓。 一, 典籍之有關於國家大矣哉。 高祖(國)〔圖〕 籍, 以定天下。 武帝建藏書之閣, 置書寫之官。 成帝遣謁者陳農, 求遺書於天下, 詔劉向校諸經傳, 皆藏于秘府。 光武廣聚儒書, 蘭臺、石室多積盈溢。 文帝時, 牛弘請分遣使, 搜得異書, 每書一卷, 賞絹一匹。 太宗時, 魏徵虞世南顔師古等請購天下書, 選五品以上子孫工書者繕寫, 藏于內庫、秘書省。 玄宗馬懷素爲修圖書使, 東西都皆置集賢院, 聚書四部, 以甲、乙、丙、丁爲號。 太宗仁宗詔中外士庶, 幷許上館閣所無之本, 或給布或加官。 歷代所以咸重書籍者, 國家規模、制度、笙鏞、治道, 非書無所資也。 世宗尤重書籍, 或購或印, 藏于集賢殿, 東方書籍, 未有盛於此時。 今則書在弘文館, 然歲月已久, 搬移搜閱之際, 恐有打破散逸, 不如昔時之完。 請命大臣更加考閱, 依歷代故事, 亡者購之, 缺者補之, 嚴謹典守, 以全一代之(竊)〔籍〕 。 一, 世宗命擇年少有名儒臣, 賜暇讀書于山房。 成宗朝設讀書堂于江上, 使之分番讀書, 其儲養之方至矣。 近因年險, 廢而不擧, 實爲明時之欠典, 請更加精選, 勤勤誨業, 疾病大故外, 不許稱故。" 從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3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27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법제(法制)